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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227화 (226/472)

227화. 수류탄을 줄줄이 달고

“우리 부대 병사가 아파서 왔는데 지금까지 아무 설명 없이 계속…….”

무관심하다고 오해하며 화가 난 최태식이 따지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보호자분, 저 환자 오늘 밤에도 죽을 수 있어요.”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 그의 입을 순식간에 닫아 버렸다.

“……!”

“그, 그게 무슨 말씀인지…….”

“말 그대로입니다. 죽을 수도 있어요.”

태경은 낮은 어조로 한 글자 한 글자씩 정확한 발음으로 최태식에게 말했다.

아무 감정 없이 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시켰다. 지금 예의나 감정의 소모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말한 것이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고, 욕을 하지도 않았지만 최태식은 1초도 안 되는 이 짧은 순간 바로 인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군인 간부다.

상황 파악이 되면 그에 합당한 태도와 행동을 하는 것을 매일같이 하는 직업인 군인이었다.

그렇기에 눈앞의 의사의 마른하늘 날벼락 같은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할 수 있었다.

“아. 네……. 저 친 보호자에게 그러니까 가족들에게 설명해야 할 정도입니까?”

한껏 날이 서 있던 최태식의 어조는 모든 상황 파악이 끝난 지금 동전 뒤집듯 공손해졌다.

“네, 연락되시거나 오시면 저 바꿔 주세요.”

“……알겠습니다.”

태경과 최태식의 분위기가 한층 더 무거워진 사이 이찬희에게 연락을 받은 최모나가 병동 일을 마치고 급하게 응급실로 들어와 있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각한 탓에 최모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파악 중이었다.

“야! 최 쌤, 봤냐?”

다른 환자를 보고 온 이찬희가 최모나에게 말을 걸며 옆으로 다가왔다.

“저 남자 포스 지렸는데 결국 선생님 기에 눌렸다. 역시 원장님이 최고네.”

“…….”

“근데 있잖아. 저기 말이야……. 이 와중에 이런 질문 해서 미안한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뭔데?”

“저기 그러니까…….”

이찬희는 최모나의 귀 가까이 다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멀대같이 키 큰 놈이 네 남친 맞아?”

“……!”

“아니, 궁금해서. 내가 너한테 뭐 관심이 있다거나 그런 게……”

“혈육이다. 이제 됐냐?”

“혈, 혈육! 저 멀대같이 키 큰 놈이 오빠? 아니면 동생?”

최모나는 트레이드마크인 시크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남기며 태경과 최태식 근처로 발길을 옮겼다.

“중환자실에 연락해서 환자 간다고 해 주시고요.”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최태식을 뒤로하고 태경은 급히 오더를 쏟아내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추가 오더 낸 것들 잊지 말고 확인해 주세요.”

“네, 원장님. 실례지만 제한 항생제 쓰는 것 맞나요?”

“맞아요.”

제한 항생제는 커버할 수 있는 균의 범위가 매우 넓어서 남발하여 내성이 생길 경우 대체약이 없는 항생제들이다.

따라서 배양 검사를 하고 결과를 보고 사용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환자가 살았을 때나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소용없었다.

태경의 머릿속은 지금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며 어떻게 하면 김성환을 살릴지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범람하고 있었다.

그 범람하는 의학적 지식 속에서 가장 옳고 중요한 것들을 빼내 환자를 살려야 했기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배양 검사도 나갈 거예요. 동맥혈 검사도 하고 실시간으로 혈압, EKG 등 full monitoring 해 주세요. 혈압이 떨어지면, 아니 환자 혈압 왔을 때 몇이었죠?”

“수축기 85였습니다.”

체온은 물어보나 마나였다. 분명히 높은 것이다.

“체온은 39.3입니다.”

역시나 태경의 예상대로였다.

“저 선생님 그……. 가족에게 병명은 뭐라고 말해 주면 되겠습니까?”

가만히 고민하는 듯하던 최태식이 태경에게 슬며시 다가가 물었다.

“패혈증입니다.”

“패혈증이요?”

“네, 환자분의 경우 전신으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패혈증이면 폐병입니까?”

