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43화 (242/472)

243화. 김철기의 밑그림

oo 요양 병원.

“커피 좀 드릴까요? 아니면 음료수도 있어요.”

민기 인형을 업고 있는 이옥빈이 김철기를 찾아온 손님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는 커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커피요? 네. 당신도 커피 한잔하실 거죠?”

“좋지.”

“그럼 말씀 나누고 계세요.”

“고마워.”

치매를 앓고 있는 이옥빈이 커피를 가져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김철기는 늘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게 누가 그룹 김 회장 측에서 보낸 내용이라는 건가?”

“네, 선생님.”

오늘 김철기를 찾아온 손님은 오랫동안 그의 일을 봐 주고 있는 변호사였다.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도맡아 일을 봐 주고 있는 박 변호사는 김철기에게는 거의 비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가 서울 사무실에서 모처럼 이곳까지 김철기를 만나러 온 것은 누가 그룹의 김건형 회장 때문이었다.

예전에 고계득과 태경이 학회에서 한바탕하던 날이었다.

‘뿌리칠 수 없는 조건이요?’

‘그래. 환자에 대한 진료와 수술 수가의 압박도 없고 원하는 연구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전폭적인 지원에 정년 보장까지 확실하지. 게다가 말도 안 되는 금액의 엄청난 연봉까지 제시한다면 말일세. 그래도 거절하겠나?’

‘네, 그래도 거절하겠습니다.’

김건형은 태경에게 좋은 조건까지 말하며 자신한테 오라고 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을 당했다.

하지만 태생이 타고난 사업가인 그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측근인 고 팀장에게 우리병원 원장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 뒤 고 팀장은 김철기와 직접 연락을 할 수는 없었지만, 박 변호사의 연락처를 알아냈고 김건형의 뜻을 전했다.

“병원 인수에 관한 내용이군.”

“그렇습니다. 단순히 병원 인수뿐만이 아니라 김태경 원장을 비롯한 직원 전원까지 전체적으로 인수를 원한다는 내용입니다.”

“굉장히 파격적이네.”

“거기 두 번째 문서를 보시겠어요?”

“우리병원 자리가 황금 자리이기 때문에 여러 방면으로 병원을 키울 수 있으며, 그에 따른 수익 창출도 긍정적이라는 전문가의 분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그룹에서는……. 훗!”

김철기는 박 변호사가 알려 준 내용을 소리 내어 읽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거, 이거……. 이 양반이 아주 단단히 작정한 모양이야. 이래서 사업가는 조심해야 해.”

“선생님, 누가 들으면 생판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겠습니다. 반갑지 않으세요?”

“무슨 소리야?”

“김건형 회장님이요. 선생님 동생분이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렇다. 누가 그룹 김건형이 그토록 찾고 또 찾았던 친형이 바로 김철기였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답하시는 거 아닙니까?”

“내가 그래 보이나?”

“네. 늘 평온하게 웃고만 계시니 선생님 속을 알 수가 없습니다.”

“웃으면 복이라도 오지. 각박한 세상 찡그리면 뭐 하겠나?”

“맞습니다.”

사실 김철기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박 변호사에게 동생 김건형 측에서 연락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생각보다 꽤 놀랐었다.

예전에도 동생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일부러 더 꼭꼭 숨었었다.

그 당시에는 아내와의 일도 그렇고 그 누구라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렇다고 동생을 안 볼 생각은 아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형제인데 아예 등을 돌린 건 아니었다.

좀 더 때가 되면 만나려고 했는데 병원 일로 이렇게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보고 싶지 않으세요?”

“나야 건형이를 늘 보긴 보지.”

“미디어 통해서 말고요. 실제로요.”

“보고 싶은데 또 내 마음대로 훌쩍 떠나가 놓고……. 근데 박 변호사 자네 많이 능글맞아졌어.”

“제가요?”

“일 얘기 중에 개인적인 일 꺼낸 적 없는 사람이 오늘은 왜 이렇게 사족이 길어?”

