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지옥 탈출
“왜? 너 의무실 가기 싫어?”
“아닙니다.”
김성훈은 아픈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우리 444번 오징어 출발선에 섭니다. 실시!”
“…….”
“실시!”
아무 대답이 없자 고철수는 다시 한번 목청을 높였다.
“시, 실시!”
김성훈은 출입문 맞은편 끝으로 걸어가 차렷 자세를 취했다.
“자!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한다. 게임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할 거다. 우리 444번 오징어는 게임이 진행될 동안 술래인 내 등을 치면 의무실을 갈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게임이다.”
“이야, 우리 성훈이 금방 가겠다. 철수야. 너무 간단한 거 아니냐?”
팔짱을 낀 채 앉아있는 박병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룰이 간단하면 게임이 좀 지루하지 않아?”
“그래서 내가 한 가지 룰을 더 만들었지.”
두 사람은 배가 아픈 김성훈을 그대로 세워둔 채 말도 안 되는 게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다리 하나를 들고 깽깽이로 게임을 하는 거지. 어때? 이러면 덜 지루하겠지?”
“미친놈인가? 하여간 너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 근데 개꿀잼 인정.”
악마였다.
김성훈 눈에 비친 저 두 사람은 악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 자체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저 두 사람을, 특히 고철수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닐 때도 내성적이고 체구가 작아 몇 번의 괴롭힘이 있었다. 물론 그때도 힘들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악마 같은 고철수의 괴롭힘이 시작될 때마다 김성훈은 본인이 무슨 죽을죄를 지었는지 스스로 묻기까지 했다.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었다.
“444번?”
“이병! 김성훈.”
“아, 개노잼. 새끼야 관등 성명이 아니라 번호를 말해야지. 뇌 우동사리 꼈냐?”
“444번? 준비됐습니까?”
“444번 준비됐습니다.”
김성훈은 다리 한쪽을 살짝 들며 자세를 취했다. 빨리 게임을 끝내고 의무실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까보다 배가 아픈 게 덜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약을 먹어야 할 거 같았다.
“시작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오호!”
게임을 알리는 소리에 김성훈이 한쪽 다리를 들고 힘들게 앞으로 가다가 멈췄다.
“오! 이 새끼 잘한다.”
“다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또다시 출발을 알리는 소리에 김정훈은 집중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스스로가 우습다는 생각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였다.
저 두 악마에게는 그저 하나의 즐거운 놀이시간에 불과할지 몰랐지만, 김정훈에게는 매 순간 전투적인 자세로 임하는 게임이었다.
만에 하나 게임을 진행하다가 두 사람의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때는 더 끔찍한 결과와 함께 시간이 지체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뭐지? 이 새끼 우리랑 게임을 하도 해서 그런지 아주 도가 텄는데?”
“그러네. 미친! 레알 고수됐어. 좋아! 한 번 더 간다. 무궁화~~~~꼬오오오오꽃이 피었을까 안 피었을까 하다가 피었습니다.”
별 지랄 같은 게임 구령 속에서도 김성훈은 이를 악물고 버티며 고철수의 바로 뒤까지 도착했다.
“아! 노잼. 아, 시x 야, 김성훈?”
“이병, 김성훈.”
“너 게임 한두 번 해 봐?”
게임을 잘하는 김성훈이 이내 못마땅한 고철수는 늘 그렇듯이 쓸데없는 트집을 잡았다.
“적당히 눈치껏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면서 김성훈의 유두 부위를 콕 찌르고 뺨을 톡톡 때리며 모욕감과 함께 치욕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어? 대답 안 해?”
“이병 김성훈!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이따위로 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야! 철수야 그만해라. 사람들 올 시간 됐어. 그냥 보내 줘. 그래도 한 발로 졸라 열심히 하더라. 병신 같고 잘했어.”
“하긴. 분대장이 보면 또 괜히 잔소리할 거 뻔하니까. 알았다. 갔다 와.”
“감사합니다. 이병 김성훈, 의무실 다녀오겠습니다.”
철컥-
김성훈은 미친 두 선임에게 인사를 한 뒤 재빨리 의무실로 향했다.
“어디가 아프다고?”
“배가 아픕니다.”
“음…….”
