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Good Doctor
“부탁?”
조잘조잘 참새처럼 떠들던 현우와 솔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부탁인데 둘 다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
“선생님께서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강조하면서 말하니까 무슨 부탁인지 듣기도 전에 무섭잖아.”
“쌤도 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얼른 말해. 집에 언제 가려고 뜸을 들여. 너희 내일 학교도 가야 하잖아.”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 물건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물건?”
“네. 그런 말 있잖아요. 공부 잘하는 사람 물건 갖고 있으면 좋은 기운 받아서 시험 잘 본다고요.”
“난 또 뭐라고. 그거 다 그냥 돌아다니는 낭설이야.”
“알고 있는데 그래도 그 기분이란 게 있잖아요. 현우도 저도 쌤이 롤모델이거든요. 그래서 볼펜이라도 받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이번에 시험 보는데 선생님이 주신 볼펜으로 보면 뭔가 대박이 날 것만 같아서요.”
“공부도 잘한다는 녀석들이 뭐 그런 말을 믿어. 알았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태경은 솔이와 현우가 하는 말이 의미 없다고 타박하면서도 책상 위에 있는 연필꽂이를 갖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 여기 있는 볼펜이나 연필 아무거나 가져가.”
“이 안에 있는 것들 평소에 자주 사용하지 않으시죠?”
“아무래도 자주는 아니고 그래도 진료 보면서 가끔은 사용하지.”
“그러면 안 돼요. 쌤이 자주 사용하는 걸로 받아야 그 기운을 받을 수 있단 말이에요.”
“아무거나 가져가지 뭘 그렇게 따져. 자! 이거면 돼?”
태경은 입고 있는 가운 포켓에 꽂혀 있는 볼펜 두 개를 빼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내가 일하면서 가장 많이 쓰는 볼펜이야. 이거면 됐지?”
“네, 완전 됐어요.”
“감사합니다. 쌤.”
“참나, 그게 그렇게 좋은 일이야?”
볼펜을 받고 활짝 웃는 아이들을 보며 태경이 물었다.
“그럼요. 당연히 좋죠.”
“늦었다. 얼른 가 봐.”
“엄마가 데리러 오신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야?”
“선생님께 감사한 것도 있고 해서 솔이랑 제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아이들이 준 상자를 열어 보자 남색 빛이 도는 클래식 볼펜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사 와. 그냥 오지.”
“용돈 많이 받아서 괜찮아요. 그리고 부모님도 절대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마음에 드세요?”
“아주 멋있는데? 쓰던 볼펜 두 자루 주고받기에는 너무 과한 거 아닌지 모르겠다.”
“에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다른 선생님들이랑 나눠 드세요.”
솔이와 현우는 태경에게 선물한 볼펜 말고도 직원들이 먹을 쿠키도 준비해 왔다.
“그래, 고맙다. 이건 선생님들이랑 잘 먹을게.”
“저희 이만 가 볼게요.”
태경은 아이들과 함께 주차장이 있는 뒷문으로 나왔다.
“선생님, 그런데요. 저희 의대 합격하면 소고기 사 주시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당연하지. 투 플러스 한우로 배부를 때까지 사 줄 테니까 붙기만 해.”
“쌤, 나중에도 현우랑 저 선생님 밑에서 수련받아도 돼요?”
“내 밑에서?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난 여기서 계속 있을 거 같은데. 그리고 수련은 큰 병원에서 받지 뭐 하러 여기서 받아.”
“병원이 중요한가요. 어떤 선생님 밑에서 수련받느냐가 중요하죠.”
“저희도 우리병원 되게 좋아해요. 그러니까 허락해 주실 거죠.”
“글쎄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을 좀 해 봐야겠네.”
태경은 왠지 모르게 현우와 솔이한테서 자꾸만 이찬희와 최모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만 같았다.
한동안 말 안 들어 날뛰는 거북이 1호와 2호를 훈련하느라 힘들었기에 신중해야 했다. 지금 덜컥 수락했다가는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말을 내뱉을 순 없었다.
‘참나!’
순간 저도 모르게 잠시나마 진지하게 생각하던 태경은 헛웃음이 났다. 아직 의대 입학도 안 한 고등학생 아이들에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 엄마 차다.”
