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쓰레기들은 제가…….
우리병원으로 막 전원을 왔을 때만 해도 잔뜩 화가 난 채 아무도 믿지 못하던 이민우의 모습은 더는 없었다.
‘이 서방, 자네가 지금 속에서 천불이 날 정도로 화나겠지만, 우리가 지금 믿을 분은 김태경 원장님뿐이야. 어디를 가도 저런 의사 못 만나. 그러니까 마음 가라앉히고 수술이 잘되도록 응원하자고.’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장인인 감덕찬에게 태경에 관해 전해 들은 뒤 자신이 오해한 사실을 알고 미안한 마음이 컸다.
“아까 제가 무례하게 군 점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아내 살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보호자분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러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고맙습니다. 제가 원장님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 딸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민우뿐만 아니라 감덕찬 또한 진심으로 인사를 전하며 딸을 살려 준 마음을 전했다.
“저기, 감지연 환자 보호자분?”
잠시 뒤, 임정숙 간호사가 대기실로 찾아왔다.
“네.”
“이제 바로 환자분 면회하실 건데 한 분만 가능해서요. 어떤 분이 면회하시겠어요?”
“당연히 자네가 가야지.”
자신을 쳐다보는 이민우를 보며 감덕찬이 사위의 등을 살짝 밀었다.
“아버님께서 들어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지연이 많이 보고 싶으시잖아요.”
“이 사람아. 지금까지 지연이 곁을 지킨 건 내가 아니라 자네야. 난 내일 봐도 돼. 그러니까. 얼른 가 봐. 그리고 지연이한테 내가 많이 보고 싶다고, 잘 견뎌 줘서 고맙다고 전해 줘.”
“네, 아버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따 뵐게요.”
이민우와 함께 중환자실로 향한 임정숙 간호사는 잠시 그 앞에서 멈춰 섰다.
“보호자분? 이거…….”
아직도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는 이민우에게 임정숙은 휴지를 건넸다.
“곧 아내분 보실 텐데 자꾸 우시면 놀라실 거 같아요. 원장님 설명 들으셨죠? 수술 잘됐어요.”
“아! 감사합니다. 자꾸 눈물이 나와서. 안 그래도 저 울면 아내가 더 걱정할 거예요. 제가 너무 놀라서요.”
이민우는 휴지로 눈물을 훔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내분이 다쳤는데 당연히 놀라시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감사합니다.”
“들어갈게요.”
이민우는 안내 사항을 들은 뒤 중환자실로 들어가 아내에게 향했다.
“지, 지연아?”
“자기야…….”
이민우가 다가가자 마취에서 깨어난 감지연이 힘겨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여보 수술받느라 애썼어.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수술 잘됐대. 힘들었지? 괜찮아?”
“응. 간호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강한 진통제가 들어가고 있대. 그래서 그런지 괜찮아. 견딜 만해. 우리 채영이는?”
“누나가 잘 보고 있어. 걱정하지 말래. 엄마 아빠 보고 싶다고 울지도 않고 아까 잠들었대.”
“우리 딸 기특해라.”
“지연아 미안해.”
“당신 많이 놀랐지? 자기가 왜 미안해.”
“내가 면도기만 사러 가지 않았어도, 당신도 채영이도 이런 일 겪지 않았을 거 아니야. 괜히 나 때문에…….”
“당신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는 채영이가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내가 앞으로 목숨 걸고 당신이랑 우리 채영이 지킬 거야. 그러니까 당신은 회복하는 거만 힘써. 알았지?”
“그래. 든든하네.”
“지연아. 그리고 밖에 장인어른이 오셨어.”
“아, 아빠가? 아빠가 어떻게…….”
눈가가 촉촉한 남편을 보고 도리어 위로를 건네던 감지연이었다.
그런데 아빠라는 말에 모정이 넘치던 엄마에서 딸로 돌아간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동안 우리 가족을 계속 지켜보고 계셨나 봐. 한걸음에 달려오셨는데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시던지 얼굴이 말이 아니시더라. 장인어른이 당신 많이 보고 싶어 하셔.”
“그래? 나도 우리 아빠 보고 싶다.”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감지연도 아빠가 많이 그리웠다.
딸을 낳고 부모가 되니 홀로 남은 아빠가 그립고, 그때 그 마음들이 이해됐다.
“정말이지?”
“응. 정말이지.”
“다행이다. 내일은 장인어른이 면회 오실 거야.”
“빨리 보고 싶다. 아빠한테 그동안 죄송했다고 전해드려. 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도 하고.”
“알았어. 지연아 살아 줘서 진짜 고마워.”
이민우는 감지연의 손을 꼭 잡으며 힘든 수술을 견딘 아내를 위로했다.
* * *
이민우가 임정숙 간호사와 함께 보호자 대기실을 나가고 태경은 사고에 대한 궁금한 점을 물었다.
“사고 얘기 듣고 많이 놀라셨겠어요.”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데 심장이 멎는 것 같더군요. 처음에 신화대에서 전원을 갔다고 했을 때는 기분이 안 좋았는데, 원장님 병원으로 왔다니 도리어 안심이 됐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백화점 측에서는 아직 사과의 말이 없었나요?”
“네, 원장님. 제가 그래서 이 뻔뻔하고 쓰레기 같은 놈들 아주 제대로 혼을 낼 생각입니다.”
