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도떼기시장
응급실 스테이션에서 태경의 결과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의진에게 임정숙 간호사가 말했다.
“어때요?”
“다행히 특별하게 이상 있는 곳은 없네요.”
꼼꼼하게 확인한 의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안심했다.
그 말에 임정순 간호사는 물론 이찬희와 최모나, 최 팀장 등 곁에 있던 직원들도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수술방에서도 컨디션 안 좋아 보이더니 제 예상대로 과로네요.”
“과로 올 만도 하죠. 사실 왔어도 진작 왔어야지.”
“그건 임 선생 말이 백번 맞아. 우리 원장님이 지금까지 너무 무리하셨어.”
“팀장님 말이 맞아요. 늘 환자만 보느라 본인 몸 챙기지도 않으셨잖아요.”
“아무튼 지금 좀 쉬어야 할 거 같아요. 응급 환자 오면 콜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나머지는 우리가 수고 좀 하죠.”
“당연하죠.”
“이 쌤, 최 쌤이 수고 좀 해.”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의진은 수액을 챙겨 응급실을 나와 의국실로 향했다.
철컥-
“우리 원장님 참말로 와 그라고 사노?”
문을 열고 의국실로 들어가자 식당 주방장인 오계순이 혀를 차며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쯧쯧! 내가 몸 좀 쉬게 하라고 그리 말했는데 말도 안 듣고 참말로 답답하데이.”
“저 정말 괜찮아요.”
“정 선생, 우리 원장님 말하는 것 좀 봐라. 아직도 정신을 몬 차렸다.”
오계순은 의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도 여사님이랑 같은 생각이에요. 제가 봐도 정신 못 차린 거 같아요.”
“정 선생이 정신 교육 좀 단디 시켜라. 원장님 무엇보다 내 몸이 우선이기라. 알긋나? 저거 이따 꼭 챙겨 묵고.”
“예, 알겠습니다.”
오계순은 소고기 죽이 들어 있는 보온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여사님께 단단히 혼났네.”
“그거 가지고 되겠어요? 더 혼나야죠.”
“나 별 이상 없지?”
“특별한 이상은 없고 과로예요.”
“다행이네. 난 또 혹시 어디 안 좋은 거 아닌가 하고 걱정했잖아.”
아까 병동에서 살짝 어지러움을 느꼈을 때 태경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잠시 건강을 염려했었다.
“다행은 무슨 다행이에요.”
“과로는 누구나 있잖아.”
“선배가 그만큼 무리하고 있으니까 몸이 좀 쉬어 달라고 신호를 보낸 거잖아요. 그리고 그 누구도 선배처럼 미련하게 일 안 해요.”
“훗!”
태경은 의진이 쉴 새 없이 쏟아 내는 잔소리가 듣기 싫은 게 아니라 어쩐지 귀여웠다.
“뭐예요?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요?”
“그럼 울어야 하나?”
“어휴! 썰렁한 농담 그만하시고 얼른 누워요.”
“왜?”
“왜긴요!! 수액 놓으려고 하죠. 아프라고 그냥 콱 찔러 버릴 거야. 얼른 누워요!!”
의진이 한쪽에 있는 베드를 손으로 탁탁 쳐 대며 태경을 올려다봤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이렇게까지 안 하면 선배 고집 안 꺾고 또 나가서 바로 환자 볼 거잖아요. 내 말이 틀려요?”
“아니라고 못 하겠네. 근데 주사 진짜 아프게 찌를 거야?”
“네, 진짜 콱 찔려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의진은 아프지 않게 정맥 주사를 넣었다.
“하나도 안 아프네.”
“그래요? 선배가 아픈 거 잘 참나 보죠. 이거 다 맞으려면 2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잘 조절해 놨으니까 맞는 동안 눈 감고 푹 쉬세요. 선배, 농담 아니라 건강 잃으면 진짜 아무것도 소용없어요.”
백번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태경은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죽을병에도 걸려 보고 한 번 죽어다 살았으니 건강의 소중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정신없이 환자를 보다 보면 피곤하다는 생각도 안 날 만큼 열중하다 보니 늘 그게 문제였다.
