176화. 손님의 정체
“집에…… 지금 우리 집에 돈이 없잖아.”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이수정의 귓가에 이명처럼 울린 뒤 묵직하게 가슴을 때렸다.
“아빠는 아직 병원에 계시고, 엄마는 낮에 전단지 돌리면서 밤에는 혼자 힘든 마트 일 하는데 나보고 가만히 공부만 하라고?”
현준이 또한 마음이 답답한 듯 간신히 막고 있던 감정의 댐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엄마야말로 이기적이지 않아?”
“현준아……!”
“수학여행 왜 안 갔냐고? 제주도로 가는데 비행기를 타고 이것저것 다 하니까 비용이 40만 원이 넘어. 비싼 병원비는 계속 나가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마음 편히 수학여행을 가. 엄마가 겉으로 힘든 게 뻔히 보이는데 늘 괜찮다고만 하면서 나보고 공부만 하고 있으라고? 그게 될 것 같아? 공부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
“……!”
생각지 못한 아들의 고백으로 이수정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남편이 그렇게 된 뒤 어떻게든 아이들에게는 티를 내지 않고 일부러 더 씩씩하게 행동했다.
그런데 큰아들이 저렇게 생각한다는 자체가 너무 미안했다.
‘울지 말자. 절대 애들 앞에서 울지 말자.’
당장이라고 수전이 망가진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이수정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속으로 혼잣말을 반복했다.
“아들…….”
무너지는 감정의 마지막 끈을 간신히 붙잡은 이수정은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가 미안해.”
그리고 사과했다. 공부에 매진하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해야 할 아들이 돈 걱정을 하며 혼자 끙끙거렸을 생각을 했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정신이 없어서 현준이가 그런 고민을 하고 힘들어하는 줄 몰랐어.”
“…….”
“현준아. 네 말대로 공부는 나중에도 할 수 있어. 그런데 모든 일에는 때가 있어. 엄마는 엄마로서 지금 최선을 다하는 거고, 현준이는 학생으로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게 맞아.”
“나도 알아. 그런데 엄마가 너무 힘들잖아.”
“솔직히 엄마도 가끔은 힘들지. 그런데 현준이가 속이고 일을 계속하면 엄마 더 힘들 거 같아.”
“속인 건 죄송해요.”
“현준아, 오토바이 위험하잖아. 다시는 안 탔으면 좋겠어. 엄마는 이제 위험한 거 다 싫어.”
“안 탈게.”
“그리고 더 이상 알바도 하지 말고 학교생활에 충실했으면 좋겠어. 엄마는 힘들다가도 우리 삼 남매 보면 또 힘이 나. 원래 부모는 그런 거야.”
이수정이 말한 그대로였다. 세상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는 자식들의 웃는 얼굴 한 번이면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그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게 바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값없는 마음일 것이다.
“현준아, 엄마 마음 이해하지?”
“네…….”
엄마의 진심이 깊어질수록 현준이는 고개를 떨궜다.
“맞다! 그리고 돈 걱정은 이제 안 해도 돼.”
“……!”
“안 그래도 오늘 말하려고 했는데, 아빠 병원비 잘 해결될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현준이는 푹 숙인 고개를 재빨리 들었다.
“실은 병원비 후원받게 됐어.”
“후원? 저번에 안 될 것 같다고 했잖아.”
“엄마도 그런 줄 알았는데 조건이 된다고 오늘 연락이 와서 아빠 병원비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지. 그러니까 이제 너무 돈 걱정하지 마. 자꾸 그러면 엄마 진짜 속상해.”
“알았어. 정말 잘됐다.”
병원비를 후원받기로 했다는 말에 현준이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미안해. 엄마.”
“아니야. 미안하긴. 그리고 수학여행도 신청해.”
“수학여행은 나만 안 가는 거 아니야. 안 가는 애들도 꽤 있어. 나도 별로 가고 싶지 않고.”
“그럼 일단 조금 더 생각해 보자. 피곤할 텐데 가서 얼른 씻어.”
“네. 그리고 이거 엄마 거야.”
“이거 뭐야?”
자리에서 일어난 현준이는 가방에서 통장을 꺼내 이수정에게 건넸다.
“알바비 받은 거 모아 둔 통장인데 엄마 쓰라고.”
“네가 힘들게 번 돈인데 이걸 엄마 주면 어떡해. 그러지 말고 갖고 있다 필요한 거 있으며 써. 엄마 이 돈 못 써.”
