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10화 (209/472)

210화. 4선 감덕찬

“제가 김태경인데 누구시죠?”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씩씩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감지연을 담당했던 전공의였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던 전공의는 결국 병원 의료진에게 수소문해 태경의 휴대폰 번호를 알게 됐다.

-전 신화대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전공의 김영훈이라고 합니다.

“미안해요. 내가 누군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근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먼저 불쑥 연락드린 점 죄송합니다. 사실 환자 전원 문제로 연락드렸는데요. 혹시 오늘 사고 난 백화점 소식 들으셨나요?

“뉴스 봤어요.”

-선생님, 사실 그 환자가 저희 병원에 왔는데요. 그게…….

전공의는 지금 일어난 모든 상황을 전달하며 태경에게 부탁했다.

-지금 환자를 어쩔 수 없이 전원 보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 환자와 보호자께 너무 죄송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선생님께서 맡아 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았어요. 새로 왔다던 그 교수님에 대해서는 나도 많이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어요. 이렇게 하죠. 그 환자 우리병원으로 전원시켜요.”

-네? 그게 정말이십니까?

고민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대답에 전공의는 되물었다.

사실 전공의는 전화하기 전 잠시 망설였다.

개인적인 친분도 없을뿐더러 작은 병원이라 하더라도 바쁜 건 똑같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래저래 복잡하고 사정도 있는 환자인데 고민한 게 무색할 만큼 허락해 준 점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보호자만 동의하면 보내 줘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다음에 찾아뵙고 꼭 인사드리겠습니다.

전공의가 얼마나 감사해하던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의진에게도 인사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그래요. 일단 환자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문자로 보내 줄래요? 그리고 당연히 촬영한 영상과 검사 결과지도 CD로 보내 주고요.”

-네, 선생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배, 무슨 일이에요?”

감사하다는 소리가 연신 들려오는 통화 소리에 의진이 물었다.

“환자 전원 오기로 했어요?”

“응. 아까 그 백화점에서 사고 난 환자 전원 문의하길래 보내라고 했어.”

“백화점이면? 설마 오늘 난리 난 그 JQ 백화점이요? 어느 병원인데요?”

“전에 근무하던 신화대병원 전공의였어.”

“아니, 신화대에서 왜요?”

속사정을 모르는 의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신화대병원에서 전원을 보낸다는 게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근처가 아닌 우리병원으로 말이다.

“그게 나 대신 온 교수가 환자를 개인적인 이유로 자주 보내나 봐.”

“정말요? 희한한 사람이네요.”

“뭐, 나도 이동훈 선배한테 들어서 알고 있기는 했거든. 그래서 전공의 불편할까 봐 그냥 보내라고 했어.”

“혹시 본인들이 할 일을 선배한테 대신 해 달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요즘 신화대 소문도 좀 그렇고 좋게 안 보이는 거 같아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전공의 말을 들어 보면 그건 아닌 거 같아. 그리고 나한테 연락한 이유가 아마 환자를 위해서 아닐까 싶어.”

“환자를 위해서요?”

“아니, 그냥 내 직감이야. 의진아?”

“네, 선배.”

“미안한데 나 먼저 일어날게. 가서 환자도 보고 준비 좀 하려고.”

“저도 다 먹었어요. 같이 가요.”

“왜, 더 먹고 천천히 와.”

“진짜 다 먹었어요. 그 환자 오면 바로 수술할 텐데 저도 준비해야죠. 얼른 가요.”

“그래. 그럼 빨리 가자.”

모처럼 느긋하게 저녁을 먹던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 * *

서울의 한 사무실-

“이거 자료가 맞는 건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감덕찬이 자료를 들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는 더러운 정치판에서 잡음 없이 청렴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는 4선의 국회의원이었다.

선거가 있을 때만 온갖 사탕발림으로 공약을 남발하는 사람이 아닌, 진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의원으로 평판도 좋았다.

오늘도 일반 직장인들은 다 퇴근하고도 남을 시간에 사무실 불을 밝히며 일을 하는 중이었다.

