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환타
구미가 당기는 제목에 흥분한 두 사람 말고 흥분한 한 사람이 더 있었으니, 바로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있던 고계득이었다.
‘범인 색출이라고?’
화장실 칸에서 레지던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는 깜짝 놀라며 볼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조금 전, 고계득은 큰 볼일을 보기 위해 화장실을 찾았다.
방송이 나간 직후부터 온통 신경이 예민해진 그는 과민성 대장이 또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설마 이수정 그 물건이 원래 김태경이랑 붙어먹고 있던 건가?’
볼일에 집중하며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이 개떡 같은 일의 원흉을 또다시 태경에게 돌리고 있던 그때, 밖에서 떠들던 레지던트들의 이야기가 귓가에 때려 박힌 것이다.
‘이럴 게 아니라 찾아보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은 고계득은 휴대폰으로 직접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xx.’
엉덩이를 든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문 옷걸이에 걸어 둔 가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배터리가 부족해 화면이 꺼지고 말았다.
‘젠장!’
고계득은 온종일 핸드폰으로 자신과 관련된 글을 찾아보느라 배터리가 부족한 것도 몰랐다. 그는 별수 없이 밖에서 떠드는 레지던트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윽!’
대장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계속됐지만, 배가 아픈 것보다 두 사람의 대화가 훨씬 중요했다.
“뭐래? 어? 뭐라고 쓰여 있어? 빨리 좀 읽어 봐.”
“내가 범인 색출해 준다. 그렇다고 대놓고 누군지 이름을 알려 줄 수는 없으니까 대신 힌트를 줄게. 잘 추리면 누군지 알 수 있을 거야. 참고로 이 글 정확히 15분 뒤 빛삭한다. 그러니까 우연히 클릭했다면 끝까지 보는 게 좋을 거다.
난 의료계 쪽에서 일해서 이 바닥을 좀 잘 안다. 방과 후, 그 프로에 나와서 난리 난 그 상놈의 의사 있지? 나 그 의사 누군지 안다.”
“뭐지? 이 글 진짜인가?”
“자꾸 떠들면 안 읽는다?”
동기가 훈수를 두자 글을 읽던 레지던트가 조용히 하라며 핀잔을 줬다.
“쏘리. 계속해.”
“내가 안다고 하니까 괜히 관심받으려고 쓴 글 갔지? 솔직히 말하면 관심을 받았으면 해서 썼다.
왜? 나도 그 의사 놈이 싫으니까. 의사라는 놈이 환자 소중한 줄도 모르고 오로지 있는 놈들, 잘사는 놈들 x구멍에 인사하듯 아부나 떨고 아주 하는 짓거리가 역겨워.
참고로 그 사람이 내 옆을 지나가면 난 구린내 때문에 눈살 찌푸렸다. 이쯤에서 힌트 나간다.
예상한 사람도 있겠지만, 꽤 큰 병원에 높은 사람이다. 뭐, 소위 누구나 말하는 우리나라 열 손가락에 드는 메이저 병원에서 일하고 있어.
범위를 더 좁히고 싶은데 그러면 사람들이 빨리 알게 될까 봐.
내 생각인데 그 의사 놈이 이 글 100% 볼 것 같거든. 그래서 똥줄 타라고 힌트 좀 애매하게 준 거야. 이 글 보고 모르겠으면 내가 또 남길게.
아! 참고로 한 가지 더 준다. 개인적으로 관상 같은 거 안 믿는데 그 의사 얼굴 보면 이런 말 저절로 나온다. 뭐냐고? 얘들아, ‘관상은 과학이다!’ 형 들어간다. 수고해라.”
커뮤니티에 적힌 글을 전부 읽은 두 사람은 신기한 듯 서로를 쳐다봤다.
“이거 진짜일까?”
“내가 보기에는 딱 저격하는 느낌으로 쓴 게 진짜 같은데? 뭔가 상대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쓴 거 같아.”
“나도 뭔가 그런 거 같아. 근데 우리나라 10위까지 메이저 병원이면 태선대랑 주선대, 우리 병원이랑 새희망병원 그리고…….”
