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94화 (193/472)

194화. 흥정한 의사

태경이 출연한 방송은 어느덧,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이 방송되고 있었다.

“이제 저희 프로의 이름처럼 시험을 볼 텐데요. 어떻게 지금 좀 떨리시나요?”

“네, 조금 떨리네요.”

조금 전까지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고계득의 대한 간접적인 폭로를 하던 태경의 표정은 어느새 따뜻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죠. 이 시간이 되면 출연자분들이 다들 떨린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진짜로 시험을 보는 건 아니니까 너무 떨지 마세요.”

그 뒤 진행자는 간단하게 진행 방식을 설명했다.

컴퓨터에서 무작위로 선정된 1단계부터 7단계까지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객관식인 것도 있었고 주관식인 것도 있었다.

단계별로 상금 금액이 있고, 스톱을 하면 그 단계의 상금을 획득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상금은 점점 늘어난다.

마지막 문제인 7단계까지 맞추면 지금까지 누적된 상금을 함께 받는 방식이었다.

“자! 앞에 있는 화면에 문제가 나오면 1분 안에 답을 맞히어야 인정됩니다. 참고로 컴퓨터 안에 저장된 수십만 개의 문제 중에 무작위로 나오기 때문에 저와 제작진은 어떤 문제가 나올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진행자가 열띤 설명을 이어 가던 그때 태경은 지금까지 한 번도 손을 대지 않고 있던 물병을 들고 물을 벌컥 마셨다.

“아니, 왜 갑자기 물을 마시고 그러세요? 목마르세요?”

“네, 입안이 바짝 마르네요.”

“개인적인 질문인데 수술할 때보다 떨리시나요?”

“비슷한 거 같습니다.”

“혹시 문제가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저희 프로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전날 너튜브를 통해서 한 번 보긴 했습니다.”

“보셨구나. 혹시 보시면서 저런 문제가 꼭 나왔으면 좋겠다 했던 거 있을까요?”

“연예인분이 나온 편이었는데 곱하기가 나오더라고요.”

“아! 그 구구단 2단 나온 거요?”

“네. 저도 그런 문제가 나오면 좋지 않을까 하네요.”

“저 컴퓨터 안에 세상 모든 상식부터 잡다한 문제가 다 있는데요. 쉬운 난이도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자! 그럼 문제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문제 주시죠!”

화면에는 1단계답게 상당히 쉬운 초등학생 수학 문제가 나왔고 태경은 쉽게 답을 맞히었다.

그 후 5단계까지 무난하게 답을 맞히며 현장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이게 웬일인가요? 지금 김태경 선생님께서 5단계까지 파죽지세로 문제를 척척 맞히고 있습니다. 5단계까지 오신 분이 두 달 만에 처음인데,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기분이 좋습니다.”

“아니, 어쩜 이렇게 정답을 다 알고 계세요?”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던 거 같습니다.”

“다음 단계 도전하시겠습니까?”

“네, 도전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6단계 문제 주세요.”

-프랑스혁명 당시 죄수의 목을 자르는 형벌을 가할 때 사용한 사형 기구로 의사 J.I. 기요탱의 제안으로 사용된 사형 기구이며 단두대라고 말하기도 하는 이 기구의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 선생님 아시겠습니까?”

“하!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모르신다고 하셨는데 다행히 이번 문제는 객관식 문제입니다. 보기 주시죠.”

1번 기요푼 2번 기유캔 3번 기요틴 4번 기여택 5번 기어탱

문제와 보기를 본 태경은 순간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지금까지 진지하게 문제를 풀던 우리 김태경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웃었는데요. 웃음의 의미가 뭐죠? 정답을 알고 계셔서 웃은 건가요?”

“아니요. 몰라서 큰일 났구나 싶어서 웃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모른다고 한순간, 연출자 박 피디가 조용히 손뼉을 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상금 때문에 마음이 초조하겠죠? 정답 결정하셨습니까?”

“네. 3번 기요틴으로 하겠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3번을 택하셨죠?”

“그냥 가장 그럴듯한 걸로 찍었습니다.”

“가장 그럴듯한 걸로 찍었다고 하셨는데 과연 정답이 맞을지……. 정답이 맞았습니다. 정답 3번 기요틴입니다.”

