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78화 (177/472)

178화. 팔 말고 다리에서

“어서 오세요.”

“진료 보러 왔는데요?”

뒷문으로 들어온 여자는 곧장 접수처로 향했다.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어요?”

“제가 몸이 좀 많이 안 좋아서요. 여기 응급실 진료할 수 있죠?”

“그럼요. 어디 진료 보실 건데요?”

“속이 좀 심하게 안 좋아…….”

접수처 직원의 말에 답을 하던 여자는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 괜찮으세요?”

갑작스러운 여자의 행동에 놀란 직원이 데스크 안에서 뛰어나와 여자를 일으켜 세우며 의자로 안내했다.

“제가 기운이 없어서요. 감사합니다.”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 계세요.”

직원은 여자를 의자에 앉히고 데스크에서 종이를 가져와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 병원 처음 오셨어요?”

“네, 처음이에요.”

“그럼. 여기다 성함이랑 핸드폰 번호 일단 적어 주세요.”

“네.”

직원에게 종이와 펜을 건네받은 여자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으려다 멈칫했다.

“환자분 많이 안 좋으시면 제가 적어드릴까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워서요. 손수건이 어디 있더라…….”

직원의 말을 거절한 여자는 가방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았다.

분명 입으로는 손수건을 찾는다고 했으면서 그녀의 손은 버젓이 가방 입구에 보이는 손수건을 지나쳤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핸드폰으로 몇 번 두드리고 확인한 뒤 직원이 준 메모지를 채웠다.

“여기, 다 적었어요.”

“네. 진료는 외래 진료랑 응급실 진료 가능하신데, 어떤 걸로 보시겠어요?”

“응급실 진료 보려면 오래 걸릴까요?”

“지금 환자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기다리지 않고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위급한 환자가 들어오면 그 환자를 먼저 볼 수도 있어요.”

“네, 알고 있어요. 그럼 저 응급실로 가면 될까요?”

“네, 저쪽 복도 따라 조금만 가시면 응급실로 연결돼 있어요. 힘드시면 제가 부축해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여자는 직원에게 인사를 한 뒤 응급실로 들어갔다.

“흠!”

“영이 씨, 왜 그래?”

데스크로 돌아온 직원이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 있던 직원이 물었다.

“그게 좀 이상해서요.”

“이상하다니 뭐가?”

“저 환자분이 가방에서 뭘 찾다가 제가 의도치 않게 뭘 본 거 같거든요.”

조금 전, 여자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찾는다면서 가방을 뒤적일 때 데스크 직원 김영이는 순간 이상한 물건을 목격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순식간이라 정확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본 게 맞나 싶었다.

“뭘 봤길래 표정이 그래.”

“그게 주…….”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무래도 제가 잘못 본 거 같아서요.”

“싱겁긴. 근데 저 환자분 연예인 아니야?”

“연예인이요?”

“키도 크고 늘씬한데다 아까 선글라스 벗을 때 보니까 얼굴도 작고 예쁘던데?”

“그런가? 글쎄요. 전 얼굴은 잘 못 봤어요. 근데 연예인이면 매니저랑 같이 오지 않았을까요?”

“하긴. 이 시간에 연예인이 혼자 병원을 오진 않겠지. 그리고 요즘에는 연예인 아니더라도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많긴 해.”

“그건 그래요.”

탁- 탁-

대화를 마친 접수처 직원 김영이는 조금 전 여자의 가방 속에서 봤던 걸 떠올리며 전산 작업을 이어 갔다.

* * *

“아! 선생님. 너무 아파요.”

“여기 약 떨어지는 것 좀 조절해 주세요.”

“내가……. 난데……. 빨리 우리 마누라 불러와라.”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소리와 사방에서 들려오는 환자들의 아우성에 베드에 앉아있는 여자는 괜히 초조함을 느꼈다.

‘오래 걸리면 안 되는데? 여기서는 꼭 해야 하는데…….’

혹시라도 진료가 늦어지면 어쩌나 불안해하던 여자는 휴대폰을 보다 자신의 셔츠 소맷자락이 올라가 있는 걸 보고 흠칫 놀랐다. 그러더니 재빨리 소매를 쭉 잡아당겼다.

챠륵-

“안녕하세요.”

