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전 국민 술래잡기
“고돈진!?”
“그 사람이 누군데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의진의 말이 끝나자 이동훈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벌떡 일어나 답했다.
“신화대병원 이사장.”
“이사장이요?”
“어.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고계득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이사장밖에 없잖아.”
신화대병원처럼 큰 병원에서 원장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사람은 바로 이사장이었다.
병원에서 이사장의 힘은 계급장, 나이, 인맥 모든 걸 막론하고 절대적이었다. 그만큼 말 한마디로 모든 걸 뒤집을 수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긴 병원에서 이사장이 절대 권력은 맞죠.”
“내가 초치는 건 아닌데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어.”
누구보다 적극적이던 이동훈이 꽤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고계득을 발탁해서 병원장에 앉힌 것도 고돈진이고 재임을 최종 승인한 사람도 고돈진이야. 그만큼 고계득은 이사장의 신뢰를 받고 있다고.”
이동훈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
어느 직장이나 비슷하겠지만, 일을 잘하는 사람은 소위 인성이 별로여도 회사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을 잘하기 때문이다.
일을 잘 못 하고 착한 사람과 싸가지 없지만 일을 잘하는 사람 중 택일을 하라면 사람들은 대부분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만큼 조직 사회에서 능력이 있다는 건 상당한 플러스 요인이며 인정받고 앞으로 치고 나갈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의사가 싸가지가 없어도 실력이 좋고 환자를 잘 고치면 그만이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한들 실력이 뛰어나고 돈을 벌어다 주면 병원에서 터치하지 않는다.
고계득도 그랬다. 인성이야 개판 그 자체였지만, 병원장으로서 경영 전반에 있어 머리가 잘 돌아갔다.
일반 회사와 달리 대형 병원이 흑자를 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고계득은 환자보다는 병원의 이익이 더 중요했고, 그런 점이 병원 재정을 쥐고 있는 이사장 마음에 든 것이다.
이사장 또한 고계득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원장 자리에 재임까지 승인한 고돈진도 어찌 보면 비슷한 부류라는 소리다.
그렇기 때문에 고계득이 한 짓을 알아도 과연 조치를 취할까 싶었다.
이동훈은 이 부분을 염려하며 한 소리였다.
“진짜인지는 모르겠는데, 같은 고 씨에 먼 친척뻘이라서 이사장이 더 아낀다는 소리도 있었어. 태경이 너도 알잖아. 고돈진도 결국 똑같은 놈이야. 그리고 지금 이사장 미국에 있어.”
답답한 이동훈이 목소리를 높였다.
“대형 병원 윗대가리 중에 진짜 절절하게 환자 생각하는 놈들이 몇이나 있겠어? 안 그래? 죄다 그냥 다들 돈만 밝힌다고. 돈만!”
“지금까지 이동훈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종합해 보면 설령 이 사실을 이사장이란 사람이 알아도 소용이 없다는 거잖아요. 게다가 현재 한국에도 없고.”
“그러니까 미국에 있는 이사장도 이 일을 알 수 있도록 소용이 있게 만들어야지.”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궁금해서 숨넘어가겠다.”
“고계득이 목숨처럼 여기는 병원장 자리에서 끌어내릴 방법은 이거예요.”
태경은 가운에서 명함을 꺼내 두 사람 앞으로 내밀었다.
-SBC 예능국 PD 박필승
“방송?”
“선배, 그 예능 프로 출연하시려고요?”
태경은 어떻게 하면 이수정과 환자를 보호하며 동시에 고계득에게 본때를 보여 줄지 생각했고, 결국 방송 출연이 답이었다.
제아무리 이사장이라고 할지라도 사회적인 이슈가 된 골칫덩어리를 끌어안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근데 태경아 너 괜찮겠어?”
이동훈이 별안간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방송이 나가면 사람들이야 널 양심 있는 의사라고 좋게 생각하겠지만, 반대로 몇몇 의사들한테 안 좋게 비칠 수도 있어.”
“저도 이동훈 선생님 말씀에 동의해요. 내부적으로 말이 나올 수도 있어요.”
