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11화 (210/472)

211화. 지름 10cm 길이 40cm

“보호자분 지금 화나시는 거 충분히 이해해요.”

“이해한다고? 당신이 내 심정을 알아?”

태경의 머릿속에는 빨리 보호자를 설득할 생각밖에 없었다.

“이봐요, 이민우 씨! 조금만 진정해 주시고 제 말을 들어 보세요. 저희는 환자분을 도와 드리기 위해 오히려 아무 책임도 없는데 떠안은 겁니다.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를 포함한 우리병원 의료진들은 순수한 의도로 환자분을 돕고 있는 거예요.”

“당신! 아까 찾아보니까 그 병원 출신이던데. 지금 서로 짜고 치는 거잖아. 아니야? 여기 환자 한 명이라도 늘리려고 하는 거 아니냐고?”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태경에게는 이 상황 자체가 억울했다.

신화대병원과 비교했을 때 우리병원이 크기와 시설로는 뒤처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의료진 개개인의 실력과 환자를 향한 마음은 그보다 더하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었다.

지금 병원이 한가하고 수술할 환자가 없어서 감지연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신화대에서 있던 속사정을 말할 수 없던 태경은 분노로 가득한 보호자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다.

무엇보다 감지연의 상태가 급해서 이러고 있을 시간도 아까웠다.

병원에 들어올 때부터 사방으로 다섯 번째 바이탈이 진동했다.

4단계. 포르말린 냄새였다.

빨리 수술을 진행하기 위해 빠른 설득이 필요했다.

“저기 환자분…….”

“괜찮아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옆에 있던 임정숙 간호사가 말리려고 했지만 태경이 제지하며 말을 이었다.

“환자분 지금 아내분의 수술이 시급합니다. 수술 끝난 뒤에 제가 충분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수술부터…….”

“이보세요! 당신 같으면, 그쪽이 내 입장이라면 마음 편히 수술을 맡길 수 있겠어요? 예?”

이민우가 태경의 의사 가운을 붙잡고 목소리를 높이던 바로 그때였다.

“무조건 맡겨도 된다.”

갑자기 들려온 굵직한 목소리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뒤를 돌아봤다.

“여, 여긴 어떻게…….”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는 목소리와 달리 상기된 얼굴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감덕찬 의원이었다.

그는 이민우를 한 번 쳐다보더니 바로 태경에게 걸어왔다. 그리고는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김태경 선생님. 저 감덕찬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일전에 한 번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저를……. 아!”

감덕찬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태경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일전에 아동학대 피해자였던 세영이가 입원했을 당시 수석 보좌관이 후원금과 함께 사진을 요구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거절하는 태경에게 끝까지 요구한 보좌관의 무례함을 사과하며 인사를 했던 사람이 바로 감덕찬이었다.

그때도 국회의원 특유의 우월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던 그를 보며 정치판에 있는 사람치고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그런 감덕찬이 왜 갑자기 불쑥 찾아왔는지 태경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의원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표정을 보니 기억이 나셨나 봅니다. 원장님, 여기 이 친구가 제 사위입니다.”

“예?”

“신화대병원으로 급하게 전원 온 환자 감지연은 제 딸자식이고요.”

“아버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면…….”

“이 서방? 이미 다 알고 있어.”

“예?”

그동안 서로 왕래도 하지 않고 지낸 사이에 갑자기 장인어른이 불쑥 온 것도 놀라운데,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하니 이민우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내 사고 소식에 너무 놀라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연이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아 그동안 연락을 할 수 없었지만, 세 식구 사는 걸 다 지켜봤어. 자네야말로 지금 이 상황이 화나고 어리둥절하겠지만, 오히려 김태경 원장님께 온 걸 감사해야 하네. 원장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황당한 이민우를 뒤로하고 감덕찬은 다시 태경을 쳐다봤다.

