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89화 (188/472)

189화. 딱 한 사람

“맞아요! 우리 아빠 이름 차대한이에요.”

장난감 비행기를 만지던 형웅이가 엄마 대신 해맑은 표정으로 답했다.

“혀, 현웅아?”

생각지 못한 아들의 발언에 당황한 이수정이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왜, 아빠 이름 맞잖아.”

“남편분이 교통사고로 신화대병원 외상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시죠?”

“…….”

“오늘 우리병원에 온 것과 반드시 저한테 진료를 봐야 한다고 했던 것까지. 모두 고계득과 관련이 있나요?”

탁-

이수정은 태경의 말을 듣다가 들고 있던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순간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려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입을 열진 않았다.

계속된 침묵과 이수정의 태도를 보고 태경은 이동훈의 짐작과 함께 고계득이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제가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우리 병원 마취 담당 선생님 중에 이동훈이란 분이 계시는데, 남편분의 교통사고 당시 마취를 담당하셨던 선생님이세요. 아까 쓰려졌을 때 대기실에 있다가 이수정 씨를 보고 저한테 알려 주셨어요. 아무래도 환자분이 진료를 보러 온 것 같지 않다고요.”

모든 정황을 유추한 태경의 말을 들으며 이수정의 손끝과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려 왔다.

“오늘 진료를 보러 온 게 고계득과 관련이 있나요?”

“그, 그게…….”

“임 선생님, 잠시만 들어오세요.”

뭔가 말을 하려다 멈칫하며 현웅이를 쳐다보는 이수정을 보며 태경이 임정숙 간호사를 호출했다.

아무래도 아들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현웅아, 혹시 배 안 고파?”

“배고파요.”

아까부터 계속 배가 고팠던 현웅이는 바로 반응했다.

“어머니. 선생님과 편하게 말씀 나누시고 제가 현웅이랑 직원 식당에서 같이 밥 먹고 오면 어떨까요?”

“엄마. 나 배고픈데 밥 먹고 오면 안 돼?”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아들의 배고프다는 말에 이수정은 허락했다. 무엇보다 현웅이에게 보여 준 태경과 임정숙 간호사의 모습을 봤기에 두 사람을 믿을 수 있었다.

철컥-

“이제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그 전에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도움을 드릴 수 있어요.”

“……!”

“이수정 씨, 오늘 진짜 진료만 보기 위해 온 거 맞습니까?”

“아……아니요.”

바짝 말라붙어 있던 입술을 움직인 이수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저 사실 진료 보러 온 거 아니에요. 흑!”

이수정이 모든 사실을 고백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태경 때문이었다.

아들과 자신을 대하는 모습은 물론, 다른 환자들을 대하는 태경의 진실된 모습을 보니 고계득과는 전혀 결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도와주겠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기에 염치없지만, 그 도움을 받고 싶었다.

혼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선생님이 예상하시는 거 전부 맞아요. 고계득, 그 사람이 도와 달라고 했어요. 선생님이 신화대병원에 있을 때 문제를 일으키고 나간 거라고. 환자에게 나쁜 행실을 했다면서 그러니 자신을 도와주면 남편의…….”

잠시 울컥한 이수정은 차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다스리며 말을 이었다.

“남편의 병원비를 지원해 준다고 했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인터뷰를 하라고 시켰어요. 부끄럽지만 지금 집안 사정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오늘 불순한 마음으로 진료를 보러 온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흑!”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이수정은 속사정을 전부 털어놓으며 결국 눈물을 흘렸다.

조용히 휴지를 건넨 태경은 차마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고계득이 어떤 사람인지 겪어 봤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악한 면이 있을 줄 몰랐다.

환자를 갖고 보호자에게 흥정하다니, 같은 의사라는 게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고계득 이 미친 새끼!’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절로 욕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본인의 목적을 위해 아무 잘못도 없는 보호자와 환자를 끌어들일 생각을 하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이수정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계속 사과의 말을 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순간 나쁜 마음을 먹었어요.”

태경은 그 모습이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분명 이수정이 하려 했던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 맞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수정은 잘못된 길로 가지 않았고, 모든 걸 솔직히 고백하고 잘못을 시인했다.

그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저 힘이 없는 환자의 보호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수정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대학병원 원장이 하는 말을 당장 도움이 절실한 보호자 입장에서 거절하기는 어렵다.

고계득 성격에 분명 자기 뜻대로 움직여 줄 적당한 인물을 찾았을 것이고, 그래서 이수정에게 일부러 접근했을 것이다.

‘어떻게 환자와 보호자를 상대로 이런 일을……. 의사라는 사람이 하는 짓이 참!’

의사가 가진 힘과 지식은 환자를 위험해 빠트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고치고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의사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환자의 안위가 우선이어야 하며 그 힘과 지식은 오직 환자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

고계득은 의사로서 자격이 없는 놈이었다.

“좀 괜찮으세요?”

이수정이 어느 정도 진정된 모습을 보이자 서 있던 태경이 맞은편에 앉았다.

“네……. 선생님, 절 도와주시겠다고 한 말은 감사한데, 아무래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빈말이 아니라 이수정은 진지하게 한 말이었다.

물론 아까 도와준다는 그 말에 진심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이건 아닌 거 같았다.

따지고 보면 고계득과 자기 가족 일인데, 상관도 없는 태경에게 도움을 받는 게 옳은 일인가 싶었다.

무엇보다 오늘 아들의 일로 이미 충분히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이수정 씨가 죄송할 일이 아니에요. 그보다 뭔가 생각한 방법이 있는 건가요? 왜 갑자기…….”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다만 선생님이 상관도 없는데 이 일이 끼어들었다가 괜히 곤란할 일이 생길까 봐서요.”