이미 태경 역시 생각한 일이었다.
같은 의사끼리 눈감아 줄 것이지 뭐 저렇게 방송까지 나와 의로운 척하냐고 떠드는 사람들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도 아니고 이미 그런 배타적인 시선은 충분히 겪어 봤기에 전혀 두렵지 않았다.
“두 분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난 신화대병원에서도 아웃사이더였어. 괜찮아.”
“그래, 까짓것 의사가 뭐 있냐? 환자만 생각하면 됐지. 그리고 태경이 너 아웃사이더 아니야.”
“그럼요. 우리병원에선 누가 뭐라고 해도 인사이드 중심에 있는 수장인데요.”
두 사람은 태경의 뜻을 이해하고 도와주기로 했다.
“이야! 이거 방송은 우리 김 원장이 출연하는 건데 꼭 내가 출연하는 것처럼 기대가 되냐.”
“저도 그래요. 근데 선배 방송 나가서 어떻게 말씀하시려고요?”
“고계득을 술래로 만들려고.”
“술래요?”
의진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인 태경은 이수정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 * *
철컥-
“왕 작가?”
박필승이 차 문을 열고 들어오자 왕 작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좀 괜찮으세요?”
“아니, 죽을 거 같아. 혹시 나 어디 잘못된 거 아닐까?”
하루 사이에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 된 박필승은 계속해서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장을 비워 내는 중이었다.
“잘못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야. 아무래도 약을 잘못 준 거 같아.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화장실을 많이 갈 수는 없잖아. 이제 변기에 엉덩이만 대면 물이 나온다니까.”
“원래 그런 약이에요. 피디님, 대장 내시경 처음 받아 보세요?”
“어. 나 처음인데. 우리 가족들이 받으라고 노래를 불러도 안 받고 있다가 이번에 받는 거야. 근데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지.”
“그러니까 그냥 하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이미 제가 김태경 선생님께 다 전달했는데 왜 굳이 내시경을 한다고 하셔서 고생을 사서 하세요.”
“그럼 어떡해!”
왕 작가의 이어 박필승까지 내시경을 하게 된 건 역시나 태경의 섭외 문제 때문이었다.
도대체가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환자를 보느라 바쁜 태경 때문에 검사해야 그나마 대화를 할 시간이 생기는 것 같았다.
“왕 작가도 했잖아. 내가 하자고 했는데 빠지면 안 되지. 그리고 이 정도 정성은 보여야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일 거 아니야.”
“그보다 피디님 검사 시간 언제예요?”
“몰라. 좀 남은 거 같은데.”
“다 늦은 밤에 내시경까지 받느라 고생하시네요.”
“근데 나 방금 화장실 다녀오면서 슬쩍 진료실 열어 봤는데 안 계시더라. 설마 오늘 퇴근하신 건 아니겠지?”
“퇴근은 무슨 퇴근이세요. 선생님 검사 예약하셨잖아요.”
“아! 그렇지.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아까 방송국에서 회의 끝나고 나오는데 막내가 상금 이야기를 슬쩍 하면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누구? 김 선생님한테?”
“네.”
“에이. 어림없는 소리야. 전에 유산균 회사에서 광고 제의한 것도 거절했다고 하잖아. 돈으로 움직일 양반이 아니야.”
“저도 똑같이 말했어요. 막내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라서 그래요.”
“근데 우리 상금이 얼마나 쌓였지?”
“세금 떼고 나면 한 오천만 원정도 될 거예요.”
“많이 쌓이긴 했네.”
“2년 동안 마지막 문제를 맞힌 사람이 없으니까 많이 쌓였죠. 이번에는 상금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누구. 김태경 선생님?”
“네, 출연만 한다면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과 끝판왕인 의대 나와서 자격증 세 개나 딴 사람인데 머리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잖아요.”
“에이, 우리 프로에 머리 좋은 사람 원투데이 나와? 이게 운도 따라야 해.”
“하긴 그렇죠. 그나저나 피디님 이제 곧 검사 시간 아니에요?”