“선배 무너지면 우리병원도 무너져요. 그러니까 제발 가끔은 선배 자신을 위해 좀 쉬면서 하세요. 제가 부탁할게요.”
자기 일에 열심히 일하는 태경을 지지하고 그런 그의 모습이 좋았지만, 가끔 의진은 그 점이 안타까울 때도 많았다.
“그래, 고마워. 근데 과로가 온 것도 나쁘지 않은데. 의진이 네 간호도 다 받고.”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다음 오프 때 내가 밥 사 줄게. 같이 밥 먹자.”
“밥은 맨날 식당에서 먹는데요. 그거 말고 영화나 술 한 잔 사 주세요.”
“그럼 밥 먹고 영화 보고 술 한 잔까지 사 줄게.”
“아니요. 영화는 제가 보여 드릴게요.”
늘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항상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열과 성을 다해 챙겨 주는 의진이 태경은 참 고마웠다.
“의진아?”
“네, 선배.”
“늘 고마워.”
태경이 손으로 의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고마움을 전하던 바로 그때였다.
철컥-
“우리 원장님 쓰러졌다면서?”
정말이지 일에 묻혀 사는 두 사람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달달한 분위기를 이동훈이 산산이 박살 내고 말았다.
“서, 선생님 오셨어요?”
당황한 의진이 자신의 머리 위에 안착한 커다란 손을 냅다 뿌리치며 걸터앉아 있던 침대 끝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정 선생도 와 있었네.”
“네, 전 수액 때문에요.”
“아! 그럼. 수액 맞아야지. 비타민도 좀 같이 맞지.”
“비타민도 같이 들어가고 있어요.”
“항암 주사 맞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태경이 눈썹을 들썩거리며 이동훈에게 물었다.
“와이프랑 근처 볼일 있어서 왔다가 팀장님이 톡 방에 우리 원장님 과로로 쓰러졌다고 해서 걱정돼서 왔지.”
“잘 오셨네요. 선생님께서 혹시 선배 중간에 일어나지 않게 잘 지켜봐 주세요.”
“그래? 잘됐네. 아까 서점에서 책도 사 와서 읽을 것도 있으니까 내가 잘 볼게.”
“네, 선생님.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래. 정 선생 수고해.”
철컥-
멋쩍은 의진은 재빨리 의국실을 나갔다.
“태경아 내가 오니까 좋지?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얼른 잠이나 자.”
“네, 선배님이 오시니까 정말 좋아 죽겠어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의 사정을 모르는 이동훈은 뿌듯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 * *
“아니, 자식 교육을 어떻게 했으면 그 나이에 애가 벌써 폭력적이에요?”
“뭐, 뭐라고요? 폭력?”
태경이 수액을 맞으며 모처럼 단잠에 빠져든 사이, 응급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나고 있었다.
가끔 응급실에는 그런 날이 있다.
환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것도 모자라 마치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날이 있다.
그 와중에 환자 보호자들끼리 모여서 싸움까지 하는 날이 간혹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근처 교육열이 높기로 소문난 신도시가 있는데, 아파트 단지에 있는 태권도 도장에서 아이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문제는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폭력이라니 지금 말 다 했어요?”
“아니요!! 아직 못 했어요? 여기 보여요? 그 집 아들이 우리 귀한 아들 이마에 상처를 냈잖아요.”
“이보세요? 우리 애 볼에 상처 난 거 안 보여요? 네?”
“그쪽 아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까 방어하다가 그랬겠죠?”
“시비? 이봐요? 당신 152동 15층 살지? 듣자 하니 부부가 맨날 싸움박질한다고 그 동에 소문 파다해. 애가 뭘 보고 배웠겠어?”
“뭐, 뭐야?”
“야! 네가 봤어? 어! 봤냐고?”
“이 아줌마가 내 와이프한테 반말이야? 어?”
“야! 넌 뭔데 우리 마누라한테 반말질이야?”
