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방송 시작
방송을 몇 시간 앞둔 시각, 평소처럼 진료와 수술을 하며 태연한 태경과 달리 우리병원 식구들은 다들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방송 시작하겠네? 최 쌤, 안 떨려?”
“내가 왜 떨려.”
응급실에서 환자들을 보고 있는 이찬희는 틈틈이 최모나에게 방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난 너무 떨린데 이거 가슴이 막 두근두근한다니까.”
“누가 보면 이 쌤이 출연한 줄 알겠다.”
“출연한 거는 맞지. 인터뷰했잖아. 선생님도 긴장하고 계시겠지?”
“선생님이 너냐, 긴장하시게?”
“난 처음에 방과 후 시험 시간 피디님이 섭외 온 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선생님이 대단하긴 해.”
“우리야 맨날 병원에서 봐서 감흥이 덜해서 그렇지, 선생님 대단한 분인 건 맞지.”
“근데 최 쌤? 나 인터뷰할 때 메이크업 받으니까 좀 잘생긴 거 같지 않아?”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결과나 확인해. 7번 환자 결과 나왔어.”
최모나가 이찬희에게 핀잔을 주고 있는 사이, 수술을 끝낸 태경은 의진과 수술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선배?”
의진은 태경의 팔을 툭 치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표정은?”
“이제 조금 있으면 방송인데 기분이 어떠세요?”
“나? 글쎄. 방송 전이라 그런 건지 아무렇지 않은데? 그냥 차대한 환자 소식이랑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편집되지 않고 잘 나갔으면 좋겠어.”
“촬영하면서 느낀 건데 박 피디님 사람이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아마 일부러 편집하거나 그러진 않을 거 같아요. 악마의 편집도 절대 안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러게. 알아서 잘해 주시겠지.”
태경이 방송에 나간 건 이수정을 도와주려는 의도와 고계득을 원장 자리에서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방송이 나간 후 저 두 가지가 잘 되길 바랄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고계득이 의료계에서 퇴출당했으면 좋겠지만, 사실상 그건 힘들 것이다.
그건 태경도 알고 동료도 전부 아는 사실이었다.
비단 이번 문제가 이수정과 차대한에게서만 있던 일도 아닐 것이다.
똑같지는 않지만, 지금까지도 억울하고 힘든 일을 겪은 환자나 보호자들이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늘 힘들었던 건 언제나 힘이 없는 환자들이었다.
어찌 됐건 이번 방송을 통해 환자를 생각하고 돕는 의사들이 많아졌으면 했다.
“맞다! 선배?”
“응?”
한참 걸어가던 의진이 별안간 길을 막고 심각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문제는 마지막 단계까지 다 통과한 거예요?”
“왜, 궁금해?”
“당연히 궁금하죠. 상금 탔어요? 못 탔어요?”
“그건…….”
태경이 작은 소리와 함께 손짓하자 의진이 손으로 귀 한쪽을 막으며 다가갔다.
“비밀이야. 방송 통해서 확인해.”
“너무해요.”
태경은 궁금해하는 의진에게 끝까지 함구하며 비밀을 지켰다.
* * *
신화대병원 로비
“원장님도 그렇고 선생님들까지 이렇게 내려와 주시고 정말 죄송해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당연히 제가 도와드려야지요.”
평소 같으면 이미 퇴근했을 고계득이 의사들과 함께 VVIP 병동에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퇴근하려던 찰나 예민하기로 소문난 VVIP 환자가 몸이 안 좋다고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아무튼 몸에 이상이 있어서 온 통증이 아니라 우리 환자분께서 심인성 통증으로 온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 그래도 우리 아들이 좀 예민해요. 퇴근하셔야 하는데 늦게까지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그럼 저는 내일 뵙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원장님. 들어가세요.”
철컥-
“하여간, 저놈은 부모 잘 만나서 툭하면 입원하고 난리라니까. 다들 수고했어요. 이만 퇴근들 하세요.”
