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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185화 (184/472)

185화. 10,032,078.

“이거 보이시죠! 선생님 저 정말 미치겠어요?”

“이틀 전에 받으셨다는 시술이 혹시 지방흡입인가요?”

태경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니 제가 지방흡입을 여기 팔 뒤랑 허벅지를 했거든요. 그 후에 이렇게 피멍이 전신적으로 들고 너무 어지러운 거예요. 참아 보려고 했는데 밤새 식은땀까지 나고 그래서 못 견딜 것 같아서 왔어요. 그리고 제가 모델 일을 하고 있어서 몸이 빨리 좋아져야 하거든요. 근데 시술받은 병원은 멀고 거기서도 설명하니까 빨리 응급실부터 가라고 해서 급하게 왔어요.”

“환자분 잠깐 뒤 돌아보세요.”

“네, 그리고 저 일부러 속바지 입고 왔거든요. 괜찮으니까 하체도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이런!’

지방흡입을 받은 부위를 중심으로 출혈 소견이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식은땀까지 난 걸 보아 아마 시술 중간에 혈관 손상으로 인한 출혈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환자분 침대에 누우시고요. 빠르게 검사하고 수혈부터 맞을게요. 지금 안쪽에서 출혈이 심해서 집중적으로 응급 치료가 필요해요. 우선 누우시고 검사부터 진행할게요.”

“네, 선생님 잘 부탁드려요.”

챠륵-

“저 환자 빠르게 검사 진행해 주세요.”

“네, 선생님.”

태경의 오더를 받은 의료진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뒤 환자의 검사 결과가 나왔다.

“선생님, 결과 나왔습니다.”

“지금 확인할게요.”

결과를 확인하는 태경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전신에 퍼져 있는 피멍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역시나 Hgb(헤모글로빈, 혈액 속 산소 운반 세포로 출혈 정도를 알 수 있음) 수치가 6이다. 환자는 응급이다.

“12번 환자 V/S full monitoring 해 주고 수혈 빨리 올라오라고 해 주시고, 그 전에 H/S(하트만 솔루션) 1L 제어장치 풀고서 그냥 다 들어가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I/O check 해 주시고요. 중환자실 자리 있는지 당장 확인해 주세요. 우선 지혈을 위해서 보… 그 상품명 보트로 뭐 갑자기 이름이 생각 안 나네요. 그…….”

“이거 말씀하시는 거죠?”

급한 마음에 순간 이름이 생각나지 않은 태경에게 임정숙 간호사가 약품을 들어 보였다.

“네, 그거랑 Vit.K랑 같이 주고요. 환자 스테이션이랑 가까운 데로 옮기세요. 중환자실 가기 전까지 제가 앞에서 직접 볼게요.”

“네, 선생님. 알겠습니다.”

환자의 피 검사 수치가 너무 안 좋았다. 지속해서 출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젊은 환자라서 출혈에 대한 대증적 치료를 해 주면 좋아질 것이라 본다.

물론 이래도 계속 출혈이 보이면 그땐 피부를 절개하고 원인이 되는 혈관을 결찰해야 할 수도 있다. 근데 아마 모델이라면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환자를 잘 지켜보기로 했다.

챠륵-

“환자분 우선 수혈 진행할 거고요. 지금 출혈이 많으세요. 이런 경우가 흔하지는 않지만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라서요.”

“안 그래도 제가 좀 무리해서 받긴 했거든요. 괜히 욕심부려서 이게 무슨 꼴이야.”

여자는 답답한 듯 혼잣말하듯 속상함을 내비쳤다.

“너무 놀라지 마시고 저희가 환자분 잘 지켜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태경의 오더 아래 환자는 수혈을 시작했다.

그 시각-

태경이 응급실에서 환자를 살피고 있는 사이 이수정이 막내아들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병원에 도착하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마치 다리가 땅에 달라붙은 것처럼 병원에 오가는 사람들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다 병원 마당 벤치에 일단 앉았다.