“고계득 원장이 절 걸고넘어지려고 꾸민 일인데 왜 상관이 없어요. 그리고 이번 일 그냥 넘어가면 그 사람 아마 다른 환자한테도 똑같이 이런 짓 할 거예요. 우선 이렇게 하세요.”

“어떻게요?”

“앞으로 고계득과 직접적인 연락은 하지 마시고 만약 불가피하게 통화를 해야 하면 짧게 하고 반드시 녹음하세요.”

“네, 그럴게요.”

“그리고 일단 오늘은 시키는 대로 진료를 봤다고 하세요. 그 너튜브에게 연락을 했다는 말도 같이 전하시고요.”

“일부러 연락을 한 척하라는 말씀이시죠?”

“맞아요. 혹시라도 고계득이 인터뷰 날짜가 언제냐고 물어보면 채널 운영자가 연락을 준다고 했다고 하세요.”

“그런데 만약 고계득이 직접 확인하면 어떡해요?”

“아마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일단 일이 진행되면 고계득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상당히 조심할 겁니다. 괜히 대학병원장이 꾸민 일인 게 알려지면 시끄러워질 테니까요.”

태경은 아직 고계득을 어떻게 혼내 줄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와주겠다고 호언장담한 이수정을 이대로 보낼 순 없었기에 일단 고계득이 의심하지 않는 대안부터 세운 것이다.

“그리고 연락할 때 병원비라는 말은 꺼내지 마시고 대신 약속을 꼭 지켜 달라는 문장을 한 번 강조하세요. 그럼 고계득은 이수정 씨가 이 일에 완전히 가담한 줄 알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제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저한테 꼭 연락 주세요.”

“네, 그럴게요.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뒤 이수정은 태경과 여러 이야기를 나눈 뒤 밥을 먹고 나온 현웅이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 * *

“정말 미친놈이 따로 없다니까!”

한동안 환자들을 진료한 태경은 이동훈, 의진과 함께 의국실에 모였고, 이따금씩 이찬희와 최모나가 들어와 고계득에 대해 열띤 토론과 함께 의견을 나눴다.

“내가 예상했던 게 딱 맞았지?”

이동훈은 집에 가는 것도 잊고 가장 열정적으로 흥분하며 고계득을 씹었다.

“하여간 그 인간 하는 짓거리가 개새x라니까.”

“근데 그 환자분을 일단 전원 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동훈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의진이 의견을 내놨다.

“전원?”

“네.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할 텐데 고계득이 있는 병원에서 보호자분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요.”

“하긴 사악한 고 새끼가 뭔 짓거리를 할지 모르니까. 김 원장 생각은 어때?”

“그건 안 될 거 같은데요.”

“왜요?”

“아니, 왜?”

“일단 외상 중환자를 전원 보낸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거 두 분도 알고 계시잖아요.”

“그거야 잘 알지. 그런데 고 새끼 때문에 걱정되니까 그렇지.”

일반 환자도 아니고 외상 중환자는 병상 확보도 어려웠고, 수술부터 지금까지 환자의 전부를 알고 있는 담당의를 바꾼다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막말로 담당 의사의 진료 태도나 환자가 잘 치료받지 못한다고 보호자가 느끼면 추진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만약 이수정의 남편을 직접 집도했더라면 태경은 무리를 해서라도 우리병원으로 전원을 준비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고계득이란 인간 때문에 아무 죄 없는 환자가 전원을 가야 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제가 아까 물어보니까 담당의가 구시경 교수님이라고 하더라고요.”

“맞아! 구 교수가 집도했지? 구 교수는 반대파잖아. 그러면 괜찮겠는데?”

신경외과 담당인 구시경은 묵 뚝뚝하긴 했지만, 환자는 꼼꼼히 돌보는 의사였다. 그리고 방금 이동훈이 말한 대로 그는 고계득의 라인이 아닌 반대파인 부원장 라인이었기에 고계득에게 흔들릴 일도 없었다.

“이수정 씨가 그러는데 구 교수님이 남편분에게 신경을 많이 써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문제는 고 새끼만 쏙 빼서 해결하면 되는데……. 거참! 이거 딱 하고 떠오르지가 않아.”

“근데 사실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대학병원 원장을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막말로 우르르 몰려가서 둘러싸고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네가 한 짓 다 알았으니 그만두라고 말한다고 들을 놈은 더 아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병원에 대놓고 폭로할까?”

“그건 오히려 이수정 씨가 곤란할 수도 있어요.”

그건 의진의 말이 맞았다.

이수정도 고계득의 제안을 받아들였기에 이 부분을 물고 늘어지면 오히려 고계득이 빠져나갈 명분을 주는 것과 같았다.

“생각보다 어렵네요.”

“하! 씨. 고계득 그 인간을 꼼짝 못 하게 할 방법이 정말 없는 거야?”

“아니요. 있어요.”

두 사람이 열띤 토론을 주고받는 사이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겨 있던 태경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을 잘못했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고계득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한테 알려야죠.”

“그 인간이 누굴 두려워할 사람이야?”

“있어요. 고계득의 손과 발을 묶고 말 한마디에 지옥까지 보낼 수 있는 딱 한 사람.”

“누구요?”

“도대체 누구 말하는 거야?”

침대 앞에 서 있던 태경이 어리둥절한 두 사람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고돈진이요.”

“고돈진!?”

“그 사람이 누군데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의진의 말이 끝나자 이동훈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벌떡 일어나 답했다.

“신화대병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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