태경의 답변을 기다리던 솔이는 주차장 입구에서 비상등을 켠 차를 보며 말했다.
“엄마 기다리시겠다. 얼른 가 봐.”
“아직 대답 안 해 주셨는데?”
“일단 의대 합격하고 너희 둘이 그때까지 잘 만나고 있으면 생각해 볼게. 됐지?”
“꼭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셔야 해요.”
“저랑 현우 결혼할 거라서 안 헤어질 거예요.”
“그래. 알았어. 그 마음 변치 말고 공부 열심히 해. 조심히 들어가고 잘 가!”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아이들은 태경에게 받은 볼펜을 흔들며 인사를 한 뒤, 차를 타고 병원을 떠났다.
“어! 솔이 현우 갔어요?”
태경이 뒷문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의진이 나왔다.
“방금 갔어.”
“아까 선배 기다리다가 제 진료실에도 왔었거든요. 인사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네요.”
“저놈들이 나중에 우리 병원에서 수련받으면 안 되냐고 해서 헤어지지 않으면 생각해 본다고 했어.”
“쟤들 진짜 귀엽지 않아요. 참! 선배도 볼펜 선물 받으셨죠?”
“이거?”
태경이 가운 포켓에 꽂아 둔 볼펜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그거 저도 받았어요. 어! 선배 거에는 각인도 새겼네요.”
“각인?”
의진의 말을 듣고 볼펜을 자세히 보니 영어 필기체로 ‘Good Doctor’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선배 보고 좋은 의사래요.”
“그러게. 이거 은근히 기분 좋은데?”
“당연히 기분 좋죠. 근데 너무 비싼 선물을 받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왜? 이 볼펜이 비싸?”
“몽블랑이라고 이쪽으로는 좀 알아주는 회사예요.”
“난 그런 거 잘 몰라서. 얼마나 하는데 그래?”
“제가 알기로는 이 정도는 넘을걸요?”
의진이 한쪽 손을 전부 펼쳐 보였다.
“진짜? 볼펜 하나에 오만 원이 넘으면 비싸긴 하네.”
“아니요. 오만 원이 아니라 공 하나 더 붙여야 해요.”
“뭐? 오십! 아니, 볼펜 하나에 무슨 오십이나 해? 이거 아무래도 돌려줘야겠는데?”
“애들이 선물로 준 건데 어떻게 돌려줘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비싼데……. 의진아, 이거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닐까?”
“어떻게 돌려주려고요? 그냥 기분 좋게 쓰세요.”
태경은 의진과 함께 병원으로 들어가는 내내 볼펜을 보며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 * *
어느 병원 응급실-
“고선숙 님? 3번 베드로 가 주세요.”
“네.”
한 여자가 다른 사람의 차례를 지켜보며 정신없는 응급실 복도를 시계추처럼 오가고 있었다.
여자는 큐빅이 박힌 화려한 엄지손톱을 입에 물더니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상당히 힘겨운 표정으로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저기 실례합니다.”
“네, 환자분.”
“제가 접수하고 기다린 지 깨 된 거 같은데 언제 진료를 볼 수 있나요?”
“아, 그게 지금 응급실 담당 선생님이 응급 수술로 한 분만 계셔서 아무래도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많이 안 좋은데 어떻게 빨리 좀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환자분. 응급 환자 먼저 진료하다 보니까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다들 기다리고 계셔서요.”
“저도 급한데요?”
“빨리 진료받고 싶으신 건 알겠는데 지금 환자분보다 더 위급한 환자분들이 있어서요.”
“하! 알겠습니다.”
간호사의 말에 알겠다던 여자는 그대로 응급실로 나와 주차장으로 가서 자신의 차에 탔다.
-응급실
그리고 지금 있는 위치에서 주변에 있는 응급실을 닥치는 대로 검색했다.
“하 씨! 여긴 너무 먼데…….”
여자는 상당히 초조한 듯 핸드폰을 쥔 반대 손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핸들을 계속 두드리기를 반복했다.
“우리병원. 여울동? 여기로 가야겠다.”
목적지를 정한 여자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한 뒤 지체 없이 시동을 걸었다.
