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82화 (181/472)

182화. 끈기와 지구력 그리고 똘끼

명함 한 장을 조심스럽게 내민 그의 태도는 간절하고 정중해 보였다.

“아, 네. 그런데 저한테 이걸 왜…….”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을 꼭 모시고 싶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저를요?”

“네, 정말 진심입니다.”

남자의 태도는 누가 봐도 진심 그 자체였다. 그는 태경에게 자신이 찾아온 진짜 이유를 아주 상세하게 설명했다.

밖에 외래 환자나 응급 콜이 없던 태경은 남자가 하는 말을 어느 정도 진지하게 들어 줬다.

사실 남자가 진지하다 못해 간절하게 이야기하다 보니 쉽게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제가 시간이나 날짜 이런 세부적인 것들은 물론 원하시는 게 있으면 그것까지 무조건 선생님께 맞춰 드리겠습니다.”

“아……. 그게 멋진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영상을 본 적도 있고요.”

“아, 그러세요? 이거 영광입니다.”

태경이 남자와 관련된 걸 알고 있다고 말하자 남자는 한껏 기대에 부푼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떻게…….”

“그런데 죄송하지만 제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줄 만한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저한테 오늘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진료하자고 생각하는 평범한 의사거든요.”

“평범하지는 않으신데…….”

“그리고 우리나라에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는데, 제 생각에는 그분들이 나가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하하!”

아주 정중하고 예의 있게 날라 오는 거절 멘트의 남자는 민망한 듯 웃어 버렸다.

“우리 선생님께서 뭔가 잘못 생각하신 거 같은데요? 제가 알기로는 외부 활동을 잘 안 하시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신다면서요?”

남자는 태경에 대해 꽤 많은 조사를 한 듯 보였다.

“네. 뭐 병원에 있는 날이 많기는 합니다.”

“평소 TV나 동영상 너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도 잘 안 보시고요?”

“네.”

“거 보세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 진료에 힘쓰다 보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고 계신다니까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꽤 영향력이 있는 분인데, 그걸 전혀 모르고 계세요? 여기 보세요!”

남자는 자신이 준비해 온 파일 맨 앞장을 펼쳐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저희가 한 달 동안 ‘최근 가장 만나고 싶은 인물’이란 주제로 자체 설문 조사를 했는데 누가 1위를 한 줄 아시나요?”

“…….”

“여기 보세요.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남자의 말대로 파일에는 태경이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정치인 등을 제치고 설문 조사 1위에 등극해 있었다.

“그러니까 선생님. 제발 마음을 좀 바꿔 주세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제가 말주변도 없고 생각보다 낯을 가려서요.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제가 진료 때문에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임 선생님?”

계속 대화하다가는 말릴 것 같은 태경은 급히 임정숙 간호사를 불렀다.

철컥-

“환자분 밖에서 처방전 안내 도와드릴게요.”

임정숙 간호사는 눈치 빠르게 태경의 의도를 파악하며 남자를 밖으로 유인했다.

“선생님, 이 파일은 두고 갈 테니까 모쪼록 꼭 읽어봐 주시고 다시 한번만 생각해 주세요. 진료 감사했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철컥-

“데스크에서 수납하시고 처방전 받아 가시면 됩니다. 안녕히…….”

“잠시만요. 간호사 선생님?”

남자는 인사를 하려던 임정숙의 말을 서둘러 끊으며 말을 이었다.

“네?”

“지금 어떤 상황인지 눈치채셨죠?”

“네, 어느 정도는…….”

“병원 일로 바쁘시겠지만, 김태경 선생님 좀 설득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 말이 영 안 먹히네요. 출연하시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말도 소용없을 거예요. 선생님께서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으셔서요.”

“하!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남자는 수납을 마치고 처방전과 함께 주차장이 있는 뒷문으로 나갔다. 그리고 일행으로 보이는 남녀 세 명이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급하게 따라나섰다.

“어떻게 됐어요?”

“…….”

“피디님! 어떻게 됐냐고요?”

남자가 대답하지 않자 맞은편에 있던 여자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태경에게 진료받은 뒤 무엇인가 부탁했던 남자의 정체는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SBC 방송국에 박필승 피디였다.

박필승은 예능 바닥에서는 스타 피디로 일반인조차 이름을 알 만큼 성공한 피디였다.

“속 터지기 일보 직전이니까 빨리 말하세요.”