엄마들끼리 싸움은 급기야 아빠들 싸움까지 번지며 네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다.
“저기요!! 보호자분들??”
보다 못한 이찬희가 계속 말리고 있지만 네 사람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선생님, 우리 천이 심각하죠?”
“우리 희수가 더 심각하지 않아요? 흉터 남을 거 같은데…….”
“제가 다 설명해 드릴 테니까 일단 다들 진정하세요.”
“이게 진정하게 생겼어요? 그러지 말고 진단서 좀 끊어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이 몰상식한 사람들 고소하려니까 우리도 좀 끊어 주세요.”
“목소리 좀 줄이세요. 하!”
사람 말을 들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이찬희가 돌아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그만!!!!!”
응급실이 너무 바빠 일손을 돕기 위해 내려온 의진이 저쪽에서 사자후를 날리며 다가왔다.
“……!”
시끄럽던 네 사람은 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 다들 합죽이가 됐다.
“이 쌤 여긴 내가 해결할게. 가서 다른 환자 봐.”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의진에 말에 이찬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베드로 향했다.
“아니, 어떻게 다 큰 성인들이 병원에서 이렇게 싸우고들 그러세요. 아이들 보기 부끄럽지 않으세요? 네 분 아이들 없어진 줄도 모르셨죠?”
“어! 우리 애 어디 갔지?”
“어머나! 여보. 우리 희수도 없어.”
목소리를 높이고 싸우고 있던 부모들은 그제야 아이들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저기, 보이시죠?”
네 사람이 의진이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싸웠던 아이들이 응급실 의자 한쪽에 앉아서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호자분들 싸울 동안 아이들은 이미 다 화해하고 저러고 있었어요. 다들 아실 만한 분들이 어떻게 아이들보다 못하세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좀 심했네요.”
“공공장소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두 아이 모두 가벼운 찰과상이고 흉터는 안 생길 거예요. 수납하시고 아이들 데리고 돌아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부모들은 민망한 얼굴로 정중하게 사과한 후 아이들을 데리고 응급실을 나갔다.
그렇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응급실을 나가고 이번에는 최모나가 술에 취한 중년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술 더 가져와!!”
“환자분 진정하세요. 여기 술집 아닙니다.”
“술 줘!! 술!”
남자는 술에 취한 채 길을 걷다 넘어져 얼굴에 찢어져 봉합이 필요한 상태였다.
“환자분, 오른쪽 뺨에 봉합해야 하니까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시끄러! 너 내 몸에 손대면 고소할 거야.”
“선생님. 가서 장 요원님 좀 오시라고 하시겠습니까?”
“네, 선생님.”
이대로 봉합을 할 수 없을 거라 판단한 최모나는 간호사에게 장득칠을 불러와 달라고 부탁했다.
“술!! 소주 사다 줘!”
“환자분!! 그만하세요.”
“최 쌤? 잠시만요.”
최모나가 환자를 진정시키고 있는 사이 다른 간호사가 다가왔다.
“예, 말씀하세요.”
“다른 게 아니라…….”
“으악!!!”
간호사가 최모나에게 신환에 대해 말을 하려던 순간 술 취한 남성이 베드 옆 벽에 머리를 박으려 했다.
“환자분!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이고 이분 많이 취하셨네. 그만하세요.”
때마침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장득칠이 더 큰 사고가 나지 않게 술 취한 남자를 제압했다.
“선생님, 죄송한데 제가 지금 이분 먼저 빨리 봉합해야 할 거 같은데 어쩌죠?”
“최 쌤 내가 볼게. 선생님, 뭔데요?”
마침 다른 쪽에서 환자를 보고 나오던 이찬희가 간호사에게 다가왔다.
“3번 베드에 있는 외과 환자에요.”
“환자 주소(chief complaint, 병원에 오게 된 환자의 주관적 증상)가 뭔데요?”
“그냥 기운이 빠진대요.”
“기운이요?”
“네.”
“근데 왜 외과죠? 이건 내과를 봐야 할 거 같은데요?”