“현준아. 우리 여기 잠깐 앉아 있자.”

“맞다! 엄마 나 오늘 학교에서 좋은 일 있었다. 선생님이 나…….”

“나중에. 엄마 지금 뭐 좀 잠깐 생각 좀 할게. 알았지?”

“알았어.”

현준이는 엄마의 말에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떨궜다.

놀러 가는 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엄마랑 외출한다는 게 기분이 좋았다.

아빠의 사고 후 학교와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 가는 게 현준이가 하는 외출에 전부였다. 그래서 엄마와 버스를 타고 다른 곳을 간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놀러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버스 안에서부터 엄마와 대화를 잘할 수 없었다.

엄마가 평소와 좀 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늘 웃어 주고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엄마가 오늘은 웃지도 않고 말도 잘 하지 않았다.

엄마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어린 아들은 그런 엄마의 모습이 좀 서운했다.

머릿속이 복잡한 이수정 역시 아들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현준아? 엄마가 오늘 여기에 중요한 일로 온 거야.”

“중요한 일?”

“응. 엄마가 지금 생각할 것도 많고 좀 그래. 그러니까 여기 병원 들어가면 현준이가 조금만 얌전히 있을 수 있을까? 일 다 끝나면 집에 가서 놀아 줄게.”

“엄마 오늘 마트 안 가?”

“응. 오늘은 안 가도 돼.”

“알았어.”

“우리 아들 고마워.”

현준이를 끌어안은 이수정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걱정과 불안함이 가득했다.

“엄마. 근데 안 들어가?”

“어, 어. 들어가야지.”

그 뒤로도 40분 가까이 벤치에 앉아 있던 이수정은 마음을 정리한 듯 현준이의 손을 꼭 잡은 뒤 병원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 꼬마야.”

“아저씨 안녕하세요.”

두 사람은 정문에 서 있던 장득칠에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신화대병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두 사람을 반겼다.

신화대병원이 먼지 하나 없는 대리석이 깔린 호텔 같은 느낌이라면, 우리병원은 동네 이웃같이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밖에서 오래된 건물을 보며 환자들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접수처와 대기실 의자에는 많은 사람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철민 님?”

“네. 오늘 어디가 불편하셔서 오셨어요?”

“탈이 났는지 설사 때문에 배 아파서 왔어요.”

“네, 잠시만 앉아 계세요.”

“김영우 님?”

“네, 접니다.”

이수정은 일단 접수하기 위해 데스크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저기, 진료 보러 왔는데요?”

“우리 병원 오신 적 있으세요?”

“아니요. 처음 왔어요.”

“어디가 불편하셔서 오셨어요?”

“불편한 곳은 없고요. 검진받으러 왔어요. 초음파 가능하죠?”

“그럼요. 유방, 복부, 갑상선 등 다 가능합니다. 근데, 지금 보시다시피 환자분들이 많아서요. 꽤 기다리셔야 하는 데 괜찮으세요? 오늘은 예약 환자도 많거든요.”

동네 작은 병원이라는 고계득의 말만 믿고 이 정도로 사람이 많을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혹시 오늘 오후 늦게도 가능하신가요?”

“오후에는 김태경 선생님이 계시나요?”

“원장님이요? 혹시 원장님께 진료 보실 건가요?”

“네.”

“근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오늘 예약도 많고 원장님은 이따 수술도 들어가시거든요.”

“수술이요?”

“네. 저희가 다른 선생님들도 계시고 영상의학과 선생님도 계시는데 어떠세요?”

“안 돼요!”

접수처 직원이 민망할 정도로 짧지만 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갑자기 올라간 목소리에 직원이 당황한 걸 봤지만, 이수정은 어쩔 수 없었다. 온몸을 타고 도는 긴장감과 함께 마음먹은 이 일을 오늘 반드시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 오래 기다려도 되거든요. 대신 오늘 꼭 김태경 선생님께 진료 볼 수 있게 좀 해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저도 해 드리고 싶은데. 그게…….”

