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04화 (203/472)

204화. 의협에 건의해 볼까요?

“어이, 김 원장!”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찰나 식당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뜻밖에 인물이 태경을 불렀다.

“여기야, 여기!”

“이 시간에 회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온 사람은 누가 그룹 김건형 회장이었다. 게다가 황당하게도 그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황당하다 안 카나.”

식당을 책임지는 오계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도 황당해 기가 막힌데 우리 김 원장은 얼마나 황당하겠나?”

“여사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왜 회장님이 우리 병원에서 식사를…….”

“내 말이 그 말 아니겠나? 쫌 아까 식당으로 들어오더니 배고프다고 밥 좀 달라고 하는기라. 그래서 한 상 차려 줬더니 저래 앉아가 아주 밥을 두 그릇을 먹었다.”

“여사님, 그러지 말고 우리 병원으로 오지 않겠습니까? 제가 급여는 원하는 대로 몇 배는 더 드리겠습니다.”

“뜨신 밥 먹고 헛소리해 뿌네! 머라 캐쌌노? 돈이면 다인 줄 아나?”

“하하하!”

필터링 없는 오계순의 시원한 말투에 김건형은 기분 좋게 웃어넘겼다.

“재벌 양반.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람 앞에서 돈 자랑하는 것만큼 추한 것도 어는 기라. 와 저러노 진짜!”

오계순은 혀를 차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주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신 거 같아. 오랜만이야. 김 원장, 잘 지냈어?”

김건형 맞은편에서 밥을 먹던 경호팀장인 고 팀장이 반가워하며 말했다.

“그럼요. 팀장님도 잘 지내셨죠?”

“말도 마. 까다로운 우리 회장님 모시고 사느라 힘든 점이 한두 개가 아니야.”

“고 팀장. 다 들린다.”

“귀도 밝으십니다. 회장님과 대화 나눠. 난 여기 계속 있다가 한 소리 들을 거 같아.”

고 팀장은 농담과 함께 다 먹은 식판을 치우며 잠시 자리를 비켜 줬다.

“하여간 어떻게 된 게 사람이 볼 때마다 기다리게 해. 자네 보려고 꽤 30분 넘게 기다렸다고.”

태경이 자리에 앉자 김건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진짜 어쩐 일이세요?”

“무슨 소리야? 기껏 찾아온 사람 섭섭하게. 자네 보러 왔지 내가 여긴 왜 왔겠나?”

“직원 식당에서 식사를 다 하시고. 아침 안 드셨어요?”

“병원장이 건강 때문에 몸무게를 3kg 빼라고 해서 내가 요즘 6시 넘어 굶고 있어.”

“고생이 많으시네요.”

“보통 고생이 아니야. 게다가 오늘 조찬 모임을 나갔는데 갑자기 취소됐지 뭐야. 자네를 보러 왔다가 배고프다고 하니까 최 팀장이 식당에서 한 끼 하라고 해서 얻어먹었어. 아까 그분이 주방장이신가?”

“네, 요리를 아주 잘하세요.”

“그러게.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자네 표정을 보니 왜 왔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군.”

“눈치가 빠르시네요.”

“내가 눈치로 돈을 벌었잖아.”

“농담 그만하시고 얼른 말씀하세요.”

“김 원장, 자네 텔레비전 나왔지?”

“보셨어요?”

“그럼 봤지. 그것 때문에 왔는데?”

“방송 때문에 오셨다고요?”

“그래.”

태경은 방송 때문에 왔다는 김건형의 말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 방송에서 말한 그 의사 놈 말이야? 그놈 고가 놈이지?”

“……!”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99%는 짐작하고 있었는데 자네 반응을 보니까 100%가 확실하군.”

“고계득인줄 어떻게 아셨어요?”

“전에 학회에서 일을 생각하면 뻔한 거 아니겠나.”

김건형은 태경의 전 직장이 신회대병원인 것과 얼마 전 학회에 참석한 태경이 고계득과 설전을 벌인 일을 생각했다.

