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저도 의사입니다.
한적한 공터-
평소와 달리 운전기사를 일찍 퇴근시킨 고계득은 직접 차를 끌고 이수정을 만나러 왔다.
자고로 은밀한 일을 할 때는 보는 눈을 줄여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일한 기사라 할지라도 괜히 약점을 잡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기 때문이다.
고계득은 본인 스스로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구린내가 풍기는 일을 할 때면 언제나 극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빨리 왔네. 그만큼 마음에 여유도 없고 급하다는 거겠지.”
가로등 불빛에 걸어오는 이수정이 보이자 고계득은 자동차 라이트를 두 번 깜빡거렸다.
지잉-
“뒷좌석에 타시죠.”
고계득은 보조석 쪽에 서 있는 이수정에게 차장을 내리며 말했다.
탁-
희미하게 밀려들어 오는 가로등 불빛이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차 안을 비추고 있었다.
“보호자분 잘 지내셨나요?”
“네. 부탁이라는 게 뭐죠?”
“그래요. 어차피 시간도 늦었고 빨리 본론을 이야기하는 게 서로 편하지 싶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잠시만요!”
고계득이 본론을 꺼내려는 찰나 이수정이 급히 제동을 걸었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볼게요.”
“그럼요. 얼마든지.”
“진짜 부탁만 들어주면 우리 남편……. 병원비는 해결해 주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저는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입니다. 말씀해 주신 김에 저도 한 가지 확실히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번 일은 저와 우리 보호자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차창 유리 너머 골목을 보고 있던 고계득의 눈빛이 순간 룸미러를 통해 이수정에게 향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은 음흉한 어둠처럼 그 눈빛 역시 음흉했다.
“이수정 씨와 저, 이렇게 두 사람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리 보호자께 드릴 부탁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진료를 봐 주시면 됩니다.”
“진료요?”
“네, 제가 병원을 하나 알려드릴 겁니다. 그 병원에 가서 특정 의사에게 진료를 보세요.”
“그게 다인가요?”
“그다음 간단한 인터뷰를 하나 해 주시면 됩니다. 아! 물론 익명이라 얼굴도 안 나갈 거고 목소리 또한 변조할 거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수정은 지금까지만 들어서는 고계득이 말한 부탁이 뭔지 제대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무슨 인터뷰인가요?”
“진료한 의사에 대한 인터뷰로 그 의사에 대해 말하면 됩니다.”
“어떤 말인데요?”
“보호자분?”
“네?”
“제가 직업이 의사이긴 하지만, 실제로 의사 중에서도 인격이 덜 성숙한 사람들이 있다는 거 알고 계시나요?”
“…….”
“이를테면 환자한테 심할 정도로 불친절하다거나 또는 진료하면서 환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등 생각보다 인간성이 결여된 그런 쪽 말입니다. 제가 알려드릴 의사도 그런 쪽 사람이라서 말이죠.”
“그러니까 저보고 진료를 보고 그 의사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인터뷰해 달라는 말인가요?”
“맞습니다. 역시 이해가 상당히 빠르시군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데요?”
“아까 말한 그대로입니다. 불친절하고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고 말하면 됩니다.”
고계득은 이수정이 태경에게 진료를 보게 한 뒤 유명 너튜브에 제보해 인터뷰를 하게 할 생각이다. 이미 며칠 전에 해당 너튜브 채널에 익명으로 1차 제보를 마친 상태였다.
그쪽에서도 세간에 알려진 선한 이미지의 의사가 실은 환자들에게 심적 고통을 주고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말하자, 상당히 흥미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연락을 취해 왔다.
고계득은 너튜브 영상으로 태경을 저격해 공개적으로 끌어내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상이 공개된다면 사실 여부를 떠나 환자들을 생각하고 좋은 의사라는 이미지를 가진 태경에게 적잖은 타격이 생길 것이다.
물론 영상이 잘못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병원에 오는 환자 수는 예전보다 줄어들 확률이 높았다.
‘저 병원 의사가 환자에게 그런 짓을 했다며?’
‘거기 의사들이 되게 불친절하대.’
‘당사자가 그런 기분을 느꼈다면 그런 거 아니야?’
‘어쩐지. 아이 위한답시고 뉴스 나와서 설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누군가는 믿지 않겠지만, 반대로 누군가는 꺼림칙한 기분에 병원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병원 경영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고계득은 바로 이 부분을 노리며 생각보다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는 태경에게 쌓인 악감정이 많았다.
고계득의 눈에 태경은 돈도 백도 없이 그저 실력 하나만 있는, 쥐뿔도 없는 의사 나부랭이였다.
신화대병원 시절에도 병원의 이익보다도 환자만 생각하는 모습이 꼴같잖아서 그를 내쫓았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태경의 부제를 느껴 교수 자리까지 제안하며 손을 내밀었지만 거절당했다.
거절이 화가 나긴 했지만 고계득이 태경을 나락으로 보내려는 진짜 이유는 자기 돈과 명예를 건드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오랜 시간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던 제약회사와 관계가 틀어졌다.
그로 인해 두둑하게 챙기던 뒷주머니가 가벼워짐은 물론, 세미나 때 동료 병원장들이 보는 앞에서 태경에게 제대로 망신까지 당했다.
