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86화 (185/472)

186화. 괴리감

가방에서 스프링 노트 한 권을 꺼낸 환자는 빨간 매직으로 여러 숫자가 크게 적혀 있는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10,032,078. 이게 뭔가요?”

“뭔지 모르시겠어요?”

암호 같이 나열된 여러 숫자를 태경이 알 리가 없었다.

“네, 전혀 모르겠는데요.”

“사람들이 너튜브에 있는 선생님의 영상을 본 숫자예요.”

“제 영상이요?”

“네.”

여자가 보여 준 숫자는 태경이 삼중 추돌 교통사고 현장에서 응급으로 사람을 살리는 영상과 세영이의 인터뷰 영상 등 너튜브에 올라온 동영상의 조회수 합계였다.

“예전에 국도에서 벌어진 교통사고 현장에서 119대원 응급 처치하신 적 있죠?”

“네.”

“그 영상 하나만 조회수가 700만이 넘어요.”

유독 교통사고 영상이 조회수가 높은 건 외국에 사는 한국 유학생이 해외 이슈를 다루는 프로에 제보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외국 사람들까지 원본 영상을 보며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보통은 영상 하나가 100만을 넘겨도 대단한 건데, 700만을 넘겼다는 건 엄청난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도 연예인이 나오는 영상도 아니고 자극적인 영상도 아닌, 의사가 사람을 살리는 영상이 이 정도로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게 전 놀랍다고 생각해요.”

“환자분, 혹시 방송국 분이신가요?”

너튜브 얘기와 함께 대화를 듣다 보니 태경은 여자가 방송국 사람이 아닐까 싶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네. 인사가 늦었습니다. 박필승 피디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 고민주 작가라고 합니다.”

고민주는 ‘방과 후 시험시간’프로의 왕 작가로, 피디와 함께 프로그램 만들고 있었다.

“이쯤 되면 눈치채셨겠지만, 지금 예상하시는 대로 선생님 섭외하러 온 거 맞습니다.”

“그럼, 설마 섭외 요청하기 위해 검사를 받은 건가요?”

“네, 저 사실 내시경 작년에 받았는데 일부러 또 받은 거예요. 뭔가 선생님께 우리 연출팀의 진정성과 간절함을 전달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저 때문에 괜히 고생하시네요. 갑자기 마음이 확 무거워지는데요?”

“그럼 그 마음 그대로 출연하시면 될 거 같은데요. 아까 하던 말을 이어서 하자면 그 영상 밑에 어떤 분이 한국어와 영어로 ‘의사라는 이름에 충실한 멋진 사람.’이라는 댓글을 달았는데 공감수가 말도 못 해요. 피디님에게 설문조사 얘기도 들으셨겠지만, 사람들이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있어요.”

“말씀은 정말 감사한데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쁘시니까 제가 빨리 요점만 말씀드릴게요. 제가 어제오늘 일부러 검사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병원을 살펴봤어요. 그런데 우리병원은 생각보다 수술 환자도 많고 또 멀리서 선생님을 보기 위해 오는 환자도 많더라고요.”

왕 작가는 대학병원같이 큰 병원을 두고 굳이 태경을 찾아오는 환자들의 이유가 궁금했다.

물론 의사로서 그의 실력도 한몫하겠지만, 단순히 실력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제가 선생님 진료실에서 나오는 환자들의 얼굴을 유심히 봤는데요.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공통점이요?”

“네.”

“진료를 보고 나온 사람 중에 단 한 명도 간호사 선생님께 다시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왕 작가는 그 뒤 자신이 보고 느낀 점을 태경에게 설명했다.

작가 경력이 오래된 그녀는 방송을 위해 안 가 본 곳이 없었고, 그중에는 병원도 당연히 있었다.

‘병원 사람들’이란 시트콤을 준비하면서 병원 내 분위기를 취재하기 위해 한동안 여러 병원을 돌며 출근 도장을 찍은 적이 있었다.

그때 환자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런데 진료실을 나온 환자 중에 간호사에게 다시 질문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언제 다시 와야 하는지 같은 일정에 관한 질문이 아니었다.

뭔가 개운하지 못한 얼굴로 의사에게 미처 물어보지 못했던 자기 몸 상태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이거 원, 질문할 틈도 주지 않으니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누가 아니래요. 내 몸인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요.’