아무리 수중에 돈이 부족해도 이수정은 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번 돈을 쓸 수가 없었다.
“나 이거 엄마 주려고 일한 거야. 그러니까 엄마가 써 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거 같아.”
“그래……. 알았어. 고마워 현준아.”
철컥-
아들이 방을 나가자 이수정을 통장을 열어봤다. 통장 안에는 백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하!”
통장을 보던 이수정의 눈에는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보 나 어떡해……!’
막막한 현실에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굵은 눈물방울이 통장 위로 뚝뚝 떨어져 번졌다.
그렇게 한참을 숨죽여 울던 이수정은 뭔가 결심한 듯 통장을 보던 시선을 화장대 위의 돈이 든 상자로 옮겼다. 그리고 침대 끝에 걸터앉은 그 자세로 한 시간이 가까이 고민하던 끝에 문자를 보냈다.
-정말 병원비 후원해 주실 건가요?
수신자는 고계득이었다.
문자를 보낸 잠시 뒤, 답장이 도착했다.
-물론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시죠.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수정은 생각이 많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문자를 보다 집안일을 하기 위해 거실로 나갔다.
* * *
우리병원 응급실.
“선생님?”
최모나가 검사 결과를 들고 집중 치료실에서 나온 태경에게 다가갔다.
“3번 베드 환자 결과 나왔습니다.”
“그래?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괜찮네.”
“그럼 입원은 안 해도 되겠습니까?”
“지금 수치 유지된다면 입원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일단 아침까지 응급실에서 지켜보고 그때 상태 보고 결정하자.”
“네, 알겠습니다. 왜 저래?”
오더를 내린 태경은 응급실 스테이션을 쳐다보다 물었다.
스테이션에 있던 이찬희가 검지를 바짝 세우더니 양손을 싹싹 비비는 이상한 행동을 하며 눈을 마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선생 지금 뭐라는 거야?”
“선생님께서 내주신 숙제의 양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 부디 너른 마음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길 바란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근데, 최 선생은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하루 이틀 저러는 게 아니라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이 선생한테 가서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응급실에서 숙제하지 말라고 해.”
“네, 선생님.”
“그리고 진료실에 있을 테니까 응급 오면 콜 해.”
“알겠습니다.”
응급실에서 나온 태경은 병동을 돌며 환자들을 살핀 뒤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아까 이동훈 선생님 보호자께서 전화 왔는데 통화하셨어요?”
접수처에서 일을 보던 임정숙 간호사가 태경에게 말했다.
“네, 수술 끝나고 나와서 바로 했어요.”
“좋아하시죠?”
“얼마나 고마워하시던지 제가 다 민망할 정도로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오후에 병원에 들러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은 이동훈은 집에 가자마자 기쁜 소식을 아내에게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이동훈의 아내는 태경에게 전화를 걸어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왜 안 그러겠어요. 아까 이동훈 선생님 진료실에서 나오는데 얼마나 표정이 환하던지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러게요. 앞으로 치료도 잘 받을 거 같고 잘되긴 했는데……. 한 가지가 걱정이네요.”
“무슨 걱정이요?”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 뭔가 내일부터 병원에 나와서 일한다고 할까 봐 살짝 걱정돼서요.”
열정 가득하고 긍정적인 이동훈은 병원을 나서는 순간은 물론 집에 간 뒤에도 빨리 일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 왔다.
“충분히 그러실 것 같은데요. 아까도 앞으로 병원에 자주 올 테니까 잘 부탁한다고 직원들한테 인사도 하셨어요.”
“잘 쉬어야 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있다가 말할 걸 그랬나 봐요.”
“아니에요. 좋은 소식이니까 빨리 알면 좋잖아요.”
“그래요. 좋은 게 좋은 거죠.”
“그런데 선생님 지금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진료실에서 논문 좀 찾아볼 게 있어서요. 왜요?”
“잘됐네요. 안 그래도 진료실 가셔야 한다고 말하려고 했거든요.”
“외래 환자 있어요?”
“아니요. 외래 환자는 아니고 손님이 와 있어요.”
“손님이요?”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손님이라고 하니 태경은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이 시간에 환자가 아닌 손님이라고 찾아올 사람도 마땅히 없었다.
“혹시 진료실 들어갔는데 이동훈 선생님이 계시고 그런 건 아니죠?”
“아니에요. 무슨 소리세요.”