“원장님, 늦게까지 수고하셨습니다.”
환자의 보호자가 병실로 들어가고 의사들과 인사를 나눈 고계득은 퇴근하기 위해 원장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수고 많아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 고계득에게 간호사 몇 명이 인사를 건네자 그 역시 짧게 인사했다.
“오늘 방과 후 시험 시간 하는 날인데?”
“이 쌤도 그 프로 보는구나?”
“당연하죠. 요즘 인기잖아요.”
간호사들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맞다! 오늘 그 프로에 누구 나오는 줄 알아?”
“아니요. 무슨 특집이라고 하던데 저번 주 예고에는 누군지 안 나오더라고요.”
“누구 나오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우리가 아는 사람 나오거든.”
“우리가 아는 사람이요? 그게 누군데요?”
“김태경 선생님.”
아는 이름이 들리자 고계득이 귀를 쫑긋하며 반응했다.
“진짜요! 우리 병원에 계셨던 그 김태경 선생님이요?”
마치 쐐기라도 박듯이 다시 한번 정확하게 들려온 태경의 이름에 고계득은 움찔했다.
‘뭐지! 김태경이 방송에 나온다고? 갑자기 방송에……?’
속으로 혼잣말을 하던 고계득은 슬며시 한 발자국을 뒤로 빼며 간호사들 대화에 집중했다.
“대박! 김태경 선생님이 주인공이라니 우와 신기하다.”
“아까 궁금해서 너튜브로 예고 보는데 김 선생님이 딱 나오는 거 있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니까.”
“김 선생님은 진짜 실력 인성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잖아요. 그런 분이 우리 병원 계실 때 고생만 죽어라…….”
“유리 쌤!”
잠시 고계득이 앞에 있다는 걸 잊은 간호사가 아무렇지 않게 팩트를 말하려 하자 연차가 높은 동료 간호사가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줬다.
“아하하! 김 선생님 나오니까 꼭 봐야겠네요. 9시에 시작인데 곧 하겠어요. 궁금해라.”
“나도 오늘 이브닝 근무 끝나자마자 집에 가면서 다시 보기로 봐야겠다.”
한껏 신이 난 간호사들과 달리 엘리베이터 문을 보고 뒤돌아 서 있는 고계득의 뒷모습은 어쩐지 심하게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방송이라니! 김태경이 왜?”
잠시 후, 원장실에 들어온 고계득은 퇴근하는 것도 잊은 채 급하게 리모컨을 찾으며 TV를 켰다.
“방과 후 뭐라고 했는데, 뭐였더라……. 이런! 젠장.”
채널 번호를 모르는 고계득이 한참 동안 리모컨과 씨름하던 그때 연달아 돌아가던 화면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바로 태경의 얼굴이 화면에 크게 나온 것이다.
딩동-
당황한 시선이 태경에게 향하던 찰나 별안간 핸드폰 메시지 알람 소리가 울렸다. 고계득이 메시지를 확인하자 발신 번호 제한으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護疾忌醫)
“호질기의!”
뜬금없이 적힌 한자를 보며 고계득은 스팸이라 생각하며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 모든 신경이 방송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계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자리에 앉는 것도 잊은 채 서 있는 상태로 화면 속 태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 *
“새로운 생명이 태어남과 동시에 한쪽에서는 한 생명이 꺼져 가는 곳.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꺼져 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밤낮없이 불이 켜진 곳.
여러 사람의 눈물 섞인 사연이 존재하는 곳. 바로 병원인데요. 오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주인공 김태경 의사 선생님을 모셔 보겠습니다.”
진행자의 소개가 끝나자 가운을 입은 태경이 멋쩍은 표정으로 웃으며 등장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선생님.”
“오늘 제가 선생님이 오신다고 해서 가운을 입어 봤는데 어떻게 잘 어울리나요?”