“네, 의원님 제가 실제 철거 예정 지역 주민들을 전부 만나서 듣고 기재한 겁니다.”

“어허! 이 정도 수치면 이거 무리하게 진행하면 안 될 거 같은데? 시공사들이 제출한 거랑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그래서 제가 오늘 오전에 시공사 측에 다시 정정 요청했습니다.”

“잘했네.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면 결국 피해는 힘없는 주민들의 몫이잖아.”

“네, 의원님. 사실 시공사 대표가 잘 좀 부탁드린다면서 의원님과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길래 거절했습니다.”

“뭐야? 그런 정신 빠진 놈들이 있어?”

뇌물을 주려는 목적임을 바로 눈치챈 감덕찬은 목소리를 높였다.

“하여간 더러운 것들은 어디를 가나 꼭 있어. 앞으로 그딴 소리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아주 제대로 본때를 보여 줘.”

“네, 의원님.”

“맞다! 잠시만. 자네, 그리고 딸아이를 키운다고 했지?”

감덕찬을 나가려는 보좌관을 불러 세워 물어봤다.

“네.”

“올해 몇 살이라고 했지? 유치원생인가?”

“네. 제가 늦게 결혼해서 아직 어립니다.”

“다음 달에 우리 손녀딸 생일인데 선물을 보내고 싶어서. 어떤 게 좋겠나?”

“아, 그 따님분…….”

철컥-

“의원님!!!”

일반 보좌관이 감덕찬의 말에 답하려던 찰나, 수석 보좌관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의원님, 큰일 났습니다.”

“아니, 이 수석. 큰일이라니 혹시 현장 사고 또 터진 거야?”

얼마 전 지역구 공사 현장에서 작은 사고가 있었기에 감덕찬은 관련 일인가 싶었다.

“아니요. 의원님 그게 아니라 자기 그러니까. 방금 유 비서에게 연락이 왔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말을 못 해. 빨리 말해 봐.”

“따님께서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사고라니? 설마 우리 지, 지연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감덕찬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지고 있던 그때 보좌관의 입에서 더 충격적인 말이 쏟아졌다.

“아까 뉴스로 보셨던 JQ 백화점에서 난 사고의 피해자가 따님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의원님?”

“의원님!! 괜찮으세요?”

순간 휘청하는 감덕찬을 두 보좌관이 잡았다.

지역구 주민들에게는 믿을 수 있는 국회의원이었지만, 가족에게는 얼굴 편히 볼 수 없던 무심한 남편과 아빠였다.

국회의원의 아내로 평생 뒷바라지를 하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여보, 우리 지연이 외롭지 않게 많이 사랑해 줘요.

세상을 떠난 아내의 유언은 바쁜 남편 걱정과 함께 혼자 남겨진 외동딸의 걱정이었다.

늘 일이 우선이었던 감덕찬은 그때부터 딸에게 신경을 쓰며 다가가려 했지만, 이미 딸의 마음은 닫힌 뒤였다.

‘엄마 아파서 누워 있을 때 아빠 뭐 했는데요? 내가 아빠 필요한 순간에 아빠가 한 번이라도 와 준 적이 있어요? 이제 와서 이러시는 거 불편해요.’

닫힌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감덕찬은 대신 딸에게 가장 좋은 신랑감을 찾아 주기로 했다.

진짜 딸을 챙겨 주고 위해 주고 최고로 잘살게 해 줄 사람을 찾아 행복을 채워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이민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예고도 없이 결혼할 남자를 데려왔다. 평범한 얼굴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로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민우의 얼굴을 본 순간, 감덕찬은 화가 났다.

‘결혼이라니? 가만있으면 알아서 좋은 짝지어 줄 텐데 어떻게 아빠랑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만들어! 자네 연봉이 얼마인가? 집은 있고?’

‘예. 저는 연봉이…….’

‘됐어. 민우 씨. 대답하지 마요. 어차피 아빠 허락받으러 온 거 아니고 알려드리려고 왔어요.’

‘지연아!!!’