여러 가지를 조합해 보니 방송에 나온 그 의사가 고계득일 거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런데 고가 놈을 왜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말한 거야?”

신중하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태경이 방송에까지 나와서 굳이 일을 키운 게 궁금했다.

“그 인간 다시는 환자와 보호자를 갖고 장난치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방송에서 폭로했습니다.”

“이슈를 일으켜서 쫓겨나게 하려고?”

“네.”

“설마 이사장 귀에 들어가게 하려고 한 건가?”

“잘 아시네요.”

“내가 고 원장을 본 지 꽤 됐는데 그놈처럼 기회주의자인 사람도 없어. 아마 지금쯤 어떻게든지 살 궁리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일 거야.”

“그러겠죠. 근데 아마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겁니다.”

“뭐, 여론 돌아가는 걸 보니 그렇긴 하겠어. 근데, 자네 고돈진이 정말 고계득을 내칠 거라고 생각하나?”

김건형이 말한 고돈진은 신화대병원 이사장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지만 병원 운영도 철저히 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건 맞아. 재벌 중에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지만, 그쪽 집안사람들은 돈에 아주 환장한 집안이거든.”

“그렇다면 고계득을 계속 데리고 있기는 무리가 아닐까요?”

“……?”

“결국 병원 이익에도 문제가 생길 테니 더 내보내지 않을까 합니다.”

“뭐, 그렇긴 하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고계득 조심해.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저도 쉽게 당하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그래도 고돈진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때 내가 직접 나서서 도와주겠네.”

“회장님께서요?”

“그래. 내가 움직이면 그 친구도 쉽게 거절하진 못할 거야.”

“말씀은 감사한데 회장님께서 저한테 왜…….”

“왜긴! 난 한 번 내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평생 챙기는 사람이야.”

김건형은 태경을 엄청 아끼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제가 회장님 사람인가요?”

“내 목숨을 구한 사람인데 당연하지. 왜? 싫은가?”

“아니요. 든든합니다.”

태경은 오랜만에 만난 김건형과 고계득 일과 병원 일에 대한 대화를 마치고 진료를 시작했다.

* * *

신화대학병원 회의실-

“그럼 오늘 정기 회의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장님……? 저기 원장님?”

“아! 저 부르셨나요?”

회의 시간 내내 정신이 딴 곳에 팔렸던 고계득은 옆에서 외과 과장이 부르는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과장급 회의로 예산안을 비롯해 여러 가지 사항들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는데 회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원장님. 회의 끝났습니다. 아까 출근할 때도 그렇고 얼굴이 좀 안 좋으신데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일은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일이 많아 며칠 잠을 못 잤더니 좀 피곤했나 봅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고계득은 일이 많아 잠을 설친 게 아니라 자신의 원장 자리가 날아갈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신화대병원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글 때문에 까닥하다간 정체가 탄로 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안에 올라왔던 글이 다른 의료인 커뮤니티로 퍼지더니 순식간에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곳까지 퍼져 나갔다.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생산되는 것과 같았다.

메이저 병원 탑10을 좁혀 나가던 네티즌들은 그 뒤 탑5로 좁히더니 급기야 탑3 병원으로 그 범위를 바짝 좁혀 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고계득이 우려하고 오지 않길 바라던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근데 그 의사 말이야. 이거 신화대병원 아님?

-왜? 신화대병원이래? 맞아?

-그게 아니라. 김태경 선생님 전에 일하던 병원이 신화대병원이었어.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 고모부 수술해 주신 분이야. 진짜 사람 너무 좋으심.

-맞아. 저분 신화대병원 너튜브에도 자주 나왔었음.

-가장 결정적인 건 저분 환자만 생각하다 거기서 쫓겨나심.

-그럼. 빼박 아니야? 이거 뭐, 거의 신화대일 확률이 가장 높네.

제작진이 너튜브에 올린 태경이 나온 방송 영상 밑에 대놓고 신화대병원을 추측하는 댓글이 달리더니 너도나도 맞장구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병원 일이고 자시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회의 내내 고계득 머릿속에 댓글이 자동 재생되는 것만 같았다.