“야! 나 콜 온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어! x됐다. 나도 교수님 전화 온다.”
진지하게 병원을 추려 가던 두 사람은 빠르게 울리는 휴대폰 벨 소리에 화장실 밖으로 급히 나갔다.
쾅! 쾅!
두 사람이 화장실을 나가자 고계득은 주먹으로 칸막이를 때리며 분개했다.
‘어떤 미친 새끼가 저딴 글을 쓰고 지랄이야!’
당사자인 고계득이 보기에는 누가 봐도 이 글이 자신을 지칭해서 쓴 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가 쓴 거지? 이현우 아니면 최판석인가? 아니면 박진만? 이고척? 구시경? 설마 이것도 김태경 그 새끼가 한 짓인가?’
병원 내 반대파에 있는 의료진 이름이 다 나올 기세로 떠들던 고계득은 리스트에 태경도 거론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저긴 병원 직원들만 글을 올리는 곳이잖아? 병원 내 사람인가? 하!’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봐도 뭔가 시원한 답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한참 동안 변기에 앉아 있던 그는 급히 화장실을 나와 원장실로 향했다.
철컥-
“원장님? 혹시 익명 게시판 보셨나요?”
“왜?”
“그 병원 직원들 익명 게시판에 방송에 나온 그 의사 이야기가 올라와서 지금 난리입니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저 글을 삭제할까 싶던 고계득은 먼저 이야기를 꺼낸 비서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참! 쓸데없는 일에 다들 시간 낭비하고 있네. 당장 관리자한테 그 글 지우라고 해.”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런 글 두면 괜히 병원 내 소문만 늘어나서 분위기 어수선해져.”
“그게 아니라 벌써 지워졌습니다. 글을 쓴 사람이 바로 지운다고 했는데 진짜 지운 거 같습니다.”
“그래? 아무튼 다음부터 그런 글 또 올라오면 관리자한테 바로바로 삭제하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네. 원장님.”
“아니야. 됐어.”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했다.
고계득은 미국에 머무는 이사장에게 연락이 왔는지 물어보려다 입을 꾹 닫았다.
뜬금없이 이사장 이야기를 꺼내는 게 어색했기 때문이다.
고계득은 미련하게도 여전히 며칠만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이 꺼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이 불씨가 꺼지지 않아서 이사장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면 그땐 피곤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게다가 곧 있으면 이사장이 한국에 들어온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확실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기부금! 그래, 반드시 기부금을 따내야 해.’
이사장에게 자신은 여전히 능력 있는 원장이라는 사실을 과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조만간 만나기로 한 정·재계 인사들에게 기부금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우리병원-
태경은 의진과 함께 수술하고 있었고, 이찬희와 최모나가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고 있었다.
“이 쌤, 최 쌤? 그 소식 들으셨어요?”
병동을 다녀온 간호사가 응급실 스테이션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급히 불렀다.
“왜요?”
“환자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아니요. 그건 게 아니라. 그 원장님이 방송에서 말한 그 의사요? 그 의사 누군지 알리는 글이 신화대병원 게시판에 올라왔대요.”
응급실 간호사는 방금 병동 간호사에게 듣고 온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했다.
“아, 그럽니까?”
“그럼 신화대병원 사람인가?”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메이저 병원에 있다고 글쓴이가 그랬대요.”
“그래요? 나쁜 놈 빨리 밝혀져야 하는데.”
평소처럼 차분한 최모나와 달리 상당히 여유롭게 답하는 이찬희였다. 사실 두 사람은 그 글을 누가 썼는지 알고 있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태경과 의진, 임정숙 간호사까지 글쓴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바로 이동훈이었다.
신화대병원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동훈은 아직 게시판에 글을 쓸 수 있었고, 이때다 싶어 글을 올렸다. 거기에 요즘 젊은 사람들이 쓰는 인터넷 용어까지 찾아서 섞어 쓰는 나름 치밀한 면모를 보여 줬다.
‘내가 사람들한테 힌트 줬다.’
오늘도 어김없이 병원에 나왔던 이동훈은 글을 올린 뒤 이 사실을 태경과 몇몇 의료진에게 알려 줬다.