“아닙니다. 그 폐가 아니라 부패하다 할 때 패입니다. 우선 자세한 상황은 가족들 오시면 말씀드리는 게 어떨까요? 그게 좋을 것 같은데…….”

“네, 그렇지만 저도 부대에 보고해야 해서요. 일단 저한테도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잠시 오시죠.”

태경은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CT 화면을 다시 켜서 최태식에게 설명하기로 했다. 화면에는 흑백으로 배 속을 나타내는 촬영이 보였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지만 무언가 되게 지저분해 보이는군요.”

설명을 듣기도 전에 짧은 시간 화면을 뚫어져라 본 최태식이 작은 말로 속삭였다.

“네, 정확히 봤습니다. 지금 환자분 배에 농이 가득 차 있어요. 시작은 바로 여기 이 부분입니다. 일반인들이 맹장염으로 알고 있는 충수염이 처음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맹장……. 아니 충수염은 그렇게 큰 병이 아니지 않습니까?”

“통상적으론 그렇죠. 하지만 이렇게 심해져서 터지게 되면 복막염이 되고 환자처럼 될 수 있는 겁니다. 흔한 병이지만 얼마든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으로, 제가 봐 왔던 환자 중 사망에 이른 분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 병사의 상태는 심각한 겁니까?”

“네, 심각합니다. 언제 큰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선 중환자실 가서 환자 치료를 할 거고 보호자들 오면 제가 추가 설명하겠습니다.”

“저, 제가 잘 모르지만 이렇게 심하면 바로 수술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최태식의 얼굴 위로 점점 더 근심이 짙어지고 있었다.

“수술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할 겁니다. 물론 환자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고려할 것들이 있습니다. 적절한 때라는 것이 아직 명확하지 않아서요. 자세한 거는 가족들에게 설명하겠습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사실 태경도 그때를 지금 확신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복부의 염증이 심하면 우선 강한 항생제로 염증을 완화하고 수술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수술도 더 용이하고 예후도 좋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항생제로 절대 조절될 수 없는 거라면 그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거는 CT로도 판단할 수가 없다.

이후의 환자 상태를 보며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순전히 모두 태경의 몫이었다.

벼랑 끝에서 자살과 탈영을 생각하며 우리병원에 도착한 김성훈은 전혀 예상 못 한 상황을 맞이하며 중환자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오빠……?”

태경과 대화를 끝나고 응급실을 나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최태식에게 최모나가 다가갔다.

“어, 모나야.”

“어떻게 된 거야?”

“신병인데 계속 배가 아프다고 했고, 의무실은 갔는데 내 생각으로는 군의관이 놓친 거 같다.”

“사실 군대에서는 그런 일이 간혹 있으니까. 그래도 어쩌다가…….”

“그 말은 내가 하고 싶네. 근데 여긴 진짜 원장님은 없어? 아까 그 의사 젊은 거 같던데? 괜찮은 거야? 왜, 너 환자에 대한 인식을 바꿔 줬다는 그 원장님은 안 계신 거야?”

가족이라 최모나의 성격을 최태식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집에서도 그렇지만 환자에게도 무뚝뚝한지라 의사로서 생활하는 데 괜찮은가 싶을 정도로 부모님은 종종 걱정하곤 했었다.

특히나 동생이 한때 병원을 자주 옮겼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본가에 다녀간 동생이 의사로서의 가치관을 바꾼 사람을 만났다는 말을 부모님께 했었다.

최태식은 그 말을 듣고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천하의 최모나를 변화시켰는지 궁금했다.

“그 원장님이 그렇게 실력도 좋다며. 이왕이면 그분께서 우리 병사를 좀 봐주셨으면 좋겠는데…….”

“지금까지 계속 원장님이 보고 계시잖아.”

“어디?”

“아까 그분이 우리 원장님이셔?”

“뭐? 아까 그 사람? 그렇게 젊은데?”

“젊은 거랑 원장이 무슨 상관이야. 오빠 내 말 잘 들어. 우리 선생님께 온 걸 다행으로 여겨. 저분, 인성도 실력도 다 진짜야. 그러니까 아까처럼 너무 틱틱거리지 말고.”