“영이 씨, 잠시만.”

직원이 난감해하는 사이 진료실로 향하던 임정숙 간호사가 다가왔다.

“환자분, 원장님 진료 볼 수 있도록 해 드릴게요.”

“정말이세요?”

“네, 영이 씨? 환자분 마지막에 이름 올려 드려.”

“아, 네. 수 쌤.”

“좀 많이 기다리셔야 할 거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만약 중간에 예약 취소된 환자 생기면 그 자리에 넣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이수정은 현준이의 손을 잡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 * *

“환자는 괜찮습니까?”

중환자실에서 내려오는 태경을 보며 응급실 스테이션에 있던 최모나가 물었다.

“괜찮아. 이 상태만 유지되면 호전될 거 같아.”

“정말 다행입니다.”

지방흡입을 받고 출혈로 피멍을 보이던 환자는 더 이상의 출혈 없이 중환자실로 잘 옮겨졌다.

“나 외래 보러 가니까 이따가 최 선생이 한 번 들려서 환자 살펴 줘.”

“네, 걱정하지 마십쇼.”

응급실에서 나온 태경은 진료실로 향했다.

“오늘은 외래가 많네.”

혼잣말하며 대기하는 사람들을 보던 태경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추고 덩달아 걸어가던 발걸음도 멈췄다.

“뭐지?”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세요?”

우두커니 서 있는 태경을 보며 출근한 이찬희가 부담스럽게 얼굴을 내밀며 인사했다.

“이 선생, 얼굴 치워라.”

“선생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면 안 될까요?”

“두 번 생각해도 안 돼.”

“남들은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는 곳인데 그냥 나가세요.”

“옳소! 이건 이 선생님 말이 백번 맞습니다.”

갑자기 끼어든 최 팀장까지 더해 두 사람이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건, 예능 프로 출연에 관한 건이었다.

전날, 박필승 피디가 다녀간 뒤 병원 내 소문이 쫙 퍼졌기 때문이다. 그 뒤로 보는 직원들마다 다들 프로에 출연하라며 한마디씩 거드는 중이었다.

“정 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이 선생이 나가면 되겠네.”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죠. 하지만 저는 선생님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병원을 대표해서 선생님이 출연하시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안 그래요. 팀장님?”

“우리 이 선생님 말솜씨가 굿입니다. 굿!”

“그리고 그 프로 지금 누적 상금도 어마어마하다고요.”

“……!”

“아까부터 누굴 자꾸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무 대답 없는 태경이 계속해서 같은 곳을 보고 있자 이찬희가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보긴 누굴 봐. 됐고. 얼른 옷 갈아입고 환자나 봐.”

“정말 출현 안 하실 거예요?”

“정말 안 해.”

태경은 한결같은 반응을 보이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선생님, 고민주 환자분 회복실에서 오셨어요.”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좀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내시경 끝나고 제가 한 시간 잔 거 있죠? 그래서 그런지 아주 개운하네요.”

“대장 내시경이 약 먹는 거 때문에 많이들 힘들어하시는데, 검사받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별말씀을요. 선생님 때문에 검사 잘 받았어요. 저 좀 어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주 깨끗합니다. 작은 용종 하나도 없어요.”

“어머! 그래요? 다행이다.”

“여기 모니터 같이 보면서 알려드릴게요.”

태경은 환자에게 내시경 사진을 보여 주며 자세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설명을 진짜 꼼꼼하게 해 주시네요. 저기, 선생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궁금한 거 있으시면 뭐든 말씀하세요.”

“궁금한 건 아니고요. 혹시 이거 한 번만 봐 주시겠어요?”

가방에서 스프링 노트 한 권을 꺼낸 환자는 빨간 매직으로 여러 숫자가 크게 적혀 있는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10,032,078. 이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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