‘본인들이나 전문가지 내가 전문가인가. 저렇게 말하는 건 나도 하겠네.’

그중에는 의사가 자세한 설명보다는 내보내기 급급하다며 서운함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아무래도 많은 환자를 보려면 시간이 부족하고 어쩔 수 없는 부분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왕 작가도 그 상황이 되어 보니 달랐다.

할아버지의 지병이 악화해 병환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다니게 됐다. 그러다 보니 환자와 보호자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와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치료의 열정을 불태우기도 하고 반대로 실의에 빠지기도 한다.

의사의 말 한마디에 짜증이 나기도 하고 기운이 나기도 하는 거였다.

그만큼 환자에게 의사란 중요한 존재였다.

병원 규모에 상관없이 진료를 받다 보면 환자 입장에서 설명이나 진료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진료실을 들어가서 의사에게 물어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냥 씁쓸한 기분을 안고 수납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태경은 달랐다.

진료실을 나온 환자들의 표정이 다들 만족도가 높은 얼굴이었다. 게다가 항상 간호사가 묻는 말에도 환자들의 답변은 같았다.

‘혹시 일정에 관한 거 말고 궁금한 점 있으세요?’

‘아니요. 선생님이 워낙 설명을 잘해 주셔서 궁금한 거 없어요.’

의사가 단순히 설명만 잘한다는 게 아니라 환자들에게 집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사 김태경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던 왕 작가는 병동에 있는 사람들과 진료를 본 몇 사람에게 태경에 대해 물었다.

‘전, 갑상선 전이로 암 수술했고 지금 항암을 하는 환자인데요. 선생님을 볼 때면 나를 단순히 환자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환자의 아픔을 공감해 주는 분 같아요. 환자가 혼자서 외롭게 병마와 싸우지 않도록 함께해 주세요.’

‘믿음이랄까요? 제가 말주변이 잘 없어서 잘 설명을 못 하겠는데, 그냥 의사로서의 믿음 같아요.’

‘진짜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의사요.’

질문을 받은 환자들은 하나같이 태경을 신뢰하며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 작가 역시 이번에 검사를 하면서 태경을 겪어 보니 그들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어느 환자분은 자신을 의사라고 했는데, 그분은 저한테 의사가 인정하는 의사라고 했어요.”

태경은 그 말을 듣자마자 저 말의 주인공이 이동훈일 거라고 확신하며 피식 웃음이 났다.

“선생님. 최근에 췌관 내 유두 상 점액 종양 유형에 따른 치료법과 그 예후에 관한 논문 발표도 하셨죠?”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선생님 섭외하려고 논문 사이트에서 그간 쓰신 논문 전부 찾아봤어요.”

“논문 보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네, 영어도 많고 솔직히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데 피디님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해서 봤어요.”

“이게 괜히 저 때문에 다들 고생하시는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미안하시면 출연해 주시면 돼요.”

“하! 어렵네요.”

태경은 예전부터 방송 출연하는 걸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물론 몇 달 전, 세영이의 일로 방송을 출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이를 돕기 위해서 잠시 뉴스에 출연했던 거지, 지금처럼 예능 프로의 주인공으로 나간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본과 때 교수님께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의사가 유명세를 얻고 미디어 노출에 익숙해지면 환자보다 방송에 신경을 쓰게 된다고.

그 말이 인상 깊었던 태경은 자신은 무엇보다 환자에게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저 단순히 예능 프로에 출연하신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선생님의 방송을 보고 누군가는 참된 의사를 꿈꿀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의사로서 환자에 대한 마음을 다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정도면 출연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한 번만 진지하게 생각해 주실 수 있으세요? 부탁드릴게요.”

처음보다 조금 유해진 듯한 태경의 태도를 보며 왕 작가가 마지막 말을 전하던 그때였다.

철컥-

“제발 살려 주세요. 저희 프로 목숨 줄이 선생님께 달렸습니다.”

진료실 문 앞에서 귀를 대고 안에 상황을 살피고 있던 박필승 피디가 대뜸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푹 숙이며 호소했다.

“방송이 얼마 안 남았는데 펑크 나게 생겼습니다.”

어찌나 간절한 지 무릎이라도 꿇은 기세였다.

“출연만 해 주시면 제가 은혜는 반드시 갚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피디님! 이게 갑자기 뭐 하시는 거예요. 선생님 이만 가 볼게요.”

“……!”

