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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237화 (236/472)

237화. 쪽팔려 진짜

최태식은 김성훈의 씩씩한 인사를 받으며 병실을 나왔다.

직업군인으로 살면서 지금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뿌듯한 하루였던 것 같다.

“잘 해결돼서 다행입니다.”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계단으로 내려오는 최태식을 향해 태경이 다가갔다.

“아!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네, 대위님. 안녕하세요.”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성훈이 일이 잘돼서 좋네요.”

“네, 잘된 것 같습니다.”

“대위님께서 고생이 많으셨네요.”

“고생은 성훈이랑 원장님이 하셨죠. 그리고 일전에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대위님이 갑자기 죄송할 게 뭐가 있나요?”

“첫날 제가 좀 무례한 게 군 거 같아서요.”

최태식은 처음 김성훈과 병원을 왔을 때 태경에게 날카롭게 굴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게 죄송할 일인가요. 보호자 입장에서 당연한 거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아까 제가 김성훈 이병에게 물어보니까 선생님 덕분에 용기를 냈다고 하던데 성훈이의 마음을 어떻게 돌리신 건지 궁금합니다.”

도대체 김성훈에게 태경이 어떤 말을 했길래 사람의 의지가 저렇게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아! 그거요? 생각보다 별거 없고 간단한 건데…….”

“간단한 거요?”

“네, 그냥 성훈이의 이야기를 들어 줬을 뿐입니다.”

“예?! 그게 다입니까?”

“네, 정말 아무것도 아니죠?”

진짜 싱거울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답변이었다.

“근데 또 그게 생각보다 큰 거라고 할 수도 있거든요. 성훈이는 지치고 힘든 마음을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고 또 들어 주길 바랐을 거예요.

대위님도 부대에서 병사들을 관리하시니까 아시겠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때론 그게 큰 힘이 될 수도 있잖아요.”

태경의 이야기를 듣던 최태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지금까지 수많은 환자를 만나면서 느낀 건, 사람에게 있어서 위로와 공감만큼 큰 힘을 발휘하는 게 없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가끔 부대원들을 상담할 때 뭔가 대단한 해결책을 제시해 준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 준 것만으로도 다음 날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당연하게 잊고 있던 걸 태경의 한마디로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네요. 원장님 말씀이 맞네요. 좋은 말씀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아! 맞다. 하나 더 있네요.”

“하나 더요? 뭔데요?”

“고름을 터트려 준 거요.”

“고름이요? 수술한 거 말고 몸에 고름이 더 있었나요?”

“그럼요. 아주 큰 고름이 있었죠. 그럼, 전 이만 환자 때문에 가 보겠습니다.”

한창 이야기를 하던 중 태경은 병동에서 온 전화를 받고 걸음을 옮겼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원장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최태식과 인사를 나눈 뒤, 태경은 콜을 받은 환자를 살피고 김성훈의 병실에 들렀다.

“선생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저도요. 우리 성훈이 살려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김성훈의 현재 상태에 대해 전달한 뒤 가족 모두는 돌아가면서 태경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별말씀을요. 그럼 말씀 나누세요. 저는 다음 회진 때 또 들르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가족들이 매우 고마워하자 태경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병실을 나왔다.

철컥-

“선생님!”

태경이 병실을 나오자마자 김성훈이 곧장 따라 나와 불렀다.

“어, 성훈아 왜 나왔어?”

“그게 선생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어디 불편한 곳 있어? 수술한 곳이 아프니?”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가족들이 있어서 말씀을 드리기 뭐해서요.”

“뭔데?”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성훈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아니었다면 저 아직도 못난 마음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을 거예요. 선생님 덕분에 용기를 내고 저도 달라지고 부대 일도 잘 처리된 거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운데…….”

태경은 흐뭇한 표정으로 김성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할 상대는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이야.”

“네?”

“모든 사람이 너처럼 달라지지는 않아. 내 이야기를 들어 준 것도 너의 이야기를 한 것도, 그리고 달라지겠다고 마음먹은 것까지. 모든 용기를 낸 건 성훈이 너 자신이라고.

그거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두고두고 살면서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해 줘. 그리고 힘든 일 있을 때마다 이번 일을 생각하면서 무너지지 말고 씩씩하게 일어나.”

태경의 이야기를 들은 김성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선생님, 그런데요 혹시 평소에 무슨 명언집 읽으세요?”

“뭐?”

“아니, 하는 말씀마다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라니까요.”

“그거! 그게 내가 원래 사람 자체가 명품이라 그래. 얼굴에 마음이 딱 보이잖아. 안 그래?”

“글쎄요. 그건 아직 잘…….”

“뭐야? 장난치는 거 보니까 이제 괜찮은가 보다. 가족들 기다리겠다. 얼른 들어가 봐.”

“네, 또 뵐게요.”

처음 왔을 때는 당장에라도 말라죽을 꽃처럼 생기 없던 김성훈은 생기 가득한 웃는 얼굴로 병실로 들어갔다.

“몸도 마음도 덧나지 않아서 다행이네. 하! 잘됐다.”

뿌듯한 얼굴로 혼잣말하던 태경은 다음 환자에게 향했다.

* * *

태경이 김성훈과 대화를 하고 있던 사이 최태식은 최모나를 만났다.

“오빠?”

“어! 왔어.”

“일을 잘 마무리된 거야?”

“응. 그건 그런데……. 야! 모나야?”

“왜.”

“성훈이 수술 잘된 거 아니야?”