그 때문에 친하게 지내던 병원장들뿐만 아니라 신화대병원 안에서까지 이상한 소문이 돌아 명예가 실추됐다고 생각하며 이를 간 것이다.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간단한 부탁이지 않나요?”
‘간단한 부탁?’
고계득의 설명을 집중해서 들은 이수정은 과연 이게 간단한 부탁이 맞는지 생각했다. 물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따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안 좋은 상황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까 말한 사람이 정말 안 좋은 사람이 맞나요?”
“물론입니다. 저도 의사입니다. 어려운 환자를 돕고 그들을 치료하는 의사라고요. 그런 제가 왜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위해 이런 수고스러운 일까지 하겠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직접 하시는 게 더 효과 아닐까요? 큰 병원에 원장님이시니까 저보다 더 힘도 있으시잖아요.”
“방금 말씀하신 대로 전 대학병원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을 직접 하기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요.”
“…….”
이수정은 뭔가 혼란스러웠다. 돈이 필요한 건 맞았다. 그것도 아주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부탁이 이런 일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저한테 안 좋은 일을 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부탁을 드리고, 그 대가로 우리 보호자를 도와드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기 원장님?”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두 손을 꽉 잡고 있던 이수정이 고개를 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조금만 더 생각…….”
이수정이 어렵게 말을 꺼내던 그때였다.
철컥-
별안간 차 문이 잠기는 소리가 귓가에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면을 보며 이야기하던 고계득이 이수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치 뱀이 먹잇감을 향해 머리를 쳐드는 것 같았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놀란 이수정이 상체를 뒤로 바짝 붙이며 물었다.
“문 열어 주세요.”
“당연히 열어 드릴 겁니다.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손이 미끄러져 버튼을 잘못 누른 것뿐입니다.”
철컥-
고계득은 마치 실수인 것처럼 잠근 차 문을 다시 열었다.
“우리 보호자께서 뭔가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일주일 넘게 생각을 한 다음 먼저 연락을 주신 건 그쪽이지 제가 아닙니다. 말이란 건 말이죠. 한 번 입 밖으로 나가면 쉽게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말을 했으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죠.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탄 사이입니다.”
“…….”
따뜻한 미소로 포장한 가면 뒤에는 고계득의 악랄한 본성이 가득했다.
“그리고 아까 저한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병원장은 큰 힘이 있는 거 아니냐고. 맞습니다. 외부에서는 모르겠지만, 병원 안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 내 힘이 닿고 있죠. 물론 우리 차대한 환자가 누워 있는 외상 중환자실도 예외는 아닙니다.”
“……!”
순간 고계득의 입에서 남편의 이름이 나오자 이수정은 자신에게 다른 선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 원하는 걸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제 부탁 들어주시겠습니까?”
“……네.”
“이걸로 저와 이수정 씨의 거래는 성사된 겁니다.”
결국 이수정은 고계득의 제안을 수락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딱히 방도가 없었다.
곧 다가오는 중간 정산 날짜와 병원장이라는 고계득의 위치가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보호자 입장에서 거절했다가 괜히 남편에게 불이익이 있거나 잘 보살펴 주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점은 염려하지 마세요. 자!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드리죠.”
고계득은 그 뒤로 병원의 위치와 함께 태경의 이름을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연락했던 너튜브의 메일 주소와 함께 인터뷰 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상세히 알려줬다.
“그리고 차대한 환자의 병원비는 인터뷰한 동영상이 너튜브에 올라오면 제가 확인 후 바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계득은 이수정의 인터뷰가 올라오고 동영상이 화제가 되면 태경 역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화제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
“충분히 알겠습니다. 전 이만 가 볼게요. 일 관련해서는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하나만 더 확인하죠.”
차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려는 이수정에게 고계득이 급히 물었다.
“이런 일은 무엇보다 마음먹었을 때 빠르게 진행하는 게 피차 좋을 듯해서요. 우리병원은 언제 방문하실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일……. 내일 갈 거예요.”
“좋습니다. 살펴 가시죠.”
“아! 깜빡할 뻔했네요.”
차 문을 열고 내리려던 이수정이 가방에서 검은 봉지를 꺼내 고계득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이건 필요 없는 거 같아서요. 돌려드리겠습니다.”
“제 성의인데 그냥 받으셔도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성의는 좀 과한 것 같아서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검은 봉지를 뒷좌석에 내려놓은 이수정은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쯧쯧!”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봉지를 열어본 고계득은 혀를 차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봉지 안에는 얼마 전에 고계득이 줬던 돈뭉치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하여간! 없는 사람이 쓸데없는 자존심만 살아서는……. 어차피 거래는 성사됐으니까 돈은 안 받아도 괜찮겠지.”
돈이 든 검은 봉지를 보조석에 던진 고계득은 멀어지는 이수정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서둘러 문자 하나를 보냈다.
-내일부터 차대한 환자에게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다시 한번 남편의 이름을 들먹이며 이수정을 압박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좋아.”
고계득은 상당히 만족한 표정으로 공터를 빠져나가며 혼잣말로 떠들었다.
“김태경. 곧 큰 선물 하나 갈 거야. 기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