왕 작가가 당황하는 태경을 대신해 박필승의 어깨를 밀쳤다.

“저희 프로는 악마의 편집도 없고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시청자들에게 전할게요. 선생님 저 좀 살려 주세요!”

박필승은 진료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간절하게 호소했다.

“저 정도면 정말 대단한 정성인데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연출팀이 돌아가면서 진료를 보러 오자 임정숙 간호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네요. 일단 다음 환자분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선생님.”

그 뒤, 태경은 외래 진료를 보고 정해진 수술 일정을 소화하며 정신없이 병원을 뛰어다녔다.

“엄마, 아직 멀었어? 집에 언제 가?”

그사이 이수정은 긴장된 마음을 안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고, 아들은 기다림에 지친 듯 보였다.

“현웅아 조금만? 응? 조금만 참고 엄마 진료 본 다음에 가자. 현웅이 핸드폰으로 게임할래?”

“정말? 나 게임해도 돼?”

평소에 엄마가 게임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에 현웅이는 게임 소리에 금방 얼굴이 환해졌다.

“응. 대신 소리 줄이고 해야 해.”

“알았어.”

그렇게 또 한참을 기다리던 중 드디어 임정숙 간호사가 이수정에게 다가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요. 이제 제 차례인가요?”

“네, 예약했던 환자분이 오늘 못 온다고 연락이 와서요. 진료실로 가시면 돼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진료실 앞에 도착한 이수정은 현웅이를 진료실 앞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현웅아, 엄마 진료 보러 들어가는데 게임하면서 잠깐 기다릴 수 있지?”

“아이랑 같이 들어가셔도 괜찮아요.”

“아니요.”

아이를 걱정하는 임정숙 간호사의 말에 이수정은 딱 잘라 말했다.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현웅아 괜찮지?”

“엄마 근데…… 아니야. 기다릴게.”

현웅이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다 짧게 답했다.

“엄마 갔다 올게.”

이수정은 임정숙 간호사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이수정이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자 찰나의 순간 태경이 잠시 멈칫하며 집중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방금 뭔가 유심히 살폈던 태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렇듯 환자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질문했다.

“오늘 유방 초음파 하러 오셨다고요?”

“네. 검진받으러 왔어요.”

“특별히 증상이 있거나 아프신 곳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검사를 안 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걱정이 돼서요.”

“유방암 걱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네…….”

“그러면 날짜를 잡아서 유방 엑스레이와 초음파를 비교해서 봐야 하거든요. 제가 가장 빠른 날짜를 따로 잡아서…….”

“아니요! 안 돼요. 저 꼭 지금 선생님께 진료받아야 해요.”

갑자기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답하며 이수정을 보던 태경의 시선이 잠시 모니터를 향했다.

-환자분이 조금 예민하신 것 같아요.

접수처 직원이 남긴 메모였다. 태경은 임정숙 간호사를 보며 살짝 고갯짓하더니 이내 다시 이수정을 쳐다봤다.

“환자분이 원하시면 지금 해 드릴 순 있어요. 그런데 정확하게 보려면 비교해서 보는 게 좋거든요. 그래서 설명해 드린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제가 많이 바빠서요. 그냥 초음파만 볼게요. 저 꼭 초음파 해야 해요.”

태경은 이때까지만 해도 이수정이 그저 건강 염려증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초음파 준비해 주세요.”

“네, 선생님. 환자분 이쪽에서 상의 탈의 하시고 걸려 있는 가운 입고 나오세요.”

“……네.”

탈의실에서 가운을 갈아입는 이수정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우리 병원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의사입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릴 순 없지만, 환자를 기만하고 조롱하며 질 나쁜 행실이 문제가 됐던 사람이죠.’

고계득은 분명 큰 문제가 있는 의사라고 했다.

몇 번이나 그걸 강조했다. 그런데 막상 태경을 직접 만나 보니 오히려 고계득이 했던 말에서 알 수 없는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이수정은 극도의 긴장감과 함께 탈의실을 나갔다.

“이쪽 베드에 누워 주세요.”

“네.”

“선생님, 준비 끝났습니다.”

이수정이 베드에 눕고 자세를 잡자 임정숙 간호사가 준비를 마치고 태경을 불렀다.

“자, 긴장하지 마시……!”

의자에 앉아 초음파 기계를 잡은 태경이 별안간 하던 말을 뚝 끊더니 다시 급하게 말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