“응. 잘됐지. 수술실에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거짓말이 아니라 조금만 수술 늦게 들어갔으면 결과를 장담 못할 정도였어.”

“근데 수술하고 나서 몸에 무슨 큰 고름이 있었어?”

최태식은 태경이 했던 큰 고름이라는 아리송한 말이 이해가 가지 않자 최모나에게 물어봤다.

“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런 거 없는데?”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 원장님 좀 특이한 사람인 거 같아.”

“하긴,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정말 배울 점도 많고 좋은 분이야.”

“그래 그 말은 나도 인정한다. 천하의 똥고집에 남의 말은 잘 듣지 않던 내 동생이 이 정도로 변했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시네. 인정!”

“됐거든요!”

“안 그래도 어제 어머니랑 통화했는데 모나 너 밝아진 거 같다고 좋아하시더라.”

“뭐래. 나 원래 밝았거든.”

“그건 아니야. 아무튼 오빠가 보기에는 이제 딱 하나만 충족되면 될 거 같은데…….”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얼른 가 봐.”

“거기, 이봐! 자네?”

최모나의 말을 듣고 있던 최태식은 별안간 누군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저, 저……저요?”

“그래. 맞아. 일로 와 봐.”

“뭐야, 오빠 우리 병원에 아는 사람 있어.”

“아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 같은 사람이라고 할까?”

“뭐라는 거야. 누구?”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돌린 최모나는 순간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최태식이 콕 집어 부른 사람은 다름이 아닌 이찬희였기 때문이다.

“저, 저 말인가요?”

“그래, 맞아.”

절대 오지 말라는 최모나의 도리질을 보지 못한 이찬희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최태식 앞으로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이찬희는 뭔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멋쩍게 인사를 날렸다.

“반가워. 자네…….”

“왜 이래? 오빠, 허파에 바람 들었어?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아! 그렇지.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전 최 선생 동료 이찬희라고 합니다.”

“그래요. 이찬희 선생님. 반가워요. 그건 그렇고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예,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그러니까 이찬희 선생님과 우리 모나가 사귀는…….”

“야! 최태식!”

최모나는 이찬희와 사귀느냐고 묻는 오빠의 말에 재빨리 손바닥을 펼쳤다.

“윽!”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과 함께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던 최태식은 등짝 스매싱을 맞고 입을 닫아야 했다.

“진짜 왜 그래? 어? 아으! 쪽팔려 진짜.”

“아니, 나는 그냥 궁금해서 그랬지.”

“이 선생? 나 좋아해?”

“어! 아, 아니. 당연히 아니지. 내가 최 선생을 왜 좋아해.”

“그러니까. 나도 이 선생 안 좋아하거든. 봐! 됐지? 오빠 너 그만 가라.”

“…….”

“뭘 보고 서 있어? 가라니까?”

“어. 그래. 이 오빠는 이만 갈게. 그럼 이 선생님 우리 나중에 또 봅시다.”

길길이 날뛰며 눈으로 쌍욕을 하는 최모나를 본 최태식은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급히 병원을 나갔다.

“예, 안녕히 가세요.”

“뭘 안녕히 가세요야?”

“아니, 가신다니까 인사한 거잖아. 내 친구 개모나 오늘 상당히 까칠하네.”

“됐고! 선생님 병동 가셨는데 넌 응급실을 왜 비우고 나왔어? 얼른 들어가자.”

“지금 환자 괜찮거든?”

“나 먼저 들어간다.”

“후! 뭐야 저런 귀여운 면도 있……!”

잔뜩 성이 난 최모나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하던 이찬희는 순간 자신이 내뱉을 말에 경기를 떨었다.

“뭐야!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미쳤어? 미친 게 분명해. 하! 빨리 여자 만나야겠다. 어우. 소름 끼쳐.”

“뭘 그렇게 혼자 구시렁거리고 있어?”

“아! 깜짝아.”

그사이 병동에 갔다 내려온 태경이 이찬희의 어깨를 툭 치며 다가왔다.

“선생님 왜 이렇게 빨리 내려오세요? 회진 가신 거 아니었어요?”

“아니, 201호 들렀다가 김성훈 환자 좀 보고 오는 길이야. 근데 뭐가 소름이 끼쳤다는 거야?”

“저요. 제 모습에 순간 놀라서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뭔 소리야? 그리고 그게 하루 이틀 일인가? 나도 가끔 너 보면 소름 끼칠 때 있어.”

“농담 아니에요. 그보다 선생님, 그럴 때 있으세요?”

“뭐가?”

이찬희는 정수기로 향하는 태경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말을 붙였다.

“그 뭐랄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나도 모르게 겉으로 툭 하고 튀어나올 때요. 뭔가 스스로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고 어이없는 뭐 그런 기분이랄까요?”

“뭐긴, 뭐야. 그냥 평소 그렇게 생각했던 내 속마음이 튀어나온 거지.”

“속마음이요?”

“보통 그러지 않아? 왜?”

“예? 설마요! 그건 아니에요.”

“누구한테 속마음이라도 들켰어?”

“들키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럼 아닌가 보지. 시답잖은 소리 그만하고 얼른 들어가 환자 봐.”

“네, 알겠습니다.”

이찬희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래 요즘 일이 빡세서 그런 거야. 정신 차려라 이찬희.”

“이 선생? 9번 베드 환자 결과 나왔다.”

“예, 선생님. 바로 갑니다.”

응급실에 모인 태경과 이찬희, 최모나는 다시 환자들을 살피며 바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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