태경이 정답을 맞히자 연출팀은 기뻐함과 동시에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이제 상금 5500만 원을 향한 마지막 7단계 문제를 앞두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아까보다 긴장이 많이 되네요. 손에 땀이 다 나고 있습니다.”

“그럼 더 긴장되기 전에 어서 마지막 문제를 풀어야겠죠?”

화면에는 마지막 7단계 문제를 위한 몇 개의 단어가 나왔다.

의학, 문학, 시사, 상식, 난센스

“저희가 마지막 단계는 키워드를 선택해서 거기에 맞는 문제를 드리고 있는데요. 신중하게 선택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의학을 선택하겠습니다.”

“역시 의학을 선택하셨네요. 그럼 의학에 관련된 어떤 문제인지 바로 알아보죠.”

진행자가 손짓하자 박필승 피디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진행자에게 흰색 봉투를 건넸다.

“마지막 문제는 제가 집적 드리는데요. 카드를 한번 열어 보겠습니다. 오! 의학에 관련된 인물을 맞히는 거네요. 자신 있으세요?”

“문제를 들어 봐야 알 거 같습니다.”

“그럼 더 시간 끌 필요 없이 마지막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태경은 제작진이 건네준 스케치북과 펜을 꼭 쥐며 문제 집중했다.

“이 사람은 1979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으며 한국 전쟁 때 월남해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병자를 치료했습니다. 또한, 195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대량 간 절제 수술에 성공한 대단한 실력자 외과 의사이기도 했죠.

집도 없이 가난한 환자들을 돕는 일에 평생을 헌신한 이 사람은 어느 날 돈이 없다는 입원 환자에게 밤에 몰래 문을 열어 둘 테니 도망을 가라며 돈까지 준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며 오직 환자만을 위해 살다간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문제가 끝나자마자 펜을 쥔 손이 빠르게 스케치북 위를 이동했다.

“정답을 다 적으셨나요?”

“예. 적었습니다.”

“보여 주시죠.”

태경이 공개한 스케치북에는 ‘장기려’라고 적혀 있었다.

“이 문제를 맞히면 엄청난 상금을 획득하시는 거고 틀리면 아쉽지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바꿀 기회를 한 번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지금 우리 김태경 선생님 표정에 상당히 자신감이 가득합니다. 이 자신감이 과연 정답으로 이어질지 여기 있는 모든 제작진이 긴장하는 가운데 정답은……. 정답은 장기려가 맞습니다.”

“우와!”

“축하드립니다.”

진행자의 축하 소리와 함께 태경은 제작진이 준비한 상금 액수가 적힌 판넬과 축하 꽃다발을 받으며 활짝 웃었다.

“세상에 드디어 상금의 주인공이 탄생했습니다. 와!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문제를 듣고 바로 적길래 속으로 아, 정답을 알고 계시는구나 싶었거든요. 알고 계셨나요?”

“네, 실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장기려 박사님입니다.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면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분이시거든요.”

유난히 환자에게 오지랖이 넓은 것도, 돈이 없는 환자를 위해 대신 병원비를 내어 준 것도, 환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것까지.

태경이 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이런 태도는 바로 장기려 박사 덕분이었다.

학창 시절 의사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 집안 형편상 사교육을 해 줄 수 없던 태경의 어머니는 장기력 박사의 책을 선물로 사 줬었다.

장기려 박사가 의사로서 가진 마음가짐과 환자에 대한 보살핌에 감동한 태경은 그 책이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장기려 박사님에 대한 문제가 나온 게 신의 한 수였네요. 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의사로 남고 싶으세요?”

“상투적이고 권위적인 의사가 아니라 환자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의 마음까지 위로할 수 있는 그런 의사로 남고 싶습니다. 사실 의사들이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을 뽑으라면 당연히 환자의 병이 완치되거나 좋아지는 경우거든요.

환자가 안 좋으면 덩달아 마음이 내려앉고,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으로 환자를 살피곤 합니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의사 선생님들 모두 힘내시고, 병상에 계신 환자분들도 하루빨리 쾌차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미 충분히 그런 의사이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계획이 있으신가요?”

“특별한 계획은 아직 없고요, 지금처럼 환자를 위해 노력하고 장기려 박사님 같은 의사가 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마어마한 상금의 주인공이 되셨는데, 어디에 쓰실지 여쭤봐도 될까요?”