“진짜 누구일까요? 이 쌤은 누구 같아요?”
“그거야 고…….”
순간 ‘고계득이요’라고 저도 모르게 말할 뻔한 이찬희는 최모나의 눈짓의 얼른 말을 삼켰다.
“고고는 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메이저 병원 높은 사람을 알아야 누군지 알죠.”
“혹시 원장님한테 슬쩍 물어보면 알려 주실까요?”
간호사뿐만 아니라 우리병원 직원들 전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대놓고 태경에게 물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그런 걸 말해 줄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최 쌤 말이 맞지.”
“그러니까요. 근데 나 같으면 누군지 바로 실명 거론할 거 같은데 원장님도 참 대단하세요.”
“이하동문입니다. 전 잠시 병동 회진 좀 돌고 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이 쌤, 환자 몰리면 전화 줘.”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최모나가 응급실을 나가고 응급실 내원 환자를 보고 온 간호사가 스테이션으로 들어왔다.
“14번 환자 드레싱 끝났습니다.”
“수고했어요.”
“오늘은 그래도 응급실 환자가 적은 거 같아요.”
방송의 영향 때문인지 평소보다 외래 환자가 엄청 많았지만, 응급실 환자는 좀 괜찮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환자가 적다는 뜻은 아니었다.
원래 금요일 저녁은 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의 환자들로 인해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근래 들어 응급실이 이 정도로 고요한 게 처음이었다.
“어머! 자기, 그런 말 함부로 하면 못써.”
이제 막 응급실 근무를 시작한 신규 간호사의 말에 9년 차 선임 간호사가 웃으며 면박을 줬다.
“여기서 그런 말 금기야. 금기!”
“네!? 금기요? 왜 그런데요?”
아직 모든 게 호기심 넘치는 막내 간호사는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아니, 그냥 일종의 미신 같은 건데. 그런 말 하면 환자가 구름떼처럼 몰려온다는 속설이 있어서 그래.”
“아이참. 무슨 또 구름 떼처럼 몰려와요.”
이찬희가 핸드폰으로 의료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고계득 관련 글을 보다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원래 금요일 이 시간이면 술에 만취한 환자가 오거나 교통사고 환자, 배 아프다는 환자, 치고받고 싸운 환자, 부부 싸움 환자 등 그래도 여러 환자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은 막내 간호사의 말대로 정말 한가하긴 했다.
응급실에 쭉 나열된 많은 병상 중에 환자가 누워 있는 것은 고작 7개뿐이었다.
그 환자들도 이제 귀가하거나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수월한 환자들이었다.
환자가 한 명도 없는 화이트 베드까지는 아니어도 확실히 오늘은 응급실이 이상하리만치 한가했다.
“근데 진짜 오늘은 막내 쌤 말처럼 한가하네요.”
“그렇죠? 저 일 시작하고 이렇게 한가한 거 처음 봐요. 아까 외래는 사람들 바글바글했는데.”
“또! 또, 그런다. 아무리 한가해도 그 말은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그 말 하다가 환자가 몰려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9년 차 선임 간호사가 신규 간호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막내 앞으로 말조심해. 알았지?”
“네.”
“응급실 이렇게 한가한 거 되게 오랜만이네요.”
“찬희 쌤도 그 말 금지예요. 그런데 쌤은 한가한 거 싫으세요?”
“그럴 리가요.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한가한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저도 인간인데 당연히 좋죠.”
“근데 표정이 왜 그러세요? 뭔가 불안한 표정이신데요?”
“어! 정말 이 선생님 표정이 안 좋으세요.”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막내 간호사도 이찬희의 얼굴을 보더니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가?”
“이 쌤, 무슨 일 있어요?”
“저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전 사실 그 한가하다고 하면 환자 온다는 그 속설도 안 믿거든요.”
“에! 아니에요. 그거 정말 그래요.”
“그럴 수 있죠. 근데 저는 그것보다 다른 걸 믿어요.”
이찬희가 두 사람을 확신의 찬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볼 때 과학적이에요.”
“그게 뭔데요?”
“환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