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오후: 9시 00분
박필승이 연출하고 있는 방과 후 시험 시간은 보통 세 명에서 네 명의 게스트가 출연해 대화를 나눈 후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나눈다. 그리고 제작진이 준비한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태경이 예능 프로 출연을 결정하자 박필승은 다른 게스트 없이 이번 회를 태경 특집으로 구성해서 빠르게 준비가 진행됐다.
그중 가장 먼저 촬영에 들어간 건 뺑소니에 대한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환자와 보호자가 일반인이기도 했고, 혹시라도 고계득이 눈치를 챌지도 모르기 때문에 태경은 뺑소니에 관한 촬영을 가장 먼저 하길 부탁했다.
“어머! 세상에 정말 잘됐다. 진짜 잘됐어요.”
이수정은 촬영 중인 제작진들에게 간식을 사다 주기 위해 도넛 가게를 찾았다.
“내가 다 기분이 좋네요.”
방송에 나가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도넛 가게 주인은 누구보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좋아했다.
“사실 나도 속으로 늘 방송에 나가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거든요. 이게 다 수정 씨가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일이 생겼나 봐요.”
“아니에요. 그냥 좋은 분들을 만나서 이런 기회가 생긴 것 같아요.”
“근데 방송 출연을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직접 제보했어요?”
“아니요. 우연히 어느 분께서 제 사정을 알고 도와주셨어요.”
방송 프로나 태경의 대해 자세히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이수정은 적당히 둘러댔다.
“우연히요?”
“네.”
“세상에 누군지는 모르지만, 진짜 고마우신 분이네요.”
“네, 정말 감사한 분이세요.”
“여기 도넛 포장 다 됐어요.”
“얼마예요?”
“괜찮아요.”
이수정이 계산을 하려 하자 주인 여자는 손사래를 쳤다.
“오늘 좋은 날인데 나도 수정 씨한테 이런 거라도 도와줄 수 있게 해 줘요.”
“이미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내가 뭘 얼마나 도와줬다고……. 그리고 그동안 수정 씨도 우리 가게 도넛 많이 팔아 줬잖아요. 그럼 이렇게 해요. 오늘은 내가 방송국 사람들한테 도넛 선물하는 거로 하고, 다음에 또 사 가요.”
“네, 그럴게요. 매번 감사합니다. 또 올게요. 많이 파세요.”
“촬영 잘하고 방송 나오면 알려 줘요.”
주인 여자의 진심을 알고 있기에 이수정은 그 마음을 받으며 가게를 나왔다.
“피디님, 이거 도넛인데 같이 나눠 드세요.”
이수정은 가져온 도넛을 박필승에게 건네줬다.
“감사합니다. 촬영 끝나고 같이 잘 먹겠습니다.”
그 후 촬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먼저 차대한이 뺑소니 사고를 당했을 당시 처음 발견했던 신고자가 현장에 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께서 피해자의 최초 신고자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차대한 사건의 담당 형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남자는 흔쾌히 방송 출연을 수락하며 회사에 반차까지 내고 인터뷰에 응했다.
“그 당시 상황을 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식품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홈쇼핑에 나갈 물량으로 맞추느라 계속 야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날도 새벽같이 야근하고 저쪽에 있는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저쪽 도로에서 횡단보도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횡단보도 중간에 웬 사람이 쓰러져 있더라고요.”
남자는 손가락으로 장소를 정확히 가리키며 설명했다.
“여기였는데, 처음에는 그냥 쓰러진 취객인 줄 알았죠. 근데 가까이서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남자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횡단보도 바닥에 쓰러진 차대한을 발견하고 재빨리 신고했다고 전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기가 신도시고 좀 외진 곳이라 아직 단속 카메라 같은 것도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새벽에 신호 안 지키는 차들이 꽤 있어서, 가까이 가서 쓰러진 분을 보자마자 뺑소니를 당했구나 싶었죠.”
“그럼 선생님께서 신고 당시에 주변에 차량이나 사람을 보진 못하셨나요?”
“네. 경찰이랑 119에 신고하고 사람들 올 때까지 여기서 주변을 계속 둘러봤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최초 신고자의 인터뷰가 끝나고 곧이어 사건의 담당 형사가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수정은 형사에게 다가가 인사를 전했다.
“형사님, 바쁘실 텐데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당연히 나와 봐야죠.”
형사는 사고가 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뺑소니 범인이 잡힐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처음 전단지까지 사비로 만들어 준 사람이 형사였기에 이수정은 늘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저번 주부터 사고 현장 주변을 다시 수색 중이거든요. 뭔가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바로 알려 드릴게요.”
“네, 부탁드릴게요.”
“제가 형사 생활을 하다 보니까 시간은 걸릴지 몰라도 이런 나쁜 놈들은 반드시 잡히더라고요. 그러니 현준이 어머님, 희망 잃지 마시고 항상 씩씩하게 지내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그럼 형사님 인터뷰 진행할게요. 자연스럽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네.”
제작진은 사건의 진행 상황과 현재까지 알아낸 특이 사항 등 방송에 공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질문했고, 형사는 자세히 설명했다.
“지금까지 사고 전반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는데요. 형사님께서 제작진에게 사고 현장에 있던 차량에 관해 흥미로운 점을 말씀해 주셨는데,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그날 사고 당시 도로에 있던 차량은 한 대가 아닙니다.”
“한 대가 아니라는 건 뺑소니를 저지른 범인의 차량 말고 다른 차량이 있다는 뜻인가요?”
“맞습니다. 제가 현장을 조사하던 당시, 피해자가 누워 있던 근처에서 발견된 범인 차량의 스키드 마크 말고 또 다른 스키드 마크가 발견됐습니다.”