“죄송합니다. 저도 늙었나 봅니다.”

김철기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박 변호사도 두 사람이 하루빨리 만나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아주 작정을 하고 말한 것도 있었다.

“사족은 이만하고, 그러니까 결국 누가 그룹에서 눈독을 들이는 건 병원이라기보다는 김태경 원장이라는 거네.”

“그렇죠. 김 회장님이 김태경 원장을 엄청 마음에 들어 한 것 같습니다. 이런 거 보면 두 분이 형제는 형제십니다.”

“누가 봐도 마음에 들 만한 인재니까 그렇지.”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그 친구를 그저 우리 병원 원장이나 하라고 데리고 온 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일단 김 회장 측에는 천천히 검토하고 연락을 하겠다고 전해. 우리로서는 급할 게 전혀 없어.”

“알겠습니다.”

“우선 김 원장이랑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어.”

김철기는 김건형이 보낸 문서를 보면서 태경을 떠올렸다.

“박 변호사, 자네 차 좀 얻어 타야겠어.”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한 번 마음 먹으면 행동력이 강한 김철기는 부인 이옥빈을 장득칠 모친에게 부탁한 뒤 서울로 향했다.

몇 시간 뒤-

김철기는 우리병원 마당 벤치에서 태경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제가 맛있는 식사 대접해드리려고 했는데요.”

두 사람은 병원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나온 뒤였다.

“오 여사 손맛이 가장 맛있는데 어딜 가.”

“여사님이 음식 솜씨가 좋긴 하죠. 사모님은 잘 지내시죠? 선생님도 건강하시고요?”

“그럼, 나랑 와이프는 잘 지내고 있지. 그건 그렇고 내가 자네에게 참 고마워.”

“무슨 말씀이세요. 감사해야 할 사람은 전데요.”

“병원 운영이라는 게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거든. 근데 지금까지 이렇게 잘해 주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선생님 덕분입니다.”

“무슨 소리. 그건 아니지. 빈껍데기를 맡겼는데 자네가 잘해 준 덕분이야. 김 원장?”

“네, 선생님.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태경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김철기가 은근 걱정됐다.

“일은 무슨, 그런 거 없어. 그보다 자네는 지금 어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병원 말이야. 이 병원이 나한테는 자식 같은 존재야. 부모는 자식이 잘 커 주길 바라거든. 김 원장 자네가 키워 주겠나?”

“네?”

“아까 최 팀장이 그러는데 이 인근에 외상 센터랑 암 센터 이야기가 오고 간다지.”

“……!”

김철기의 이야기를 들은 태경은 잠시 움찔했다.

외상 센터와 암 센터.

사실 태경이 트리플 보드를 취득한 것도 언젠가 외상 센터나 암 센터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이유도 있었다.

특히 긴급한 환자들의 생명을 다루는 외상 센터에 관심이 많았다.

심각한 외상으로 생명이 위급한 사람들을 다루며 사고로 인한 큰 부상과 총상, 몸에 자상을 입을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

그게 외상 센터였다.

며칠 전에도 최 팀장과 외상 센터 문서를 받고 둘이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계속 말이 나오더니 이쪽 지역에 외상 센터를 추진하긴 할 건가 봐요.’

‘그래요? 잘됐네요.’

‘이게 정부에서 지원금도 어마어마하게 나온다죠?’

‘네, 금액이 상당히 나올 거예요.’

‘원장님, 우리도 신청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신청하려면 중축해서 병상 확보하고 의료진도 충당해야 하고 지금 상태로는 어림도 없어요.’

‘하긴! 그렇죠.’

외상 센터는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에 맞는 시설과 인원이 있어야 했는데, 지금 우리병원 현실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보통 한 센터당 40에서 50개의 전용 병상이 있어야 하고 전문 의료진과 간호사로 팀을 꾸린다. 그리고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면 바로 응급 수술과 치료가 가능한 시설과 장비도 갖춰 있어야 했다.