감덕찬은 분노로 가득한 눈빛을 이글거리며 뭔가를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아무튼 제가 우리 김 원장님께 이번에 신세를 톡톡히 졌습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신세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환자를 살리는 게 의사의 본분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환자를 살리는 것.
태경에게 있어서는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을 감덕찬이 너무나 감격한 표정으로 저렇게까지 표현하니 뭔가 민망했다.
“솔직히 원장님 같은 분에게는 당연할지 모르지만, 요즘 그렇지 못한 의사들도 더러 있습니다. 모든 의사가 원장님 같지는 않으니까요.”
“……!”
그 말을 듣고 있던 태경은 순간 속으로 ‘아’ 하면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같은 의사로서 부끄러운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고계득이었다.
저런 이상한 의료인 때문에 사람들이 의사를 불신하는 일이 생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분은 내일 면회 가능할 겁니다. 큰 고비는 넘겼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원장님.”
“그럼 전 이만…….”
“저기! 잠시만요.”
감덕찬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태경을 급하게 불러 세웠다.
“원장님, 대단히 실례되지만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그럼요.”
“혹시 말입니다.”
감덕찬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을 말을 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제 딸아이가 신화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갑자기 전원을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근데 제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이게 좀 이상해서요. 이 서방이 그러는데 신화대 전공의는 처음부터 아주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치료를 못 하니 무조건 전원을 가라고 했다는군요. 혹시 이 부분에 대해서 뭔가 아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제가 알고 있는 거요?”
“예, 선생님께서 신화대병원 출신인 걸 알고 있습니다. 피해 가는 일이 없게 해결할 테니 뭔가 알고 있다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이 일이 적절한 전원 조치가 아닌 뭔가 뒤가 구린 일이 있었다면 가만있지 않을 생각입니다.”
가만히 감덕찬의 말을 듣고 있던 태경은 그가 던진 다음 말에 반응했다.
“적어도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를 갖고 장난치는 의사는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 말은 태경이 TV에 나와 했던 말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혹시 이번 일도……?’
만약 이번 일에도 고계득이 개입된 거라면.
무턱대고 사람을 의심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꾸만 나쁜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의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권수현은 이사장 라인과 동시에 고계득과 상당한 친분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실력으로 당당하게 교수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평소에도 자신 없으면 전공의에게 수술을 시키거나 전원을 자주 보냈다고 했었다.
분명 연락을 했던 그 전공의는 검사도 꼼꼼하게 진행했던 걸로 보아 수술을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전원을 보내라는 권수현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니 통화할 때 전공의가 스치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양복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권 교수님을 찾은 뒤로 전원을 보내라고 하셨거든요.’
전공의는 말을 아꼈지만 아마도 그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백화점 측 사람들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중간에 연결해 준 사람이 있을 텐데…….’
골똘히 생각하던 태경이 예전 이동훈이 자주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신화대병원이 왜 기부금이 끊이질 않는지 알아? 고계득이 재계 사람들이랑 친분이 어마어마하거든.’
이쯤 되니 태경은 감덕찬에게 넌지시 자신의 이런 생각을 알리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병원 이사장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국회의원이고 무엇보다 감덕찬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고계득을 내려오게 할 생각이라면 더 확실하고 비참하게 끌어내리는 게 맞았다.
“의원님?”
한참을 생각하던 태경이 입을 열었다.
“네, 원장님.”
“아까 신화대병원에 백화점 측 사람이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과 직접 만난 사람이 이 일의 주범이지 싶습니다. 그리고…….”
“그, 그게 사실입니까?”
태경의 말을 전부 들은 감덕찬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사실입니다.”
“결국 원장님 말씀은 권수현과 고계득 그리고 그들과 백화점과의 관계를 확인하라는 뜻이군요.”
“네.”
“하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혹시 일전에 TV에 나와서 말했던 그 의사가 혹시 고계득인가요?”
“고계득이 맞습니다.”
“하! 메이저 병원 원장이란 사람이……. 이거 참! 원장님 그런 쓰레기들은 제가 처리할 테니 이제 원장님은 마음 편히 환자들만 돌보는 데 힘쓰세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전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감덕찬은 태경과 인사를 나눈 후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네, 의원님.
전화를 받은 상대는 수석 보좌관이었다.
“자네, 고계득과 JQ 백화점 관계 알아봐. 그리고 피해자가 내 딸인 것도 언론에 대놓고 알리고.”
피해자가 국회의원 딸인 걸 알면 분명 쥐새끼들이 알아서 기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그 작가분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래? 어떻게 됐어?”
감덕찬은 딸의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이 수석에게 백화점 장식물을 만든 외국 작가와 연락할 것을 지시했다.
-의원님께서 예상하시던 게 맞았습니다.
“부실 공사야?”
-네. 그 작가 말로는 천장 하중이 견디지 못할 거라고 하면서 케이블 선을 더 설치하라고 요구했는데 무시됐다고 합니다.
“그 말인즉 JQ 백화점 측에서는 부실 공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네.”
-네, 회장과 이 문제를 두고 직접 대화를 나누다 몇 번 의견 충돌까지 났었다고 했습니다.
“이 미친것들이 돈에 환장에서 사고가 날 백화점을 개점했다는 말이군. 쓰레기 같은 놈들. 지금 말 사실도 전부 언론에 싹 다 뿌려서 공론화시켜 버려.”
-네, 의원님 알겠습니다.
감덕찬은 이번 일은 결코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