커튼이 열리고 임정숙 간호사가 여자가 있는 베드 안으로 들어왔다.

“환자분 아까 혈압 측정하시지 않으셨나요? 종이를 안 주셔서요.”

“아, 여기요.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요.”

여자는 민망한 듯 손에 쥐고 있던 꾸겨진 혈압 측정 결과지를 건넸다.

“종이가 꾸겨졌는데 어떡하죠?”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저, 진료 보려면 오래 걸릴까요?”

“아니요. 선생님 곧 오실 거예요. 잠시 계세요.”

“네.”

챠륵-

베드에서 나온 임정숙 간호사는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신환입니다.”

“몇 번 베드 입니까?”

“17번 베드요.”

“최 선생?”

의자에서 일어나는 최모나를 태경이 불러 세웠다.

“네, 선생님.”

“내가 볼게. 최 선생 201호 환자 드레싱 좀 해 줘.”

태경은 오늘따라 일이 많았던 후배에게 잠시 휴식을 주기 위해 진료를 자처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까 몇 번 베드라고 했죠?”

“17번 베드 33세 여자 환자인데요. 속이 많이 안 좋다고 내시경을 했으면 하더라고요.”

“내시경이라……. 혈압은요?”

“100에 64고 맥박은 98이에요. 환자분께서 힘들다고 하시더라고요.”

환자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은 태경은 곧장 베드로 향했다.

챠륵-

“안녕하세요. 이민휘 환자분.”

“네, 안녕하세요.”

“위가 안 좋으시다고요.”

태경이 베드 안으로 들어오자 여자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집중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아픈 증상을 쉴 새 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네. 원래 위가 좀 약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음식도 조심하는데 일주일 전부터 조금씩 통증이 있더니 이틀 전부터는 너무 아픈 거예요. 막 내 위를 누가 손으로 쥐어짜는 것 같은 통증이 오다가 별안간 타는 것 같은 통증도 느끼고 뭐가 꽉 막힌 것같이 답답했어요.”

“음식은 잘 드셨고요?”

“아니요. 음식도 잘 안 들어가고 어제오늘은 피까지 토했어요.”

“피를 토했다고요?”

차분하게 듣고 있던 태경은 피를 토했다는 말에 집중했다.

“네, 꽤 많이 토했어요. 선생님 저 정말 무섭거든요. 그래서 내일 병원 가려고 하다가 또 막 아파서 급하게 응급실 진료 보려고 온 거예요. 저 내시경 할 수 있는 거죠?”

이민휘는 다시 한번 내시경을 강조하면 물었다.

“일단 내시경은 검사 결과 보고 진행하도록 할게요.”

“선생님. 검사야 당연히 해야 하지만, 저 내시경 좀 꼭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진짜 힘들어서 그래요.”

“환자분, 잠깐 저 좀 보시겠어요? 제가 지금 몇 가지 확인 좀 해 볼게요.”

“네.”

“고개를 살짝 위로 조금만 들어보세요.”

가운 주머니에서 의료용 랜턴을 꺼낸 태경은 이민휘의 양쪽 눈 아래쪽 피부를 밑으로 당기며 안쪽을 확인했다.

“혀 한 번 내밀어 보시겠어요?”

“혀를요?”

“네.”

잠시 주춤하던 이민휘를 혀를 쭉 내밀어 보였다.

‘육안상으로는 괜찮아 보이는데…….’

태경이 간단한 신체 검진으로 눈 밑과 혀를 확인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환자의 피를 토했다는 말 때문에 혈액이 부족한 정도를 체크하기 위함이었다.

사람의 몸에서 피를 많이 흘리면 평상시에는 붉은색을 띠는 눈 밑에 안쪽 부분이 핏기가 없어 보이는 옅은 색을 띠며, 혀 또한 건조한 듯 말라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피를 많이 토했다는 환자의 말과 달리, 일단 방금 실시한 신체 검진으로 보이는 특별한 증세는 없어 보였다.

‘냄새도 이 정도면 상당히 양호한 수준인데?’

게다가 다섯 번째 바이탈 역시 2단계인 암모니아 중에서도 심하지 않은 냄새를 띠고 있었다.

