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31화 (230/472)

231화. 유서의 행방

철컥-

김 여사가 진료실로 나가고 태경의 시선이 손에 들린 종이로 향했다.

맨 윗줄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갈수록 태경의 동공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도 또래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사실 군대 입대하는 것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가야 하는 군대였기에 마음속 가득했던 두려움을 내려놓고 용기를 내어 입대하였습니다.

특별할 것 없이 무던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며 저의 군 생활도 다른 병사들처럼 하루하루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대를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제 군 생활이 한순간에 확 달라졌습니다. 정확히는 저의 맞선임들이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1, 2021년 11월 xx일 장소xx

PX 데려가 큰 생수를 한 번에 다 마시게 강요했다. 내가 마시지 못하면 귀를 잡아당기고 머리를 때리며 성공할 때까지 시켰다.

2. 12월 xx일 장소xx

다른 병사들이 자리를 비우면 나에게 상체 탈의를 시켜 인간 다트판을 만들었다. 볼펜과 연필이나 종이를 날카롭게 접어서 나의 젖x지에 맞추는 게임이었다.

맞선임들은 내가 창피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걸 즐기면서 지들끼리 웃고 떠들었다.

잘못하다가 모르고 피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젖xx를 비틀고 꼬집기도 했다. 그리고 볼펜 심지가 날아오는 날에는 당연히 상처가 생겼다.

3. 12월 xx일 장소 xx

어느 날은 텔레파시라는 게임을 만들어 자신들이 생각하는 단어는 무조건 맞혀야 했다.

그 단어들이란 그들의 전 여친이나 지인들의 이름으로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맞출 수 없는 단어였다.

그렇게 틀리는 날에는 생활반 다른 병사들이 올 때까지 나를 가운데 두고 서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바닥으로 툭툭 치고 신체적으로 민감한 곳도 건드렸다.

또한 두 사람은 나에게 정신적으로 참기 힘든 심한 폭언과 협박을 일삼았다.

고철수와 박병덕 두 사람은 사람의 탈을 쓴 악마 그 자체였습니다.

그 자식들을 죽여 버리고 싶지만, 솔직히 전 두렵습니다. 그래서 내가 없어지는 길을 택했습니다.

……

김성훈은 지금까지 고철수와 박병덕이 자신을 괴롭힌 장소와 날짜를 구체적으로 유서에 남겼다.

그 내용은 무려 1번부터 50번까지 쭉 이어졌으며, 읽을수록 도무지 믿기 힘든 내용뿐이었다.

“……!”

김성훈의 유서를 전부 읽은 태경은 머릿속에는 경악이라는 단어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종이를 잡은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마치 글만 읽고 있었을 뿐인데 본인이 괴롭힘을 당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만 같았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것만 같았다. 가끔가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군대 괴롭힘 사건들을 접하긴 했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이럴 순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었다.

“이런 짐승만도 못한 개새끼들 같으니라고.”

태경의 입에서 험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하! 미친놈들.”

유서를 읽고 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김성훈을 처음 봤을 때 그의 표정이 왜 그랬는지가 이해됐다.

단순히 아픈 사람의 표정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통증과 고통에 민감하다. 아무리 잘 참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그 한계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까 응급실에서 김성훈의 표정은 뭐랄까, 이미 모든 걸 초연한 듯한 표정과 함께 눈빛에는 공허함이 가득했다.

태경은 지금까지 자살을 결심한 환자나 실제로 자살로 인해 몸이 다친 사람을 많이 봤었다.

그 환자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니 김성훈의 표정과 똑같았다. 말 그대로 삶을 포기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이럴 게 아니야.”

찰칵-

태경은 핸드폰으로 김성훈의 유서를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연락처에서 최태식 대위의 번호를 찾았다.

당장 그에게 전송할 생각이었다.

“어! 없나?”

그런데 핸드폰에 최태식의 번호가 없자 그제야 최 팀장에게 번호를 받아 달라는 말이 생각났다.

드르륵-

급하게 의자에서 일어난 태경은 당장이라도 어떻게 할 기세로 진료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

그런데 문고리를 잡던 그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이게 맞나?”

얼어붙은 고드름처럼 제자리에 서서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그가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건 아니야……. 이러면 결국 달라지는 건 없어.”

혼잣말하던 태경은 유서를 책상 서랍에 둔 채 진료실을 나가 환자를 보는 일에 열중했다.

뭐가 김성훈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 일인지 생각이 필요했다.

다음 날-

유서를 발견한 태경은 여전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지 못한 채 병원을 찾은 최태식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원장님?”

“안녕하세요. 대위님. 부대 일에 병원까지 왔다 갔다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네요.”

“별말씀을요. 진짜 고생은 김성훈 이병이죠.”

“그렇네요. 아! 혹시 김성훈 환자 관련해서는 부대에서 별다른 일은 없나요?”

“…….”

“아무래도 부대 일이라 함부로 말씀하시기 곤란할 텐데 제가 실례를 했네요.”

“원칙상은 그렇죠.”

“예?”

“원칙상은 그런데 원장님께 이 일 관련해서 물어볼 것도 있고 하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여러 방면으로 열어 두고 알아보고 있는데 아직 성과는 없네요. 제 생각에는 김 이병이 깨어나야지 일에 진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네요. 근데, 저한테 물어볼 말은 뭐죠?”

“저……. 혹시 김 이병 몸에 구타 흔적 같은 게 없었나요?”

“구타나 괴롭힘을 의심하고 계신 건가요?”