‘전 돈보다 화목한 가정이 더 필요한 사람이고,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에요.’

그렇게 부녀 사이는 급격히 얼어붙었고, 감지연은 결혼 후 아빠에게 더 이상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 뒤 감덕착은 비서가 전해 주는 딸의 사진과 함께 가끔 먼발치에서 딸과 손녀를 쳐다보며 그리움을 삼키곤 했다.

함께할 수 없음에 쓸쓸했지만, 가족과 함께 있는 딸의 행복한 모습으로 위안을 받았다.

딸아이를 한없이 사랑하고 아껴 주는 사위에게도 어느새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저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사는 게 소원이었다.

그런데 하나뿐인 딸의 사고 소식을 들은 감덕찬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네 혹시 잘못 들은 거 아니야? 확실한 거냐고?”

“소식을 듣고 확인해 봤는데 확실합니다.”

“……!”

순간 조금 전, 뉴스에서 봤던 백화점 사고 현장 사진이 감덕찬 머릿속에 떠올랐다.

깨진 유리 파편과 함께 바닥에 흥건한 피가 얼마나 큰 사고인지를 짐작하게 할 정도였다.

영상을 보면서 저런 기업에서 어찌 저리 일을 하느냐고 노발대발했는데, 그 피해자가 딸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벼, 병원은? 병원이 어딘가? 손녀딸과 사위는 괜찮고?”

“네, 두 사람은 무사합니다. 병원은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처음에 신화대병원으로 갔는데 치료를 받던 도중 전원을 갔다고 합니다. 뭔가 억지로 보내진 거 같았습니다.”

“치료를 받다가 전원이라니? 그게……. 됐고! 일단 빨리 지연이 있는 병원으로 출발하게. 어디인지 알고 있나?”

“네, 의원님, 우리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뭐! 우리병원?”

우리병원이라고 하면 아동학대 사건 피해자가 입원했던 그 병원으로, 감덕찬도 알고 있었다.

“우리 지연이가 지금 그 병원으로 가고 있다는 건가?”

“네. 일단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

땅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와 함께 감덕찬은 속으로 딸의 이름을 연신 부르며 정신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지연아! 제발 살아만 다오.’

* * *

우리병원-

“아니, 시x 이게 말이 돼? 어!”

우리병원에서 거친 욕설을 하며 화를 내는 사람은 감지연의 남편 이민우였다.

세상 착한 사람이 오죽 화가 났으면 악에 받쳐 생전 하지도 않는 욕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당신도 한패지?”

“보호자분 그런 거 아닙니다.”

태경은 이민우의 욕설에 약간 당황하면서도 차분하게 달래며 설명하고 또 했다.

-선생님, 환자 보호자와 함께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호자께서 화가 많이 나셔서 수술 진행하시는 데 힘드실 수도 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 전 신화대병원 전공의로부터 보호자가 화가 많이 났다는 문자가 왔었다.

눈이 뒤집힐 거 같은 보호자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됐다.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당장 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크고 시설 좋은 병원에서 우리병원으로 데려왔으니 어찌 보면 화가 폭발하는 게 당연했다.

“우리 아내……. 우리 지연이 하! 아픈 사람을…….”

이민우는 약간 울먹거리며 조금 전 신화대병원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저, 전원이라니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죄송합니다. 보호자분.’

‘당신 의사 맞아? 환자를 어떻게 이런 상태로 보내겠다는 거야? 그럼 애초에 치료해 준다고 말하질 말았어야지.’

이민우는 갑작스럽게 치료를 못 한다는 소리에 눈이 돌아갈 거 같았다.

아픈 아내를 또다시 다른 병원으로 옮기기 싫었지만, 앵무새처럼 치료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전원 가라는 소리에 어쩔 수 없었다.

“보호자분, 지금 화나시는 거 충분히 이해해요.”

“이해한다고? 당신이 내 심정을 알아?”

태경의 머릿속에는 빨리 보호자를 설득할 생각밖에 없었다.

“이봐요, 이민우 씨! 조금만 진정해 주시고 제 말을 들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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