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79화 (178/472)

179화. 헤모글로빈 수치

“네. 제 다리에서 피 뽑아주세요.”

보통은 채혈하거나 정맥 주사를 위한 라인을 잡을 때 환자의 팔에다 주사를 한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환자의 팔에서 할 수 없을 때는 다리에서 채혈하거나 라인을 잡을 때도 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팔이 좀 불편하세요? 그리고 다리 쪽도 가능은 한데 익숙하지 않으셔서 좀 더 아플 수도 있어서요.”

“저 다리에서 해 본 경험이 있어서 괜찮아요. 그리고 실은 제가 팔에 피부병이 심해서 남들한테 팔을 보여 줄 수가 없어서 그래요.”

이민휘는 말을 하면서도 소매 끝자락을 여전히 붙잡고 있었다.

“여긴 병원이라 보여 주셔도 괜찮아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이게 너무 콤플렉스다 보니까 좀 그래서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리에서 채혈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간호사는 이민휘의 말대로 다리에서 채혈했다.

“선생님, 그리고 이따 내시경 할 때도 정맥 주사 다리에 맞을 수 있죠?”

“네, 그렇긴 한데 내시경은 일단 선생님이 환자분 상태 보고 결정하실 거 같아요.”

“그건 저도 알죠. 그리고 아까 선생님도 제 상태 다 보고 가셨어요.”

“네, 그럼 잠시만 계세요.”

간호사는 베드 밖으로 나와 채혈한 피를 가지고 담당자에게 향했다.

잠시 뒤-

“이게 뭐야? 얼른 알려드려야겠네.”

임정숙 간호사는 이민휘의 검사 결과를 들고 태경의 진료실로 향했다.

똑똑-

“네.”

“선생님, 이민휘 환자 Lab 결과 나왔습니다.”

“그래요? 어떻게 나왔……!”

말함과 동시에 건네받은 결과지를 확인한 태경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거 이민휘 환자 결과 맞아요?”

“네, 선생님. 저도 좀 이상해서 몇 번이나 확인해 봤는데 맞더라고요.”

임정숙 간호사의 대답과 함께 태경의 시선이 다시 결과지로 향했다.

이민휘의 헤모글로빈(Hemoglobin, 혈액의 산소 운반과 관련된 수치)이 12였다. 결과지에서 나타내는 수치는 정상이었다.

‘정상이라고?’

어떻게 정상일 수가 있지?

이민휘는 분명 다량의 피를 토했다고 했으며 자신의 것임을 주장하는 사진까지 보여 줬다. 그 정도의 피를 흘렸다면 정상 범위 수치가 나오기 힘들 것이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그렇게 피를 흘렸으니 말이다.

뭔가 아이러니했다.

아까 실시했던 신체 검진 때도 이상했다. 눈 밑도 옅은 색이 아니었고 혀도 말라 있지 않았다.

이민휘가 말한 대로라면 뭔가 그에 따른 증상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맞는 게 전혀 없었다.

“이 환자 뭔가 이상하네요. 수치가 정상으로 나올 수가 없는데 정상이라니…….”

“아까 채혈할 때도 좀 이상했나 봐요.”

“채혈 때 왜요?”

“자기 팔에 심한 피부병이 있다고 다리에서 해 달라고 해서 팔이 아니라 다리에서 채혈했대요.”

“다리에서요?”

“네, 그런데 채혈 끝날 때까지 손으로 소매를 꼭 붙잡고 있더래요. 그리고 내시경 할 때도 라인 다리에 잡아 달라고 하고, 그 뒤에 스테이션으로 와서 수면 내시경 할 때 미다졸람을 쓰는지 프로포폴을 쓰는지 케타민을 쓰는지 물어봤대요.”

미다졸람과 프로포폴 그리고 케타민은 병원에서 사용하는 수면마취제였다.

“그걸 물어봤다고요? 왜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 우리 병원은 프로포폴 사용한다고 하니까 잘됐다고, 자기는 프로포폴이 몸에 맞는다고 했다고 하면서 내시경 언제 해 줄 거냐고 했다고 하네요. 선생님. 어떡할까요?”

임정숙 간호사의 말을 들은 태경의 미간이 점점 좁혀지더니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정상인 헤모글로빈 수치.

다량의 출혈과 통증 호소.

다리에서 채혈.

팔에 있는 피부병.

내시경과 수면마취제.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이민휘와 관련된 단어들을 퍼즐을 맞추듯 쭉 나열했다.