“제가 김건형 회장과 오랫동안 아는 사이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원장님 이야기를 종종 들었어요. 김 회장도 평소 원장님 칭찬을 많이 했고, 또 우리 이 수석이 그러더라고요. 원장님이 못 고치는 환자는 거의 없으며 원장님이 못 할 정도의 환자는 누구도 살릴 수가 없다고요.”

“아니요. 그건 너무 과찬이십니다.”

“원장님. 아빠 노릇 한 번 한 적 없는 못난 아비로서 부탁드립니다. 제발 우리 지연이를 살려 주세요.”

감덕찬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딸을 가진 부모의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수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저와 의료진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보호자분, 아내분 수술 동의하시나요?”

“이 서방, 날 믿어.”

“예……. 제 아내 잘 부탁드릴게요.”

그 뒤 수술 동의서와 설명이 빠르게 진행됐다.

시간이 너무 지체된 태경은 의료진과 함께 서둘러 수술실로 향했다.

“자네 괜찮나……?”

“예? 네. 아니 사실 불안해 죽겠습니다.”

감덕찬이 뛰어가는 의료진을 보고 서 있던 이민우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자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지연이 강한 사람이야.”

“죄송합니다.”

사실 이민우는 계속해서 아내에게 장인어른을 보러 가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전보다 완강함이 줄어든 아내였기에 조만간 딸을 데리고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뵌 장인어른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자신이 아내를 지키지 못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님.”

“이 서방,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다고 그래?”

“제가 지연이를 지키지 못한 거 같아서요.”

“자네 잘못이 아니라 그 백화점과 신화대병원의 잘못이겠지?”

“예?”

“그렇지 않나. 개점한 지 며칠밖에 안 된 초호화 백화점에서 그런 사고가 났다면 부실 공사일 확률이 대다수야. 그리고 멀쩡하게 치료받던 병원에서 갑자기 환자를 전원 보내는 것도 뭔가 뒤가 구리다는 거지.”

더러운 정치판에서 이 꼴 저 꼴 다 보며 4선까지 한 감덕찬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서방?”

“예, 아버님.”

“우리 지연이 저렇게 만든 것들 전부 다 찾아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이딴 짓을 저지른 놈들에게 책임을 물을 테니까 자네는 아무 걱정하지 마. 지금은 그저 지연이 수술이 잘되기만을 바라자고.”

감덕찬은 날 선 눈빛으로 화를 삼키며 딸을 걱정했다.

* * *

수술방에 들어온 태경은 가우닝을 시작했다.

이미 감지연은 의진의 주도 아래 전신마취가 되어 있었고 멸균된 일회용 수술포들로 수술 필드가 세팅된 상태였다.

‘독하네! 독해!’

수술방은 감지연의 다친 부위에서 흘러나오는 포르말린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한동안 심각한 외상 환자가 없었기에, 익숙했던 포르말린 냄새가 오늘따라 더 독하게 콧속을 침범했다.

“자, 메스 주세요.”

“네, 선생님.”

“그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태경이 환자의 오른쪽 배에 솟아 있는 유리 구조물 위아래로 크게 절개선을 넣는다.

“진짜 큰 유리 조각이 박혔네요.”

“딸 살리겠다고 뛰어든 엄마의 모정이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의진과 임정숙 간호사는 감지연 복부에 박힌 유리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보비!”

태경이 절개된 피부 밑에 보이는 근육을 전기소작기로 조금씩 절개해 나갔다. 그러면서 근육에서 스멀스멀 흐르는 출혈들을 보비로 지지면서 지혈했다.

“지금 보비 파워 몇이죠?”

“현재 30입니다.”

적당한 파워임을 확인한 뒤 다시 근육들을 자르고 이어서 근막과 그 밑의 복막을 크게 열었다.

“리차드슨(Richardson, 리트랙터의 준말, 90도로 꺾인 큰 주걱을 복벽을 당겨서 유지하게 해 줌) 주세요.”

최모나는 리차드슨을 이용해서 걸러진 복벽을 양쪽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배 속을 보니 피가 덕지덕지 떡을 이루고 있었다.