“그게 이 환자분이 3년 전에 직장암으로 원장님께 수술을 받으셨대요.”
“그래요? 환자 바이탈은 어때요?”
“혈압 90/70이고 열은 없어요.”
“혈압이 좀 낮네요.”
“근데 평소에도 혈압은 이 정도 나왔대요.”
“이 쌤? 9번 베드 환자분 통증이 너무 심하대요.”
이찬희가 대답하려던 그때 다른 간호사가 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갈게요. 그 환자 제가 보기에는 급할 거 없으니까 저 환자 먼저 보고 갈게요. 수액 주고 계세요.”
“네, 그럴게요.”
혈압이 좀 낮긴 했지만, 그리 급하다고 판단하지 않은 이찬희는 일단 더 급한 환자를 먼저 보기로 했다.
그렇게 3번 베드 환자는 차례를 기다린 채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챠륵-
“저기 간호사 선생님?”
얼마간의 시간이 또 흐르고 계속 의사를 기다리던 3번 베드 환자가 지나가는 간호사를 불렀다.
간절한 표정으로 간호사를 부른 그는 지방에서 올라온 떡집 사장 오재발이었다.
“네, 환자분.”
“저는 진료를 언제 볼 수 있나요? 바쁘신 건 알지만, 저도 진료를 빨리 봤으면 해서요.”
“아, 네. 죄송합니다. 지금 일단 급한 환자 순으로 보고 있다 보니까 그런 거 같아요.”
“제가 여기 김태경 원장님께서 다른 병원에 있을 때 수술받았던 환자인데 일부러 멀리 지방에서 여기까지 왔거든요.”
“아, 그러세요? 지금 원장님께서…….”
태경이 수액을 맞는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간호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른 말을 전했다.
“원장님께서 다른 업무 중이시라 제가 한 번 더 체크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 제가 환자분 볼게요.”
안 그래도 이찬희에게 콜을 하려던 간호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환자분 안녕하세요. 기운이 없다고 들었는데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그게 어제저녁이랄까 좀 그렇게 느꼈고 오늘 새벽부터 더 그런 거 같더라고요. 선생님, 제가 김태경 원장님 뵈려고 지방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 네. 환자분 다른 증상은 없으세요? 열이 느껴진다거나 몸살 기운이 있다거나 하는 거요.”
“네, 그런 건 없어요.”
“그럼 일단, 피검사 우선 진행할게요.”
“저, 원장님은 언제 뵐 수 있을까요?”
“피검사 우선 하고 제가 말씀드릴게요. 여기 환자분 기본 lab 해 주세요.”
“네, 결과 나오면 콜 드릴까요?”
“아니요, 저 화장실만 갔다가 바로 올게요.”
이찬희가 화장실을 간 사이 수액을 다 맞은 태경이 의국실에서 나왔다.
“어, 원장님. 좀 괜찮으세요?”
“좀이 아니라 매우 괜찮습니다.”
걱정하며 묻는 최 팀장에게 태경이 끄떡없다는 듯이 말했다.
“근데 이동훈 선생님이 안 보이시네요.”
“원장님 잠드신 거 보고 가셨어요. 옆에 있으면 편히 못 주무신다고요.”
“그래요? 그나저나 지금까지 응급 콜이 하나 없네요. 응급실 괜찮아요?”
“아니요. 안 괜찮습니다.”
최 팀장이 답을 하려던 찰나 화장실에서 나온 이찬희가 대신 답했다.
“바빴어?”
“바쁜 정도가 아니라 거의 뭐 전쟁이었어요. 말도 마세요. 휴!”
“표정을 보니 엄살이 아니네. 고생했어. 이제 내가 볼게.”
“몸은 좀 괜찮으세요?”
“좋은 걸로 맞아서 그런지 아주 개운……!”
이찬희와 함께 걸으며 대화하던 태경의 표정이 순식간에 확 구겨졌다.
‘뭐지? 이 냄새……?’
응급실과 가까울수록 코끝을 강타하다 못해 마비시킬 정도의 강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마치 시체가 썩고 타는 듯한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