* * *
응급실에서 취객을 상대하던 장득칠은 병원 곳곳을 돌며 순찰을 하고 있었다.
“아니, 진짜 왜들 담배꽁초를 남의 병원 담벼락에 버리는 거야.”
장득칠은 담벼락에 버려진 꽁초를 주우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보나 마나 또 술 먹은 놈들이 버리고 갔겠지.”
그는 볼멘소리와 함께 담배꽁초를 주우며 주차장이 있는 후문으로 향했다.
“쓰레기통에 버리면 어디가 덧나나? 하여간 인성들이 부족하다니까.”
후문으로 들어와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향하던 그는 별안간 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부웅-
“어이구야. 좋은 차 끌고 다니시네. 저게 얼마짜리야.”
한눈에 보기에도 금액이 상당히 나가는 흰색 외제차 한 대가 주차장 안으로 진입했다.
“어! 어! 왜 저래?”
그런데 어딘가 차가 이상했다.
“저기요, 속력 줄여요!”
차 안에 급한 환자라도 타고 있는 건지 속력을 줄이지 않고 들어오던 차는 ‘쿵’ 소리와 함께 담벼락에 앞 범퍼를 들이받았다.
범퍼가 부딪히기 전 장득칠이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뒤로 빼야 하는데……. 저 사람도 술 마셨나?”
끼익-
여전히 벽에 박은 채 그대로 멈춘 차 운전석에서 30대 젊은 여자가 내렸다.
여자는 베이지색 셔츠와 검정 슬랙스 정장 바지에 단정한 차림으로, 금빛 장식이 돋보이는 로퍼와 샤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저기요?”
벽에 박은 차 범퍼를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보고 있는 여자에게 장득칠이 다가갔다.
“혹시 병원 오셨나요?”
“네, 진료 보러 왔어요.”
장득칠의 말에 고개를 돌린 여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아, 그러시구나. 저기 일단 차를 좀 뒤로 빼야 할 것 같은데요.”
“차요? 아……. 차요.”
“힘드시면 제가 빼 드릴까요?”
“그래 주시겠어요?”
“예. 제가 뺄게요.”
장득칠은 여자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친절하게 차를 빼 주기로 했다.
탁-
차에 오른 장득칠은 조심스럽게 후진하며 벽과 붙어 있던 차를 뒤로 이동했다.
“비싼 차라 그런가? 승차감이 좋기는 좋네.”
차 안을 보며 감탄하던 장득칠은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기 위해 운전석에 있던 발을 움직였다.
“……!”
그런데 조금 전에 차에 탈 때는 느껴지지 않던 뭔가 신발 끝에 닿는 느낌이 선명하게 들었다.
“뭐지?”
신발 끝으로 톡톡 건드리자 마치 유리병끼리 부딪치는 작은 소리가 브레이크와 엑셀 사이에서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한두 개가 아닌 거 같은데……. 쓰레기인가?’
평소 엄청 깔끔한 장득칠이 별생각 없이 쓰레기라고 생각하며 치워 주려고 손을 뻗던 그때였다.
탁- 탁-
“지금 남의 차에서 뭐 하시는 거예요?”
밖에 있던 여자가 운전석 유리를 두드렸다.
“아, 그게 아니라 운전석 아래 쓰레기가 있는 것 같아서요. 제가 치워 드리려고 그런 겁니다.”
“아, 그래요? 되게 친절하시다. 괜찮으니까 그냥 두세요.”
“운전하시다가 위험할 수도 있는데 제가 치워 드릴게요.”
“아니요. 정말 괜찮아서 그래요. 이만 제 차에서 내려 주시겠어요?”
여자는 상당히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반응했다.
“네, 알겠습니다.”
한사코 거절하는 여자의 태도에 장득칠도 더는 권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병원 들어가려면 정문으로 돌아가야 하나요?”
“아닙니다. 저기 보이시죠? 저쪽 뒷문으로 들어가시면 접수처 바로 보일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차량 스마트키를 건네받은 여자는 몇 걸음을 걸어가더니 이내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다시 터벅터벅 뒷문을 향해 걸어갔다.
“술 냄새는 전혀 안 났는데…….”
겉모습은 술에 살짝 취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여자를 보며 장득칠은 몸이 많이 안 좋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