박필승이 여전히 함구하자 오랫동안 함께 프로를 만든 왕 작가가 또 한 번 소리를 높였다.

“언니, 진정하세요.”

“선배님, 선생님이 뭐라고 하세요? 출현하시겠대요?”

왕 작가 옆에 있던 조연출과 후배 작가 역시 애가 타긴 마찬가지였다.

“어, 그게……. 거절당했어. 못 하겠대.”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우리 그럼 어떡해요?”

“아주 자상한 얼굴로 단호하게 거절하는데 틈을 안 주더라. 근데, 실물이 훨씬 좋아. 키도 크고 화면발이 잘 받겠어. 그리고 본인은 아니라고 하는데 말솜씨도 보통이 아니야.”

“거절했다는데 그게 뭔 상관이에요.”

박승필과 팀원들이 태경을 섭외하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일반인이든 유명인이든 대한민국에서 이슈가 된 사람이나 알려졌으면 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그들의 인생을 들려주고, 시험을 풀어 누적된 상금을 타가는 ‘방과 후 시험시간’이란 프로를 만들고 있었다.

시청률이 의미 없어진 요즘 꾸준히 10% 가까이 시청률을 내는 방송국의 간판 프로 중 하나였다.

그런데 프로그램 특집으로 찍어 둔 잉꼬부부로 소문난 톱스타 부부 영상이 그만 방송에 나갈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당사자인 톱스타 부부가 조만간 합의이혼을 하기로 했다며 방송을 내보내지 말 것을 통보해 온 것이다.

연출팀에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 무슨 엿 같은 상황인가 싶었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 하루에도 숱하게 일어나는 방송 바닥에서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편집까지 끝내고 광고까지 받은 영상 대신 내보낼 방송이 없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다음 편으로 찍어 둔 촬영분은 특집으로 내보내기에는 출연자들이 너무 밋밋했기에 도저히 내보낼 수가 없었다.

원래 특집 프로 다음에는 강약 조절을 위해 무난한 촬영분이 나갔기에 더욱 그랬다.

“내가 진짜 미친다. 미쳐!”

왕 작가가 동네 광년이 포스와 함께 머리를 흔들며 탄식했다.

사실 왕 작가는 태경을 미리 섭외해 특집에 내보내길 원했다. 하지만 박필승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들이란 주제로 다음 특집 때 태경을 섭외하길 원했다.

박필승이 고집을 부려 톱스타 부부가 먼저 촬영된 것이고 결국 이 사달이 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어요. 내가 게네들 이혼설 돈다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미안해. 3년 전에도 그랬잖아. 그래서 이번에도 찌라시인 줄 알았지.”

“이 일을 어떻게 하실 거예요? 누구 섭외할 사람 있어요? 다들 뭐, 떠오르는 사람들 있어?”

“근데 특집에 걸맞은 사람이 김태경 선생님밖에 없는데요?”

“국장님한테도 김 선생님 섭외됐다고 큰소리쳤는데 우리 진짜 어떡해요? 미방송분 편집해서 내보낼까요?”

“특집인데 무슨 개떡 같은 소리 하고 있어! 섭외해야지.”

팀원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박필승이 자신 있게 말했다.

“누구를요?”

“누구긴 누구야. 김태경이지. 방송국 놈들이 제일 잘하는 게 뭐야? 바로 끈기와 지구력 그리고 똘끼잖아. 그걸로 뚫어야지.”

“방법이 있어요? 저분 그때 세리세라 일 이후로 온갖 섭외 다 거절하실 분이세요.”

“석훈아. 법카 갖고 왔지?”

“그럼요.”

박필승은 법카를 건네받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고 있었다.

“왜 웃고 그래요?”

“좋은 수가 떠올라서. 다들 방송 때문에 바빠서 건강검진 제대로 못 받았지?”

“갑자기 건강검진은 왜요?”

“왜긴 왜야. 내일부터 김태경 선생님이 허락할 때까지 진료받는다. 가자! 접수하러.”

“네!”

생각지도 못한 대책에 후배 두 명이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는 사이 왕 작가가 소리를 높였다.

“그래, 가요. 섭외하려면 이 정도 노력은 보여야지. 방송 펑크 낼 순 없잖아.”

“그렇지! 역시 괜히 왕 작가가 아니야. 이번 건 잘되면 보너스 받는다. 가자!”

“네, 피디님.”