‘피부병 때문에 팔에 주사를 못 맞는다고? 어느 정도길래 그런 거지?’

태경은 이 부분도 상당히 아이러니했다.

보통 아무리 피부병이 심하다고 해도 환자들은 자신의 상태를 보여 주며 주사가 가능한지 물어본다.

이민휘처럼 단호하게 안 된다며 다른 곳에 채혈하겠다고 먼저 나서지는 않는다.

‘다리에 채혈하는 데 소매는 왜……!’

조금 전 임정숙 간호사가 했던 말을 떠올리던 태경은 순간 뭔가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시경과 프로포폴 그리고 팔이 아닌 다리에 채혈과 소매를 잡았다는 행동이라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딱 맞아떨어진다.’

드르륵-

“아! 깜짝아.”

곰곰이 생각하던 태경이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자 임정숙 간호사가 놀라며 반응했다.

“저 환자 접수 응급실에서 했나요?”

“아니요. 데스크에서 하고 넘어온 거예요.”

“왜 그러세요?”

“의심 가는 부분이 있어서요.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이 부족하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궁금해하는 임정숙 간호사를 뒤로한 채 태경은 접수처로 향했다.

“아까 이민휘 환자 누가 접수했나요?”

“전데요. 원장님. 제가 했어요.”

태경의 질문에 이민휘를 상대했던 김영이가 손을 들었다.

“혹시 접수하면서 환자 팔 부분을 보거나 뭔가 이상한 점 없었어요?”

“팔은 보지 못했고요. 접수할 때 힘들다면서 바닥에 한 번 주저앉았어요.”

“그래요? 알았어요.”

“저기, 원장님!”

그다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태경이 데스크를 벗어나려 하자 머뭇거리던 직원이 그를 불렀다.

“사실 좀 이상한 부분이 있긴 했거든요. 실은 제가 그 환자분 가방에서 우연히 뭘 봤는데, 그게 얼핏 본 거라 정확하지는 않아서요.”

“뭘 봤는데요?”

“그게……. 주사기요.”

“……!”

직원의 입에서 ‘주사기’라는 말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임정숙 간호사는 할 말을 잃었고, 태경은 자신이 내린 결론을 점점 확신했다.

“주사라니요?”

“그 환자분 주차장에 차도 박았는데?”

심각한 분위기에 약방의 감초처럼 합류한 최 팀장의 말 뒤로, 화장실을 갔다 오다 이야기를 들은 장득칠도 한마디를 던졌다.

“차를 박아요?”

“네, 비싼 외제차 앞 범퍼를 벽에 박았는데 별로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장득칠 역시 이민휘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점을 전부 말했다. 그리고 태경은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저 차입니다.”

“왐마! 상당히 비싼 차를 타고 오셨네.”

고가의 차를 보고 놀란 최 팀장과 달리 태경의 정신은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유리병 소리라고 했죠?”

“네, 원장님. 제가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하니깐 단호하게 반응하면서 거절하더라고요.”

-딸칵

“최 팀장님, 장 요원님. 다들 핸드폰 손전등 좀 비춰 보세요.”

태경이 의료용 랜턴으로 운전석 차장 쪽을 비췄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차에서 소리 날지 모르니까 너무 가까이 붙지 마세요.”

“아! 이게 의자 때문에 그런지 아래쪽이 잘 안 보이네요.”

장득칠이 말한 그대로였다.

의자의 가려져 문제의 유리병이 보이질 않았다. 뭔가 불빛에 반사되는 것 같긴 했지만, 정확히 뭔지 알 수는 없었다.

답답함을 느낀 태경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뒷좌석으로 랜턴을 비춰 봤다.

“……!”

그런데 뭔가 보였다.

“다들 여기 좀 비춰 보세요.”

“어! 저게 뭐예요?”

장득칠과 최 팀장이 뒤쪽으로 손전등을 비추자 소름 돋는 광경이 선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리병 맞네요.”

뒷좌석에는 수십 병의 유리로 된 작은 약병이 두서없이 쌓여 있었다. 또한 사용하고 버린 주사기도 보였다.

“원장님, 저거 약병 맞죠?”

“네, 프로포폴이네요.”

약병의 정체는 정맥 마취제의 한 종류로 수면마취에 사용되는 프로포폴이었다.

이민휘는 일명 우유 주사라고 불리는 프로포폴 중독자였다.

수면마취할 때 사용하는 약에 중독된 것 가지고 뭐 이렇게까지 호들갑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모르는 소리다.