“자, 이제 집중하자고 디베키(debakey, 포셉의 준말로 20cm의 긴 포셉) 주시고 초음파에 멸균 씌워 주세요.”

태경은 눈에 보이는 피떡과 유리 조각들을 하나하나 포셉으로 집어서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큰 유리 구조물 주변으로 소장을 치우면서 그 바닥을 유심히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정말 다행히도 큰 혈관들은 다 피했네.”

큰 혈관이 다치지 않은 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자, 이제 이 유리 뽑을게요. 하나, 둘, 셋!”

슈욱-

카운트 소리와 함께 지름 10cm 길이 40cm 정도 되는 깨진 유리 구조물이 감지연의 복부에서 뽑혀 나갔다.

어찌나 큰지 환자의 뒤 배벽도 뚫린 상황으로, 수술 이후 봉합이 당연히 필요한 상태였다.

“세상에! 진짜 이렇게 큰 유리가 박혀 있었다니……. 환자분이 안 피했으면 이게 아이에게 떨어졌다는 거잖아요.”

“말 그대로 엄마의 모성이 아이를 살렸습니다.”

“최 쌤 말이 맞네. 진짜 이건 모성이고 기적이다.”

빠진 유리 구조물을 보며 의료진은 다들 놀라움과 함께 한마디씩 던졌다.

“자! 수술 아직 안 끝났어요. 다들 집중합시다.”

“네, 선생님.”

“탭(수술 시 사용되는 손바닥만 한 거즈) 잔뜩 주세요. 그냥 그거 뭉치 다 주세요.”

“알겠습니다.”

태경은 뒤 배벽에서 나오는 출혈을 막고자 우선 거즈를 밀어 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거즈를 뭉텅이로 밀어 넣고 싶지만, 환자를 위해서 그럴 수 없었다.

중간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밀리면서 다른 장기의 손상을 주는 것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셉으로 신중하게 깊이 밀어 넣고 있었다.

“선생님, 시야가 너무 안 좋습니다.”

최모나의 말이 맞았다.

유리 조각들로 생긴 출혈들이 떡이 되어 시야가 안 좋았다.

하지만 조각들 때문에 이리게이션(irrigation, 식염수 등으로 세척하는 행위)을 맘대로 할 수도 없었다.

태경은 우선 잘린 소장에서 내용물이 흘러나와 감염이 생기는 것을 막고자 잘린 면을 기구로 잡아서 새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유리가 관통되면서 생긴 손상들을 모두 복구하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고, 우선 깨진 유리 조각들을 하나하나 다 치우는 게 중요했다.

지금은 이게 가장 중요했고 복구는 그다음이었다.

“조각 전부 치우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환자가 살기 위해 우리병원까지 왔는데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해야지.”

방금 태경의 말대로 지금 이 과정이 아주 오래 걸릴 것이 뻔했다.

초음파로 하나하나 전부 확인하면서 아주 작은 조각들도 모두 제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 조각들이 주변 장기에 손상을 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환자를 위해서도 조심스럽게 유리 조각들을 일일이 제거해 나갈 수밖에 없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수술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겁니다. 힘들겠지만, 긴장 늦추지 말고 끝까지 힘내세요. 자! 초음파 주세요.”

“네, 선생님.”

수술방 스텝들에게 힘을 실어 주며 태경은 기계를 보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소장을 이리저리 치웠다.

그리고 중간마다 배 안에 있는 유리 조각들을 제거한다.

지금 하는 수술은 무조건 꼼꼼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오랜 시간 확인하고 또 확인해 나갔다.

틱- 틱-

유리끼리 부딪치는 작은 소리와 함께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났다.

작은 유리를 떼어 내기 위한 태경의 진지하다 못해 날카로운 눈빛 위로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히자 간호사가 빠르게 닦아 주고 있었다.

또다시 수술방에 시간은 흐르고 어느새 유리 조각을 떼어 낸 지 네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하!”

네 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작업하던 태경이 고개를 들고 짧은 한숨을 터트리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