“아무래도 그쪽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그전에 뭐 하나만 질문하고 대위님의 답을 들은 다음에 제가 답을 해도 될까요?”

최태식의 질문을 받은 태경은 답을 하기는커녕 반대로 질문을 던졌다.

“물론입니다. 물어보세요.”

“대위님은 중환자실로 들어가서 면회를 할 수도 없는데 왜 병원에 오시는 건가요?”

아직 김성훈의 의식이 깨어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최태식은 출근 전에 한 번, 퇴근 후에도 한 번, 하루에 두 번씩 병원을 찾아왔다.

“솔직히 말하면 성훈이한테 미안해서요.”

“미안하다고요? 대위님께서요?”

“네. 뻔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간부로서 부대 병사들을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이렇게라도 병원에 와서 의료진에게 성훈이 소식을 직접 듣는 게 마음이 편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진짜 그랬다. 김성훈 가족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것도 부대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려고 그런 것도 아니었다.

최태식은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에 병원을 찾고 있었다.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잠깐 시간 되시면 저 좀 따라오시죠.”

“네?”

“잠깐이면 됩니다.”

철컥-

태경은 최태식과 함께 진료실로 향했다.

“조금 전에 김성훈 환자 몸에 이상한 점이 없는지 물으셨죠?”

“네, 그렇습니다.”

“실은 상체 부위에 이상한 상처가 있습니다.”

“상처요?”

“네, 그리고 그 상처는 김성훈 환자가 군대 내부에서 괴롭힘을 당해서 생긴 상처라는 걸 알게 됐죠.”

“괴롭힘이요? 근데 그걸 원장님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거요?”

최태식 눈앞에 웬 종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태경이 전날, 유서를 보자마자 연락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확인이 필요해서였다.

어느 집단을 가도 상식을 벗어나는 인간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김성훈한테는 이 일이 목숨을 버릴 만큼 중요한 일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막말로 군대 높은 간부가 외부로 퍼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허무할 정도로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어이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된다면 김성훈의 억울함이 풀어질 길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최태식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확인을 한 것이다.

물론 간단한 질문 하나만으로 믿을 만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건 섣부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최태식이 불의를 덮을 만한 사람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태경은 자신의 감을 믿고 그를 믿기로 했다.

“이게 뭡니까?”

“유서요.”

“네? 유, 유서요? 누구… 설마?”

“그 설마가 맞아요. 김성훈 환자의 유서입니다.”

최태식은 태경이 건넨 종이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말 그대로 유서였고, 그 안에 내용은 태경이 처음 읽고 느꼈던 그 감정 그대로 최태식도 똑같이 느꼈다.

게다가 맞선임인 고철수와 박병덕에게 괴롭힘에 관해 물어봤을 때 아니라고 했던 둘의 표정이 생각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천하의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대위님 실례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하! 일단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인 김성훈 이병에게 상황을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 뒤 부대 보고도 하고 절차에 따라 조사가 이뤄질 겁니다.”

“결국 김성훈 환자가 자신이 당한 일들을 밝혀 줘야 한다는 말이군요.”

“네, 힘들겠지만, 그게 문제 해결의 시작이니까 그렇습니다. 일단 김 이병 의식이 돌아온다면 직접 확인을 해 볼 생각입니다.”

“만약 김성훈 환자가 아니라고, 그런 일 없다고 한다면 어쩔 생각입니까?”

“예?”

생각지 못한 질문에 최태식은 잠시 머뭇머뭇하다 말을 이었다.

“본인이 직접 적은 확실한 증거들이 있는데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태식 대위님?”

“네. 원장님.”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이요? 아, 네. 말씀하세요.”

태경은 차분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맞은편에서 말을 듣고 있는 최태식은 이따금 격하게 놀라기도 하고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태경의 언행은 변함이 없었고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진지하게 전달했다.

“제 말대로 김성훈 환자가 그렇게 나온다면 그땐 제 부탁 들어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하! 알겠습니다. 대신, 원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런 반응이 나왔을 때만입니다.”

“그럼요. 물론입니다.”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바로 반응을 할 거예요. 김성훈 이병이.”

“그럴 수도 있죠. 사실 저도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심각한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합의점을 찾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최태식은 군대 가혹행위와 관련해서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김성훈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 * *

3일 뒤-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은 김성훈은 하루가 지날수록 상태가 좋아졌다. 수술 바로 다음 날은 산소 호흡기를 떼고 승압제도 끓었다.

그리고 혈압과 염증 수치가 정상화됐다.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김성환의 의식이 돌아왔다.

“…….”

의식이 돌아오고 눈을 뜬 김성환은 눈앞에 불빛을 보면 찰나의 순간 생각했다.

‘나 죽은 건가?’

정말 죽은 건가 싶은 생각에 머릿속 ‘다행이다’라는 단어와 마음속 안도감이 떠오를 즈음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분?”

“김성환 환자분?”

베드 옆에서 의식을 차린 김성훈에게 간호사가 말을 걸고 있었다.

“환자분 여기 어딘지 기억나세요?”

“병원……이요.”

겉으로 대답을 한 김성훈은 속으로 ‘젠장’이라는 단어를 삼켰다.

살기를 바란 적 없이 편하게 죽고 싶었는데,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수술 잘되셨고 그동안 혈압이랑 염증 수치 때문에 의식이 없었어요. 지금 경과도 좋으니까 이대로 잘 회복하시면 될 거예요.”

간호사의 친절한 설명이 계속 이어가던 그때 별안간 김성훈의 머릿속에 ‘유서’의 행방이 떠올랐다.

“저기 선생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