“그럼 혹시 김철기 선생님 오셨나요?”
간혹 요양원에 있는 김철기가 연락도 없이 찾아온 적이 있었기에 그가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최근 메일에 언제 한 번 들리겠다고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전혀 아니고요. 들어가 보시면 아니까 일단 들어가 보세요.”
“하! 뭔가 수상한데.”
“수상할 게 뭐가 있어요. 자! 들어가 보세요.”
태경은 임정숙 간호사에게 등 떠밀려 진료실 문을 열었다.
철컥-
“와!”
“안녕하세요!”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방청객 뺨치는 리액션 소리와 함께 진료실 안에 있는 손님의 정체를 확인한 태경이 다시 문을 닫았다.
철컥-
“……!”
“어머! 선생님 왜 다시 나오셨어요?”
“뭐예요?”
“뭐긴요. 선생님 손님이죠.”
“저 녀석들이 손님이라고요?”
“네.”
“쟤들 설마 또……!”
별안간 예전 생각이 떠오른 태경이 아연실색하며 묻자 임정숙 간호사가 단칼에 부정했다.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요?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럼 왜 온 거죠?”
“글쎄요. 그건 직접 물어보세요.”
“언제부터 와 있던 거예요?”
“음? 가만있자……. 아까 선생님 응급 수술할 때 와서 좀 기다려야 한다니까 수업 듣고 다시 온 거라고 하던데요.”
“일단 알았어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자초지종을 알게 된 태경은 다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철컥-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안녕하세요.”
다시 들어온 태경을 보며 반가워하는 손님의 정체는 두 명의 고등학생이었다.
이 둘은 몇 달 전 사후 피임약을 처방받기 위해 신혼부부로 위장했던 현우와 솔이로, 그 당시 태경에게 도움을 받았었다.
“너희들이 여긴 어쩐 일이야?”
“쌤, 근데 저희 이름 기억하세요?”
“그럼. 넌 조솔이고 넌 하현우잖아.”
“오~! 역시 기억하고 계셨어.”
“너희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지?”
“현우도 저도 다 건강해요.”
“얘들아. 이건 어디까지나 선생님이 확인 차원에서 묻는 건데, 너희들 저번처럼 그런 일 때문에 온 건 아니지?”
이미 임정숙 간호사에게 물었지만, 다시 한번 확인 사살을 하는 태경이었다.
“그럼요. 그 이후로 저도 솔이도 모두 공부에만 집중하면서 건전하게 잘 만나고 있어요.”
의젓한 현우가 태경을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도대체 이 늦은 시간에 왜 온 거야?”
“아직 12시도 안 됐는데 늦긴 뭐가 늦어요? 저희 평소에 더 늦게 다녀요. 그렇지, 현우야?”
“그건 솔이 말이 맞아요. 과외하고 학원 끝나면 1시 다 될 때도 있거든요.”
“야! 너희 진짜 열심히 하는구나?”
“당연하죠.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야 의대 가죠.”
“선생님도 이렇게 하셨으니까 의대 간 거잖아요.”
“아닌데?”
태경은 진료실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초코 우유 두 개를 꺼내 솔이와 현우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학원 다닌 적 없어.”
“헐! 대박.”
“역시 선생님은 뭔가 그럴 거 같았어요.”
“맞다! 쌤 티비에 나와서 인터뷰하는 것도 봤어요. 되게 멋있던데요?”
“근데, 선생님 진짜 전문의 자격증을 세 개나 갖고 계세요?”
“그건 또 어서 들었어?”
“쌤 한창 인터뷰 기사 났을 때 누가 댓글에 그랬거든요. 트리플 보드에다가 머리가 워낙 좋아서 넘사벽이라고 하던데요.”
“넘사벽인 건 모르겠고, 트리플 보드는 맞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태연하게 말하는 태경을 보며 현우와 솔이는 위인이라도 본 듯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선생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대단은 이 시간에 여기 있는 너희들이 대단한 거고. 부모님 걱정 안 하셔? 수다 그만 떨고 왜 온 건지나 말해.”
“일단 부모님이 여기 온 거 잘 알고 계세요.”
“사실 저희가 언젠가는 꼭 찾아왔어야 하는데 오늘 시간이 나서 왔어요.”
“실은 여기 온 이유가 선생님께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거든요.”
“부탁?”
조잘조잘 참새처럼 떠들던 현우와 솔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부탁인데 둘 다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