2011년부터 환각, 각성, 습관성 중독을 일으키는 향정신성의약품인 마약류로 지정한 프로포폴은 개인이 함부로 투약해서는 안 된다.

프로포폴은 맞고 일어나면 마치 개운하게 잠을 자고 일어난 것 같은 맑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또한 다른 수면마취약에 비해 숙취 때 느껴지는 몽롱하고 어지러운 부분도 없다.

이 때문에 마치 피로 회복을 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켜 이런 부분에서 중독된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호흡곤란, 구토, 혈압 저하 등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개인이 오남용하면 안 되고, 부작용을 막기 위해 전문가가 주의 깊게 모니터링을 하며 투약해야 한다.

태경은 처음 다량의 피를 토했다고 했지만, 신체 검진과 헤모글로빈 수치가 정상인 것에 의문점이 들었다.

그러다 다리에서 채혈한 것과 팔을 안 보여 주기 위한 과도한 행동, 무엇보다 접수처 직원이 봤다는 주사기에서 중독자라는 걸 확신했다.

피를 토했다는 것과 위가 아파 내시경을 해야 한다는 말은 프로포폴을 맞기 위한 중독자의 거짓 쇼였던 것이다.

프로포폴은 권한 없는 사람이 불법으로 투약하면 마약류관리법에 따라 징역 5년 이하, 또는 오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을 수 있다.

“최 팀장님?”

“네, 원장님.”

“경찰에 당장 신고하세요. 우리 병원에 마약류 불법투약하는 환자가 내원해 있다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사실 이민휘 같은 사람이 병원에 왔다고 해서 모든 의료진이 경찰에 신고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적당히 모른 척하고 안 된다고 말하며 병원에서 내보내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프로포폴 중독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로 인해 삶이 망가진 사람들도 봤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태경은 프로포폴 중독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자살 충동을 느껴 건물에서 뛰어내린 환자를 응급으로 수술한 적도 있었다.

그 당시 환자는 10시간이 넘는 긴 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었다.

며칠 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환자에게 태경은 소중한 삶을 버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환자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멈추고 싶은데 멈추는 방법을 몰랐어요. 나한테 약을 파는 사람만 있었고, 하지 말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 당시 환자가 말했던 약을 파는 사람 중에 의료인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은 나중에 이런 환자를 봤을 때 외면하는 의사는 되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장 요원님은 제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시고, 혹시라도 이민휘 씨가 도망갈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네, 원장님.”

“그런데 원장님. 경찰이 올 때까지 어떻게 시간을 벌죠? 내시경 하시려고요?”

“중독자한테 약을 또 주면 안 되니까 내시경은 하면 안 되죠.”

“그럼 어쩌시려고요?”

“못 가게 붙잡아 둬야죠.”

“내시경 안 하고 가만히 시간만 끌면 의심하지 않을까요? 저런 사람들 은근히 눈치가 장난이 아닐 텐데요.”

“이 여자가 한 거랑 똑같이 해 보려고요.”

“똑같이요?”

“네. 장단을 맞춰 줘야죠.”

최 팀장과 장득칠의 궁금한 얼굴을 뒤로한 채 태경은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들어온 태경은 몇몇 직원들을 진료실로 불렀다.

“최 선생님, 응급실에서 하던 대로 환자 보고 이 선생한테도 사실 알려 주고. 특히 이 선생한테 괜히 관심 주지 말라고 해.”

“네, 선생님.”

이찬희는 평소 환자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도 있었기에 주의를 당부했다.

“그리고 임 선생님은 제가 말한 거 잊지 않으셨죠?”

“그럼요. 제가 가서 바람 제대로 잡아 볼게요.”

“그리고 진료실에 프로포폴 한 병 갖다 주세요.”

“네, 선생님.”

그 뒤 태경은 진료실로 들어갔고 임정숙 간호사와 최모나는 이민휘가 있는 응급실로 향했다.

그 시각-

“아직 안 나온 건가?”

이민휘는 초조한 마음으로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도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급기야 베드 커튼 주변을 기웃하던 이민휘는 마침 환자를 보고 다른 베드에서 나는 이찬희를 발견했다.

“저기요, 선생님?”

“네, 환자분.”

“제가 아까 검사를 했는데 아직도 안 나왔나요?”

“무슨 검사를 하셨는데요?”

“간호사 선생님이 피검사 한다고 채혈해 갔거든요. 얼마나 걸릴까요? 제가 좀 급해서요.”

이찬희는 환자를 보느라 이민휘에 대한 정보를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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