물론 냄새의 단계야 언제든지 변할 수 있었다. 태경은 일단 검사를 진행하기로 하고 환자에게 몇 가지를 더 질문하기로 했다.

“환자분, 아까 피를 많이 토하셨다고 했죠?”

“네, 저도 너무 깜짝 놀랐다니까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바로 병원에 가 보시진 않으셨어요?”

“제가 요 며칠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맡아서 저녁까지 시간이 없었어요.”

“그럼 토한 피에서 거품이 보였나요?”

“거품……이요?”

이민휘는 잠시 주춤했다 말을 이었다.

“그게 있던 것도 같고 없던 것도 같고……. 제가 너무 놀라서 급하게 치우느라 자세히 확인을 못 했어요. 피를 자세히 보기가 좀 그렇잖아요.”

“색은 어땠나요?”

“그것도 잘…….”

“음식물은 섞여 있었고요?”

“아마 없던 거 같은데 어! 아니 약간 있던 거 같기도 해요.”

이민휘는 태경의 질문에 단 하나도 자세히 대답하지 못하고 적당히 얼버무리며 둘러댔다. 게다가 같기도 하다는 어딘가 애매모호한 대답을 했다.

“아! 맞다. 제가 사진 찍어 놓은 게 있어요. 잠시만요.”

이민휘는 휴대폰을 가까이 밀착해서 뭔가를 한참 찾더니 태경에게 화면을 돌렸다.

“이거예요.”

방금 전까지 놀라서 자세히 볼 수 없었다고 말했던 이민휘는 자신이 흘린 피 사진이라며 보여 줬다.

“이게 환자분이 흘린 피라고요?”

태경은 사진을 보자마자 미묘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네. 맞아요.”

“환자분, 어지럽지는 않으세요?”

“딱히 그런 건 없는 거 같은데요.”

“네, 알겠습니다. 임 선생님. 환자분 검사 도와주세요.”

“네, 선생님.”

챠륵-

“저기 선생님!”

태경이 임정숙 간호사에게 오더를 내리고 베드를 나가기 위해 커튼을 열자 이민휘가 급하게 불렀다.

“네, 환자분.”

“검사 결과 나오고 내시경 하면 수면 내시경으로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비수면으로는 도저히 무서워서요.”

“환자분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검사부터 할게요.”

태경은 다급함으로 토로하는 환자를 차분하게 달래며 베드를 나왔다.

‘뭐지?’

태경은 스테이션으로 걸어가며 환자가 말한 걸 다시 한번 떠올렸다.

‘저렇게 피를 많이 흘렸는데 반응이 없다고?’

방금 전 이민휘 환자가 보여 준 사진에는 한눈에 봐도 피의 양이 상당했다.

쏟았다는 표현보다는 흥건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만큼 의사라면 누가 봐도 걱정될 정도의 양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입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것과 달리 뭔가 좀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찜찜한데…….’

환자를 본 태경은 어쩐지 기분이 개운치 않고 뭔가 찜찜했다.

대개 환자들이 병원에 와서 아픈 증상을 말하라고 하면 생각보다 상당히 자세하게 나열한다.

물론 이민휘 역시 위가 쥐어짜는 것 같다며 아픈 양상을 꽤 자세히 말하긴 했다. 하지만 중요한 피를 토했다는 부분에서는 뭔가 설명이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이거, 뭔가 그러네.’

태경은 기분이 찜찜했지만, 환자를 함부로 판단하기보다는 검사 결과를 보고 생각하기로 했다.

“환자분?”

태경이 스테이션으로 향한 뒤 간호사가 이민휘가 있는 베드로 들어왔다.

“검사를 위해 채혈 좀 할게요.”

“아, 네.”

“그럼 소매 좀 잠시 올려 주시겠어요?”

“……!”

간호사가 채혈을 위해 소매를 올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민휘의 얼굴 위로 살짝 당황한 기색이 스치더니 전혀 예상외 답변이 되돌아왔다.

“팔은 안 되겠는데요?”

“예?”

이민휘는 무슨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의 소매 끝자락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저기, 간호사 선생님. 이거 피 뽑는 거요. 팔 말고 다리에서 채혈해 주시겠어요.”

“다리요?”

“네, 제 다리에서 피 뽑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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