김성훈을 진찰하는 군의관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귀찮은 듯 보였다.
퇴근하려던 찰나 김성훈이 들어왔기 때문이라 그냥 대충 빨리 약을 주고 보낼 생각뿐이었다.
“가만있자. 너 보니까 복통으로 몇 번이나 왔었네? 맞지?”
“예, 그렇습니다.”
“지금은 어때? 지금도 아파?”
“심하게 아픈 건 아닌데 실은 제가 좀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배가 아픈 게 잦아들긴 했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뭔데? 말해 봐.”
잠시 고민하던 김성훈은 여전히 귀찮은 듯한 군의관에게 말했다.
“배도 아픈데 제가 변을 못 보고 있습니다.”
“하! 야, 이병?”
“이병, 김성훈!”
“변 못 본 건 괜찮아. 변비 걸린 사람도 며칠 못 본 사람 많아. 약 처방해 줄 테니까 일단 먹어 봐. 그렇게 죽을 병 아니니까 심각한 표정 하지 말고. 약 받고 이만 가 봐.”
“예, 감사합니다.”
다른 병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김성훈에게는 의무실을 오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나 귀찮은 듯한 군의관은 대충 진료를 마무리 지었다.
결국 아픈 증세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 없이 의무실을 나와야 했다.
다음 날 저녁-
“아, 씨. 이게 어디 갔지?”
“뭔데? 뭐든 관물대에 있는 거 아니야?”
고철수는 관물대에서 무언가를 급히 찾고 있었다.
“내 이어폰 없어졌어. 여친이 사 준 건데.”
“너 여친 없잖아.”
“전 여친.”
“미친놈.”
“야, 성훈아?”
“이병! 김성훈.”
한참 이리저리 이어폰을 찾던 고철수는 여전히 몸이 안 좋아 가만히 자신의 자리에 있던 김성훈을 불렀다.
“너, 내 이어폰 못 봤냐?”
“못 봤습니다.”
“아까 빨래하기 전에 주머니에 없었어?”
“다 확인했는데 없었습니다.”
“그래? 이상하네…….”
뭔가 개운하지 않은 눈초리를 보이던 고철수는 빨래가 널려 있는 곳에서 자신의 옷가지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잠시 뒤 김성훈 앞으로 다가와 주먹을 펼쳤다.
“야! 너 이거 뭐냐?”
“……!”
당황한 김성훈은 고철수가 보여준 이어폰을 보며 잠시 할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 조금 아까 빨래를 돌릴 때 확실하게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몇 번을 확인했고 아무것도 없었다.
김성훈은 고철수가 자신에게 일부러 꼬투리를 잡기 위한 거라고 짐작했다.
“야, 이 새끼야. 이거 뭐냐고 묻잖아?”
“이어폰입니다.”
“이어폰인 거 누가 몰라? 확인했다며. 다 망가졌잖아.”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몇 번이나 정확하게 확인했습니다.”
“그럼 이게 어디서 나왔는데?”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 이 새끼 보소.”
김성훈이 모르는 게 당연했다.
고철수가 망가진 이어폰을 다 된 빨래 주머니에 몰래 넣어둔 것이기 때문이다.
“어이쿠! 우리 이병이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안 그래도 난감한데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박병덕까지 옆에서 거들었다.
“너, 이거 내 여친이 사 준 건데 어쩔 거야?”
“철수야 그거 좀 오바다. 전 여친이라며.”
“내 마음속에는 아직 현 여친이야. 헤어진 적 없다.”
“지랄한다.”
“야! 김성훈?”
“이병. 김성훈.”
“너, 내일인가? 아무튼 신병 휴가 나가지?”
“예, 그렇습니다.”
“내가 특별히 용서받을 방법을 알려 줄게. 너 휴가 갔다 오면서 이거 새 모델로 사 와.”
“…….”
고철수는 처음부터 망가진 이어폰을 넣어두고 김성훈에게 사 오라고 할 심사였다.
“왜? 대답이 없어? 야!”
“사, 사 오겠습니다.”
“띠꺼워? 띠껍냐고?”
“아닙니다. 사 오겠습니다.”
여기서 결백을 주장해 봤자 믿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김성훈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빨리 고철수가 원하는 답을 했다.