타이어의 지문이라고도 불리는 스키드 마크는 차가 급브레이크를 하였을 때 바닥 표면에 생기는 타이어의 미끄러진 자국을 말한다.
“저쪽 도로에서 발견됐는데요. 그 차량은 코너에서 우회전하면서 이쪽 사고가 난 도로로 진입하자마자 급하게 멈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저쪽 도로에서 멈춘 차량이 그날 사고를 목격한 목격자의 차량일 수도 있겠네요.”
“상당히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범일 수도 있나요?”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도롯가에 주차된 차들이 꽤 많았고, 사고가 난 위치에서는 저쪽 도로에 멈춘 차량의 위치가 주차된 차들로 가려졌기에 공범보다는 목격자 쪽에 무게를 싣고 있습니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형사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극적으로 범인이 잡힌다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그건 이수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기대하는 건 이번 사건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있었다.
아무래도 방송을 통해 나가게 된다면 그날 뺑소니를 일으킨 범인에 대한 작은 단서나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사고당한 피해자 가족분의 인터뷰가 있겠습니다.”
이수정의 인터뷰는 얼굴이 방송에 나가지 않고 사고 현장에 내레이션으로 깔리는 육성 인터뷰로 진행됐다.
“저희 남편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가족을 위해 택배 일을 하면서 성실하게 일하는 가장이었어요. 그런데 사고 때문에 지금까지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그로 인해 한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하나뿐이에요. 뺑소니 범인이 꼭 잡혀서 죗값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목격하신 분이 있다면 제발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고 현장 촬영이 모두 끝나고 제작진은 편집과 우리병원 촬영 준비를 위해 방송국으로 향했다.
이수정과 형사 그리고 제작진까지 모두 현장을 떠난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는 얼마 전 도넛 가게에 있던 남자였다.
그는 오늘도 도넛 가게에 왔다가 이수정을 보고 따라 나와 촬영 현장을 보게 된 것이다.
“하!”
근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손에 든 뺑소니 목격자를 찾는 전단지를 보던 남자는, 깊은 한숨을 뱉으며 차를 타고 현장을 떠났다.
* * *
일주일 뒤-
박필승과 제작진은 환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우리병원에서 촬영을 진행했고, 밤샘 편집과 후 작업을 마치고 드디어 방송일이 다가왔다.
“여보? 우리 좋은 소식 있어.”
오늘도 어김없이 면회를 온 이수정은 작은 소리로 남편에게 방송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좋은 분을 만나서 당신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을 거 같아. 그래서 나 오늘 기분…….”
이수정이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이야기를 하던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보호자분.”
세상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장착한 고계득이 이수정의 어깨를 살짝 치며 다가왔다.
이수정을 보기 위해 외상 중환자실을 내려온 그는 일부러 다른 보호자들에게 인사를 한 뒤 자연스럽게 접근했다.
“오랜만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그동안 태경이 알려 준 방법대로 촬영 진행에 관한 내용을 전달했던 이수정은 고계득을 완벽히 속이는 데 성공했다.
“잘 지내셨나요?”
고계득은 오늘따라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아주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태경을 저격한 너튜브 동영상이 오늘 올라온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잘 지냈습니다.”
“보호자분 오늘 영상이 올라오는 게 맞죠?”
고계득이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도록 속삭이듯 물어보자 이수정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동안 수고…….”
“여기서 뭐하십니까?”
고계득이 동영상에 대해 수고했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 회진하러 온 차대한의 담당의인 고시경이 다가와 시니컬하게 물었다.
“고 선생님 아니십니까?”
“원장님이 외상 중환자실까지 오시는 줄 몰랐습니다.”
“하하! 이거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환자들이 있는 곳인데 당연히 자주 와 봐야지요.”
“글쎄요. 저는 여기서 원장님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요.”
“난 이만 일이 있어서 가 볼게요. 그럼 나중에 또 보죠.”
자신의 라인이 아닌 반대파에 속한 까탈스러운 구시경과 대화하고 싶지 않던 고계득은 서둘러 외상 중환자실을 나섰다.
“하여간 저 인간 툭툭거리는 말투 하며 볼 때마다 재수가 없다니까.”
외상 중환자실을 나온 고계득은 고시경을 씹으며 원장실로 향했다.
‘오늘 저녁에 동영상이 올라오면 사람들은 문제의 의사가 누군지 찾겠지? 사실이든 아니든 결국 김태경은 서서히 바닥으로 떨어질 거야.’
“원장님?”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는 사실에 내적 환호를 부르고 있던 고계득에게 비서가 다가왔다.
“오늘은 계속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좋은 일 있지. 하하!”
“아! 원장님 앞으로 선물이 들어왔습니다.”
“선물?”
“네. 아까 퀵으로 왔는데 퀵 기사한테 물어보니 보낸 사람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일단 사무실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래요. 일 봐요.”
한껏 콧노래를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온 고계득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난 화분과 함께 빨간 카드를 발견했다.
평소 난을 상당히 좋아하는 그는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지인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늦었지만, 재임을 축하합니다. 재임한 지가 언제인데……. 뭐, 그래도 축하를 해 준다니 받아야지.”
화분에 쓰인 글귀를 본 고계득은 함께 온 카드를 열어봤다. 그리고 카드에는 짧게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오후: 9시 00분
고계득은 이때까지만 해도 이 숫자가 너튜브 동영상이 올라오는 시간과 이수정이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9시에 올라오는 건가? 위스키 한잔하며 편하게 시청하면 되겠군.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