“……!”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거 보니까 진짜 아까 그분이 실력자구나 싶네.”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

“그렇다고 울 수는 없잖아. 내 부하는 아파서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정신 차려야지. 나도 지금 돌기 일보 직전이야.”

사실 지금 최태식은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신병이 아파서 죽을 수도 있다니 마음이 쉽게 진정되질 않았다.

“근데 우리 병사 진짜 심각한 거야?”

“심각해. 아까 선생님 설명 들었잖아.”

“나 같은 일반인은 그런 의학적인 설명 들어도 잘 모르니까 하는 소리지.”

“지금 그 병사 온몸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수류탄을 줄줄이 달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 이제 이해됐어?”

“하! 돌아 버리겠다.”

대번에 이해가 된 최태식은 모자를 벗으며 깊은 한숨을 내리 쉬었다.

“젠장! 가뜩이나 저 이병이 내일 첫 휴가인데 가족들한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싶다.”

“그래도 말씀드려야지. 그게 오빠의 일이잖아.”

“그렇지. 그래야지.”

“놀라지 않게 잘 말씀드려.”

최모나는 고민하는 최태식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응급실로 들어갔다.

한 시간 뒤-

태경은 다 식은 치킨 조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진료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사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야식인데 김성훈 때문에 입에 대지도 못했다.

지금 머릿속에는 아주 심각한 고민 중이라 고소한 기름 냄새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김성훈의 다섯 번째 바이탈 냄새가 코끝에서 맴도는 것만 같았다.

“그냥 열어야 하나…….”

들고 있던 치킨을 내려놓고 의자 뒤로 고개를 넘기며 고민하던 그때, 책상 위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Rrrrrrrrr

“네. 김태경입니다.”

-원장님, 전데요. 그 충수염으로 천공 환자요. 의식이 처지고 있어요.

‘이런! 시x!’

태경은 임정숙 간호사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욕지거리가 절로 올라왔다.

이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연다.’

아니, 반드시 열어야 한다. 여기서 더 기다리다가는 환자가 죽을 수도 있었다.

“지금 수술방 연락하고 환자 바로 올려 주세요. 수혈해야 할 거니까 피 4팩 정도 구비해 두라고 하고요.”

-지금요? 우선 항생제 쓰시고 보시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시간이 없어요. 그냥 바로 올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태경은 지체 없이 바로 수술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지잉-

수술방으로 들어가는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답답하네.’

김성훈은 아까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고 CT 촬영을 했다.

그 때문에 조영 증강이 되지 않은 CT로 알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라 예측이 불가했다.

CT상으로는 충수염 말고 다른 소견은 없었으나 비조영이라 얼마든지 다른 병변이 있을 수도 있었다.

현재 아무런 정보도 없이 적진에 뛰어는 딱 그런 꼴이었다.

“원장님, 복강경으로 하시나요?”

수술복을 입고 있는 태경에게 간호사가 물었다.

“네, 우선 시도해 볼게요. 근데 개복할 가능성이 높아요.”

“네.”

“정 선생님, 마취는요?”

“마취 끝났습니다. 시작하셔도 됩니다.”

의진의 주도 아래 이미 마취가 끝난 뒤였다.

“자! 수술 시작합니다.”

수술 시작을 알린 태경이 복강경하기 위해 배에 도구를 이용하며 1cm 정도 되는 구멍을 뚫은 그때였다.

“윽!”

“어후!”

수술방에 모인 의료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인상을 찌푸리며 미간을 좁혔다.

“휴! 냄새 참…….”

정말이지 엄청나게 지독한 악취였다.

정말 고여서 썩고 썩은 그런 냄새 같았다. 정확히는 썩은 농의 냄새였다.

이런 악취 속에서 오직 태경만이 평온한 표정으로 구멍을 뚫던 기구를 보고 있었다.

‘개복이다.’

도구를 통해서 복강 내의 농들이 나오고 있었다. 끈덕지고 지독한 냄새를 동반한 농이었다.

“복강경 안 되겠네요. 배 열게요. 메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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