자신 있게 외친 박필승과 왕 작가는 후배들과 함께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 * *

서울의 한 아파트

거실 소파에 앉아 벽에 걸린 시계를 멍하니 보고 있던 이수정은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오전에 전단지를 돌릴 때도, 저녁에 마트에서 일할 때도 온통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상태였다.

바로 조금 뒤에 고계득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첫째의 오토바이 사건 이후 마음을 굳힌 이수정은 고계득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남편의 병원비를 후원받기로 했다.

“……마?”

“엄마?”

화장실에서 씻고 나온 첫째 현준이 몇 번이나 이수정을 불렀다.

“어, 어! 아들 왜? 배고프지? 도넛 사 온 거 있는데 먹을래?”

“아까 야자 끝나고 애들이랑 떡볶이 먹어서 괜찮아. 근데 엄마 어디 아파?”

“아프긴 그냥 뭐 좀 생각 중이었어.”

“또 아빠 생각하고 있었구나?”

“아빠 생각이야 늘 하지.”

“엄마, 내가 생각해 봤는데…….”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무심하게 털던 현준이 동작을 멈추고 이수정 옆에 앉았다.

“아빠 사건 말이야. 우리 제보해 보면 어때?”

“제보?”

“그 왜 있잖아. 억울한 일 당한 사람들 사연 소개해 주는 프로들. 거기에 아빠 일 알리면 전국적으로 방송 나가고 그러면 사람들이 더 많이 알게 될 거 같아서.”

“사실 엄마가 말은 안 했는데 한 번 했었어.”

“엄마가?”

현준이는 처음 듣는 소리에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응. 엄마랑 마트 일 같이하는 소라 이모 알지?”

“어.”

“소라 이모가 뉴스에 제보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

남편이 사고를 당하고 얼마 후, 이수정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마트 동료의 말을 듣고 저녁 뉴스에 제보했었다.

뉴스에 작은 자막으로 제보 메일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어서 제보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송국에서 돌아온 답변은 기대와는 달랐다.

-귀하께서 보내 주신 제보 메일을 꼼꼼히 확인해 보았으나, 죄송하게도 방송에 나가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부디 환자분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시고 일이 잘 해결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일주일 뒤에 돌아온 답변은 거절이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기에 고민하던 이수정은 직접 전화를 걸어 이유를 물었다.

“실은 저희가 뺑소니 주제로 몇 주 동안 방송이 나가서요. 같은 주제로 또 나가는 건 힘들 거 같아요.”

이수정과 가족들에게는 일상이 흔들릴 만큼 큰일이었지만, 방송국 사람들에게 뺑소니는 그저 흔한 아이템에 불과했다.

본인처럼 힘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방송에 사연이 나가는 일도 쉬운 게 아니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래서 그 뒤로 더 전단지를 돌리는 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방송에서는 그렇게 시민들의 편이 되어 준다고 잘도 떠들더니……. 너무하네. 그럼 내가 너튜브에 올려 볼까?”

“영상 같은 거 만들려면 그것도 보통 일 아니잖아. 공부도 해야 하는데 한번 생각해 보자.”

“네. 근데 현미랑 현웅이는 오늘 조용하네.”

“오늘 둘 다 일찍 잠들었어. 늦게까지 공부하기 힘들지 않아?”

“힘들긴. 사실 공부만큼 편한 게 어디 있다고. 열심히 해야지.”

이수정은 알바를 그만둔 후 약속대로 공부에 전념하는 큰아들이 참 고마웠다.

“내일 아침에 밥 먹고 갈래? 아니면 토스트 먹…….”

Rrrrrrrrrrrr

아이들이 먹을 아침을 미리 준비하려고 주방으로 향하던 이수정은 손안에서 느껴지는 휴대폰의 진동에 말문을 멈췄다.

-지금 근처에 와 있습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이수정은 본능적으로 고계득이 보낸 문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oo 상가 지나서 보이는 공터에 있습니다.

-거기 알아요. 나갈게요.

“엄마?”

“응?”

“난 아무거나 다 좋다고.”

“현준아, 엄마 잠깐 요 앞에 편의점 좀 다녀올게.”

“이 시간에?”

“그게 토스트 빵이 떨어져서.”

아들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이수정은 핑계를 대며 나갈 구실을 만들었다.

“그럼 내가 갔다 올게.”

“아니야. 엄마 실은 소라 이모가 급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도 나갔다 와야 해. 금방 올 테니까 문단속 잘하고 있어.”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엄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이수정은 가방을 챙긴 뒤 급히 집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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