“그래. 네가 사 온다고 했으니까 그 마음 받을게. 고맙다. 성훈아.”
“아닙니다.”
그렇게 이어폰 사건이 일단락되고 오늘도 고단했던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잠시 뒤-
생활반 병사들이 핸드폰으로 하나같이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주고받을 때, 김성훈 역시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 잘 지내고 있지?
“어, 엄마. 나 잘 지내지?”
-며칠 만에 봐서 그런가 얼굴이 좀 핼쑥해진 거 같아.
그동안 고철수의 괴롭힘으로 얼굴에 작은 상처가 났던 김성훈은 일부러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영상통화를 하지 않았었다.
괜히 가족들에게 걱정을 안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꼭 가족들의 얼굴을 봐야 했다.
-우리 아들 힘들지?
-엄마 나도. 동생아 큰 누나다. 우리 동생 멋있다.
-아부지도 있어. 우리 막둥이 보고 싶다.
영상통화 화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보이는 이애숙 뒤로 가족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평생 따뜻한 사랑을 아낌없이 보내 주신 어머니.
무뚝뚝하지만 늘 큰 지지를 해 주시는 아버지.
언제나 동생을 믿어 주는 세 명의 소중한 누나들까지.
김성훈은 모든 가족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보고 또 봤다.
-성훈아, 어디 아픈 곳은 없지?
“그럼. 엄마 나 괜찮아.”
-이제 곧 우리 아들 얼굴 볼 수 있겠네?
“네, 내일 휴가 나가니까 볼 수 있어요.”
-동생아, 엄마가 너 보고 싶어서 매일 네 방 청소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몰라.
-그런 이야기를 뭐 하려고 해. 우리 아들, 엄마랑 아빠랑 누나들이 항상 응원하고 있어. 아들 사랑해.
“저도요. 이만 끊을게요.”
엄마인 이애숙의 진심이 가득 담긴 사랑해라는 말에 울컥한 김성훈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더 봤다가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몇 시간 뒤-
모두가 취침에 든 늦은 시간. 일부러 눈을 감고 있던 김성훈은 눈을 뜨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불침번을 서는 병사에게 목적지인 화장실을 말한 뒤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철컥-
화장실 가장 안쪽 칸에 들어온 김성훈은 조용히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팬티 안에 숨겨 놨던 종이와 볼펜을 꺼내 바닥에 무릎을 대고 변기 위에서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 서-
사랑하는 아버지, 엄마, 그리고 누나들께. 못난 아들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되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부족한 아들에게 항상 과분한 사랑을 주셨던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이를 물고 버텼으나 이제는 그럴 힘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김성훈이 쓰고 있던 건, 유서였다.
벌써 2주 가까이 몸도 안 좋은 그는 오랜 괴롭힘으로 정신까지 피폐해져 있는 상태였다.
군대가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누구나 가야 하는 곳이지만, 이렇게까지 지옥 같은 삶을 보낼 줄을 꿈에도 상상을 하지 못했다.
죽을힘을 다해 제대할 때까지 참을까도 숱하게 생각하고 늘 다짐했지만, 이제는 한계에 부딪혔다.
죽음으로 이 모든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그 길밖에는 답이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김성훈의 눈에서 떨어진 굵은 눈물이 종이 위에 뚝 하고 떨어졌다.
그동안 고철수와 박병덕에게 자신이 당했던 모든 괴롭힘을 쓰고 난 뒤 마치는 글을 썼다.
-부디 제 결정으로 가족들이 아파하질 않기를 바라며 다시는 군대 부조리 속 이런 악행이 이뤄지지 않기를 관심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엄마! 죄송합니다.’
속으로 부모님을 부르던 김성훈이 옷 속에 숨겨놨던 면도기를 꺼냈다.
면도기에서 분리한 날카로운 면도날을 빤히 쳐다보던 애처로운 눈빛에 결심이 들어차고, 왼쪽 손목에 날이 닿은 바로 그 순간,
똑똑-
별안간 노크 소리가 크게 울렸다. 집중하고 있던 김성훈에게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똑똑-
“안에 누구야? 이봐!”
굵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늘 당직 중인 최태식 대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