“슬슬 들어가야지. 근데 왕 작가 집에 안 가? 나 걱정돼서 그런 거야?”
“대장내시경 약 먹고 취하셨어요? 피디님 검사 끝나고 같이 설득하자고 남은 거잖아요.”
“쏘리.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 거기 내 핸드폰 좀 줘.”
박필승은 검사 시간이 다가오자 병원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검사받으러 가면서 번거롭게 뭐 하러 핸드폰을 들고 가요.”
“국장님 전화 받아야 해. 안 받으면 또 노발대발하잖아.”
“……!”
“왕 작가? 뭐해 핸드폰 달라니까.”
“피, 피디님? 전화 왔는데요?”
“누구? 국장님? 하여간 양반은 못 돼요. 섭외 때문에 한 소리 하려고 전화한 걸 거야.”
“아니요. 국장님이 아니라. 김태경 선생님 전화에요.”
“뭐!?”
왕 작가는 핸드폰 화면을 박필승 눈앞에 들이밀었다.
“빨리 줘 봐. 여보세요?”
박필승은 전화가 끊어질까 봐 황급히 받았다.
“네, 선생님. 네? 아니요. 저 병원 주차장입니다. 그럼요. 네네. 알겠습니다.”
“왜? 뭐라고 해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냐고 하는데?”
“뭐하고 계세요. 빨리 들어가요.”
두 사람은 곧장 태경의 진료실로 뛰어 들어갔다.
철컥-
“어서 오세요. 두 분 이쪽으로 앉으세요.”
박필승과 왕 작가는 반갑게 맞아 주는 태경을 보며 의자에 앉았다.
“피디님 조금 이따 검사 있죠?”
“네, 선생님. 처음 하는 대장 내시경인데 약 먹다가 요단강 건널 뻔했습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애쓰셨네요. 이따 검사 때 잘 봐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갑자기 저희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왕 작가랑 제가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뛰어오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왔거든요.”
“혹시 방송 출연하시기로 결정하신 건가요?”
“네, 출연하겠습니다.”
“네?”
“정말요?”
깔끔하게 출연 의사를 밝힌 태경의 대답을 들은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이세요?”
“왕 작가, 일단 앉아. 응? 앉자고. 농담하시는 거 아니시죠?”
“그럼요. 농담 아닙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저희 목숨을 살리셨어요.”
두 사람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기뻐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건지……?”
철옹성 같은 태경이 갑자기 출연 결심을 한 이유가 궁금했다.
“어느 환자분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환자분을 돕기 위해 출연 결심을 한 건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피디님과 작가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저희는 방송하는 사람인데 저랑 왕 작가가 어떻게 환자를 돕는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몇 달 전 뺑소니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미 이수정과 통화 후 이야기를 끝난 태경은 박필승과 왕 작가에게 뺑소니 관련 이야기와 고계득의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물론 고계득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신화대병원을 거론하진 않았다. 두 사람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다 밝혔다가 혹시라도 이수정, 차대한 가족의 신상이 공개되어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관심은 고계득보다 가족에게 향할 확률이 높았다.
태경은 방송을 통해 고계득의 일을 간접적으로 소개할 생각이고, 그로 인해 고계득이 전 국민에게 쫓기는 술래로 만들 계획이었다.
대한민국 네티즌들은 수사대에 비유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이슈가 되는 사건의 인물을 찾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계득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어차피 방송이 나가면 그 사건의 주인공이 누군지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전 국민을 상대로 술래잡기를 하는 고계득은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죽을 맛일 것이다.
“아픈 사람과 보호자를 상대로 참 씁쓸하네요.”
“어디를 가나 꼭 거지 같은 인간들이 존재한다니까.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랑 왕 작가 그리고 우리 연출팀이 제대로 판을 짜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왕 작가, 우리 오늘부터 야근이야?”
“당연하죠. 이런 야근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 뒤 대장 내시경 검사를 잘 마친 박필승은 왕 작가와 함께 새벽까지 병원에 머물며 방송을 위해 태경과 머리를 맞댔다.
그렇게 세 사람의 공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