“원장님,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야죠. 이만 일어납시다.”

드르륵-

“잠시만요! 제가 중요한 걸 하나 깜빡했네요. 다들 소식들은 들으셨죠?”

고계득을 비롯한 과장들이 한둘씩 자리에서 일어나던 찰나, 부원장이 한마디 던졌다.

반대파인 부원장이 입을 열자 고계득은 가던 걸음을 멈췄다.

“요즘 장안의 화제인 그 의사 말입니다.”

“김태경 선생님이 말한 그 사람이요?”

부원장의 말에 나가려던 신경과 구시경 과장이 되물었다.

“예, 구 과장님. 이게 좀 문제가 될 것 같아서요.”

“저도 부원장님이랑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 여기저기서 우리 병원 사람이라고 아주 난리 났습니다.”

가만히 있던 과장들이 한마디씩 꺼내기 시작했다.

“아니, 내놓고 우리 병원으로 몰고 가고 있는데 병원 이미지도 있고 이거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박 과장님 말에 동의합니다. 홍보팀에서 반박 기사라도 내보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맞습니다. 오전에 회진 도는데 일반 병실에 있는 환자들도 그렇고 VVIP 병동 환자들까지 물어보고 야단들입니다.”

“환자들뿐만 아니라 전공의 선생들 인턴 선생들까지 톡 방에서 범인 찾기 하고 있다니까요.”

“그리고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혹시 여기 계신 분 중에 개념 없는 의사가 있는 건 아니겠죠?”

“큰일 날 소리 하십니다. 요즘 세상에 어떤 세상인데 환자랑 보호자 상대로 그딴 미친 짓을 한답니까? 안 그렇습니까. 원장님?”

순간 남의 속도 모르는 외과 과장이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고계득에게 폭탄을 날렸다.

순간, 그 질문과 함께 회의실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몰렸다.

어찌 보면 고계득에게 시선이 몰리는 건 당연했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 내용 중에 이런 글이 있었다.

-예상한 사람도 있겠지만, 꽤 큰 병원의 높은 사람이다.

여기 모인 의료진 중에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 고계득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물론 같은 라인인 과장들은 질문의 맥락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반대쪽 사람들은 의심하는 마음으로 그를 쳐다봤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고계득은 당황한 내면을 속으로 간신히 삼켰다.

“나 역시 그 방송을 보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하는 말입니까?”

그리고 마치 남의 일처럼 더 분개하고 날뛰는 뻔뻔함을 보였다.

말 그대로 적반하장이었다.

“저한테도 역시나 우리 병원이 맞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김태경 선생의 전 직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의사가 우리 병원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저 답답할 뿐입니다. 도대체 그딴 글을 누가 싸질러서 일을 키운 건지…….”

더러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뱀처럼 고계득의 혀는 역시나 구린내를 풍기며 바쁘게 움직였다.

“원장님 말씀이 백번 맞습니다.”

곁에 있던 같은 라인 기조실장이 한마디를 툭 던지더니 남의 속사정도 모른 채 일을 키우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요즘 의사 권위가 예전만 못하다고는 해도 그래도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지 않습니까? 그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번 일은 같은 의사로서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의협에 건의해 볼까요?”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고계득은 가운 뒤, 셔츠 안으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하하하! 우리 기조실장님이 화가 많이 나신 모양입니다. 자자! 다들 진정하세요.”

누굴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은 고계은 빠르게 이 일을 수습하며 마무리 짓기로 했다.

“제가 홍보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고 전달할 테니 다들 일하러 가시죠. 환자분들 기다리겠습니다.”

회의실을 나가는 고계득은 좌불안석 그 자체였다.

여론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쉽게 꺼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김태경이 입을 열어 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윤 회장님? 접니다. 오늘 저녁 약속 잊지 않으셨죠?

고계득은 오늘 밤 기부금 사업을 위해 그룹 회장과 선약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공한다.’

이때만 해도 고계득은 윤 회장과의 만남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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