“글쎄요. 사실 전혀 예상을 못 했던 거라서 생각을 해 봐야겠습니다.”

“그래요. 오늘 저희 프로그램을 함께하셨는데 마지막으로 소감 한 말씀 해 주시죠.”

“좋은 자리에 불러 주시고 또 이렇게 상금도 탈 수 있어서 굉장히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따뜻한 의사 김태경 선생님과 함께했습니다. 저희는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올게요.”

활짝 웃는 태경과 제작진이 인사하는 장면이 화면에 담기며 방송은 끝났다.

박필승 피디와 왕 작가의 예상대로 방송은 성공적이었다.

* * *

방송이 끝나자마자 온라인과 각종 커뮤니티는 물론 실시간 검색어까지 온통 방송에 관한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1, 김태경.

2, 방과 후 시험 시간

3, 장기려 박사

4, 신도시 뺑소니 사건

5, 의사 김태경

6, 히포크라테스 선서

7, 흥정한 의사

8, 호질기의 의사

9, 뺑소니

10. 환자매수 의사

제작진이 다시 올린 너튜브 영상은 급상승 인기 동영상 목록에 올라갔고, 사람들은 뺑소니 사고에 관심을 가졌다.

-오늘 방송에 나온 뺑소니 사고 현장이 담긴 너튜브 영상입니다. 여기저기 많이 퍼트려 주세요.

-여러분 주변에 혹시 신도시 사는 분이 있다면 다들 블랙박스 확인해 보라고 해 주세요.

-뺑소니 범인 찾는 게 정말 어려운데 이 사건은 꼭 잡혔으면 좋겠네요.

-목격자가 없다는 게 좀 이상하네요. 방송 보고 있다면 제발 자수해 주세요.

특히 이수정처럼 아이를 키우는 주부들이 있는 커뮤니티에서 사건이 묻히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도왔다. 그리고 뺑소니 사건보다 더 뜨거운 관심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환자를 흥정한 의사에 대한 부분이었다.

역시나 태경의 예상했던 대로 고계득을 찾기 위한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전 국민이 이름 없는 술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었다.

-님들, 오늘 방과 후 시험 시간 봄?

-당연히 봤지. 의사 나온다길래 지루할 줄 알았는데 완전 꿀잼이었음.

-그 선생님 포스가 장난 아니더라 x라 멋있음. 근데 그 환자 갖고 장난쳤다는 의사 새끼는 누구임?

-맞아. 김태경 선생님 사람 좋은 거로 유명한데 그런 분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나쁜 놈인 듯.

-이럴 게 아니라 그 나쁜 의사 찾아야 하는 거 아님?

-어차피 시간 좀 지나면 아마 누군지 밝혀질 거 같은데?

-님들 대박! 나 방금 우리 형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김태경 선생님 전에 있던 병원에서 쫓겨난 거라고 함.

-왜 쫓겨남?

-불쌍한 환자 도와주고 병원에 이익이 안 돼서 쫓겨났다고 하던데? 참고로 우리 형 대학병원 간호사임.

-대박! 저런 분도 쫓겨나는구나.

-그 병원 원장이 병신이네. 저런 사람을 왜 쫓아내지?

-원래 대학병원은 은근 파벌이 심해. 진짜 환자만 생각하는 의사들은 버티기 힘듦. 어디든 조직 사회는 약고 영리한 애들이 오래 살아남아.

-아니, 근데 그 의사 찾을 방법 없나? 사회적 위치도 있다니까 작은 병원 의사는 아닐 듯싶은데.

-누굴까? 와! 궁금해 미치겠음.

쾅- 쾅-

원장실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고계득은 책상을 내리치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일을 어쩌지…….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방송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설마 이사장 귀에까지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시간이 갈수록 순식간에 늘어나는 댓글과 자신을 찾는 사람들의 각종 글을 보며 고계득은 잊고 있던 긴장감에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어쩔 수 없이 당분간 몸을 사리기로 했다.

“이수정이고 나발이고 조심하는 게 좋겠어.”

자신의 정체가 탄로가 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고계득은 지금은 자신이 납작 엎드릴 때라는 걸 제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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