“네, 저보다 더 잘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시청자 여러분께 정식으로 인사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평범한 의사로 일하고 있는 김태경이라고 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선생님. 방금 평범하다고 소개를 하셨는데 이거 겸손이 지나치신 거 같은데요. 제가 김태경 선생님에 대해 짧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진행자는 트리플보드 소식과 의사로서 걸어온 길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리고 인간 김태경과 의사 김태경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다뤘다.
“뭐! 사실 제가 방금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저희 제작진의 말에 따르면 함께 일하는 의료진이 다들 입을 모아 천재라고 했다고 하는데요.”
“아니고. 전혀 아닙니다.”
태경은 상당히 민망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돈을 줘도 두 번은 따지 않는다는 전문의 자격증이 무려 세 개나 있는 거 보면 천재가 맞는 거 같습니다. 선생님도 이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아니요. 저는 운이 좋았던 거지 한 번도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부가 가장 쉬웠다.’라는 말 알고 계시죠?”
“그럼요. 유명한 말이잖아요. 물론 저는 이해하기 힘들지만요.”
“제가 딱 그 경우인데요. 사실 공부만큼 돈이 들지 않고 노력 대비 확실하게 보상을 받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다 보니 열심히 노력했고, 감사하게도 결과가 좋았던 거 같습니다.”
“그 말씀은 나는 천재가 아닌 노력파라는 말씀인가요?”
“우! 거짓말이다.”
촬영 당시 문제를 푸는 코너를 빼고는 다른 직원들과 의료진이 제작진 쪽에서 자유롭게 구경했고, 마침 잠시 촬영을 구경 중이던 이찬희의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요. 지금 시청자 여러분께서는 안 보이시겠지만, 촬영하는 제작진 옆에 다른 의료진분들이 계시는데요. 우리 후배 의사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기회 드릴게요. 말씀하세요.”
“공부도 재능입니다.”
“아! 공부도 재능이다. 다 노력한다고 김태경 선생님처럼 되진 않는다는 말이 하고 싶으신 건가요?”
진행자의 말에 이찬희가 양쪽 엄지를 추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후배 선생님께서 강력하게 항의를 하듯이 고개를 흔들면서 한 말씀 하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선생님, 얼른 가서 환자 보세요.”
“아! 이게 우리 원장 선생님의 파워인가요. 말 한마디에 후배 선생님이 두 손을 빌며 퇴장하셨습니다.”
예능감이 있는 이찬희가 ‘사랑합니다. 선생님. 봐주세요.’라는 멘트와 함께 퇴장하자 현장은 순간 웃음바다가 됐다.
“제가 질문을 좀 드리겠습니다. 소위 의대 공부가 어렵다 힘들다고 하는데, 공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있다면 어떤 점이 있을까요.”
“보통은 중간고사 기말고사 이런 식으로 있는데, 저희는 시험을 자주 봤어요. 그리고 공부량이 상상을 초월하니까 그게 가장 힘들었건 것 같습니다.
정말 토 나올 정도로 많다 보니까 그 당시에는 공부하다가 눈앞에 글자들이 날아다니는 일도 있었거든요.”
“이게 저같이 일반인 분들은 아마 잘 가늠하시기 어려우실 것 같은데요. 외국에 어느 의대생이 의사가 되기까지 대학에서 공부하는 양을 프린트로 쭉 나열하면 지구 표면을 다 덮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화면에는 의사가 되기 전까지 공부량에 대한 자료 화면이 나왔다.
“물론 정확한 건 아니고 그만큼 공부량이 많아 힘들다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한 것 같습니다.”
진행자에 자연스러운 진행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태경은 긴장이 풀리며 시간이 지날수록 유려한 말솜씨를 뽐냈다.
“자! 이번에는 키워드 토크로 넘어가겠습니다. 저희가 준비한 단어를 보고 자연스럽게 답해 주시면 됩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