그 모든 준비가 가능해야 비로소 외상 센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락도 없이 찾아온 김철기가 외상 센터와 암 센터를 논의하니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저, 선생님. 그렇지만 우리병원으로는 외상 센터나 암 센터를 할 수는 없습니다.”

“흠!”

김철기는 어리둥절한 태경의 표정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가 꿈을 꾸면 밑그림은 내가 그려 줄게.”

“…….”

“그 모든 것들이 충족된다면?”

“예?”

“김 원장도 알겠지만, 우리 병원이 자리가 좋아. 여기에 외상 센터든지 암 센터든지 들어서면 지역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여러모로 좋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내가 방금도 말했다시피 건물이 올라서고 병상 확보에 의료진이 충원될 수 있다면 자네는 할 의향이 있는 건가?”

“그게 가능한 겁니까?”

“가능할지 안 할지는 두고 봐야겠지. 그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김 원장의 마음이야. 외상 센터든 암 센터든 보통 일은 아니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갑작스럽습니다.”

“그렇지? 내가 너무 갑자기 찾아와서 큰 주제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긴 했네. 김 원장, 내가 시간을 줄 테니까 한 번 천천히 생각해 봐.”

오래전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외상 센터와 암 센터는 지금 우리병원과는 다른 운영이 필요했고 여러모로 신경을 쓸 것도 많았다.

게다가 분명 김철기의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 태경은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일단은 이거저거 고민하지 말고 진지하게 시간을 두고 한 번 생각해 봐.”

“네, 알겠습니다.”

그 뒤 태경은 김철기와 업무적인 이야기가 아닌 개인적인 대화를 하다가 다시 요양 병원으로 내려갔다.

* * *

미국 볼티모어-

이곳에는 세계 최고라 손꼽히는 유명한 병원이 하나 있다.

바로 존스 홉킨스 병원이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환자가 치료와 수술을 받는 이곳에 중동계 남자가 누군가를 찾아왔다.

똑똑-

익숙한 발걸음을 옮긴 그는 사무실 앞에서 노크했다.

“네, 들어오세요.”

철컥-

“하마드? 어서 와.”

사무실로 들어온 하마드를 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남자는 존스 홉킨스 병리학 교수 리처드였다.

“이거 바쁜 사람인데 내가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

“별소리를 다하네. 그나저나 자네 괜찮은 거야?”

“뭐, 보는 그대로야. 생각보다 덤덤해. 요즘 암이 죽을병은 아니잖아.”

하마드가 존스 홉킨스에서 일하고 있는 리처드를 찾아온 이유는 자신의 병 때문이었다. 그는 얼마 전, 위암을 진단받았다.

그와 관련해 의사인 친구에게 조언을 얻고자 병원을 찾았다.

“컨디션은 좀 괜찮고?”

“막 아프거나 그런 것도 없고 생각보다 괜찮아. 그보다 내가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자네 병원에서 받으면 어떨까 싶어서 찾아왔어.”

“우리 병원?”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자네도 위암 수술받았잖아. 재발도 없고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면 자네 수술한 의사가 수술을 잘한 거라고 생각해.”

리처드는 몇 년 전에 위암 수술을 받은 이력이 있었다.

하마드는 수술 후 병원 일도 다시 하고 건강을 되찾은 리처드를 보며 담당의를 소개받고 싶었다.

다른 것보다 최고의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가 믿고 수술을 받았으니, 실력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싶다 이 말이지?”

“맞아. 자네가 소개 좀 해 줘.”

“근데 나 우리 병원에서 수술하지 않았어.”

“뭐? 존스 홉킨스에서 수술하지 않았다고? 여기가 최고잖아.”

“엄밀히 말하면 분야별로 잘하는 게 다른 거지. 아무튼 난 우리 병원에서 수술받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했어.”

“다른 나라?”

“뭐, 혹시 독일인가?”

“아니.”

“그럼, 일본?”

“아니, 일본 바로 옆에 있는 나라. 한국.”

“한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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