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45화 (244/472)

245화. STOP!

자신의 목숨을 맡길 의사를 만나는 일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선생님을 빨리 뵙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 친구 말로는 처음에는 원하는 교수님이 아니어서 실망했지만, 수술 이후에 그 생각이 싹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리처드는 당시 태경이 아닌 다른 교수에게 수술을 받을 예정이었다.

주치의가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며 병원 측에 항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수술을 받고 나서는 오히려 잘 바뀌었다며 대단히 만족감을 나타냈다.

“리처드가 걱정되는 마음에 수술 장면을 녹화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걸 보고 선생님 실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그 영상을 봤는데 복강경으로 수술하시는 것이 너무나 매끄럽고 완벽하셔서 놀랐습니다.”

며칠 전 리처드의 사무실에서 수술 영상을 본 하마드는 그야말로 태경의 실력에 감동할 정도였다.

“과찬이십니다.”

하마드가 상당히 놀라며 말했지만, 실제로 빈번한 일이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복강경 수술만큼은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실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서양 유수의 대학병원에서 한국이나 일본에 수술받기 위해 오는 일이 꽤 있었다.

“그러시면 하마드 씨가 절 찾아온 이유가……?”

통역사를 통해 태경의 말을 전해 들은 하마드가 한 손을 들었다. 그러자 검은 양복을 입은 수행원 한 명이 서류 한 뭉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VIP께서 보시라고 하시네요.”

“이건 병리 결과에 경과 기록지 아닙니까?”

“맞습니다. 우리 VIP께서는 김태경 원장님께 복강경 위 부분절제술을 받고자 하십니다.”

통역사가 말을 하면서 마치 무언가 대단한 말을 했다는 듯 김태경을 바라봤다.

“아, 그러세요. 그럼 수술 날짜를 잡도록 하죠.”

“네!? 아, 네…….”

아무렇지 않고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반응하는 태경을 보며 통역사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잘은 몰라도 대단한 사람이 대형 병원도 아니고 이런 병원에 수술하러 왔다고 하니 태경이 놀랄 거라고 생각한 듯싶었다.

“잘 부탁드린다고 하시네요.”

“그럼요.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평소대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해주시고요. 날짜는 저희 담당 선생님이 오셔서 일정 잡아드릴 겁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바로 그때였다.

“ما أنت!!”

검은 양복은 입은 하마드의 수행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랍어로 한마디씩 쏟아냈다.

통역사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굳이 해석이 필요하지 않아도 그의 표정이 안 좋은 말이라는 걸 대변하고 있었다.

“저, 저기…….”

수행원 한 명이 통역사에게 말을 전하라고 재촉했다.

“당신 이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 그러냐?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분이시다. 만약 이분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당신 무사하지 못할 거야. 라고 수행원분이 전해 달라고 하시네요.”

뭔가 극진한 대접을 바란 건지 아니면 너무 태연한 태경의 태도의 불만을 품은 건지 수행원은 못마땅한 심경을 전부 드러냈다.

“STOP!”

그런데 그 순간 하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행원에게 손을 들더니 아랍어로 그만하라고 말렸다.

“미안합니다. 쏘리.”

그러자 민머리에 불쾌감을 드러내던 수행원이 어설픈 한국어로 사과를 전했다.

그 뒤, 하마드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태경에게 인사를 하며 말하자 통역사가 곧장 말을 전했다.

“우리 수행원이 잠시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원장님께서 평소 보시던 환자들을 대하듯이 저 역시 잘 부탁드리신다고 전해 달라고 하십니다.”

“물론입니다. 모든 환자가 소중하듯이 귀빈도 저에게 소중한 환자입니다. 불편함 없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로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태경은 먼저 진료실을 나왔다.

사실 오늘 할 일이 많았기에 마음이 조금 급한 것도 있었다.

회진도 돌고 외래 진료에 응급실 환자들도 봐야 하고, 급하게 정해진 응급 수술도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고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한 것이다. 물론 결코 예의가 없거나 불쾌하게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환자들을 대할 때처럼 똑같이 대했을 뿐이다.

“잠깐만요. 김 원장님!”

진료실을 걸어 나오는데 뒤에서 감덕찬이 다급하게 따라 나오며 태경을 불렀다.

“잠깐만!”

“네, 의원님.”

“김 원장님? 지금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잠깐만 내가 첨언을 좀 할게요.”

“의원님, 괜찮습니다.”

“네?”

“설명 안 하셔도 됩니다. 아마 잘은 몰라도 저분 수술을 맡겠다고 메이저 병원들이 의원님께 연락했을 거 같고…….”

“맞아요. 어떻게 알았는지 도착하고 나서 여러 병원에서 서로 수술하겠다고 연락이 오긴 왔었어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분 사인 하나가 우리나라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겠죠. 그만큼 여러모로 영향력도 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지금 병동에서 저를 믿고 입원해 있는 환자보다 중요한 사람은 아닙니다.”

“……!”

감덕찬은 입을 다문 채 태경의 말에 집중했다.

“물론 그렇다고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아닙니다. 저에게는 모두 다 똑같은 소중한 환자라는 뜻이죠. 아마도 의원님께서 외교적인 부분 때문에 신경을 더 써 주길 바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태경의 예상이 정확했다.

아무래도 하마드와 중요한 사안이 걸려 있기 때문에 감덕찬은 태경에게 각별히 신경을 더 써 달라고 부탁하려 했었다.

“그런 부분은 누를 끼치지 않도록 최대한 예의 있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환자보다 더 우선시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저분이 VIP인 이유는 위암에 걸렸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찾기가 힘들어요. 우리병원에서 특정 환자가 VIP가 아니라 모든 환자가 VIP입니다.”

“아……!”

처음에는 적잖이 당황하던 감덕찬도 이내 알았다는 듯이 호탕한 웃음과 함께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역시 원장님이십니다.”

감덕착은 눈앞의 있는 의사가 태경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다른 의사라면 모를까 모든 환자에게 평등한 태경에게는 잘 봐달라는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게 의사 김태경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잘 알았어요. 원장님이 하던 대로 잘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 정치인으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와 의료진 모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태경과 꾸벅 인사를 한 뒤, 감덕찬은 하마드와 함께 다음 일정을 위해 병원을 나왔다.

“아까, 수행원이 화가 난 것 같던데 괜찮으신가요?”

감덕찬은 함께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며 아랍어로 하마드에게 물었다.

“그럼요. 괜찮습니다. 저 친구들이 보기에는 제가 우리나라에서 조금 특별한 위치에 있다 보니 여기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하마드 씨는 특별한 분이 맞습니다.”

“그거야 아무래도 일로 연결됐으니 그렇겠죠. 하지만 전 아까 원장님 말씀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예?”

“죄송하지만, 아까 궁금해서 두 분이 하시는 말을 좀 들었습니다.”

하마드는 아까 감덕찬이 급하게 진료실을 나간 뒤 태경과 하는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래서 통역사에게 부탁해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전해 들었다.

“전 환자로 이 병원에 온 거지, 뭔가 특별한 대우를 바라고 온 것이 아닙니다.”

하마드는 왕족이었지만, 마인드 또한 그만큼 멋진 사람이었다.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스스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운이 좋아 그렇게 태어났을 뿐, 다른 이들처럼 똑같은 사람이었다.

“만약 제가 그랬다면 의원님께 김태경 원장님 병원을 알아봐 달라고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모든 환자를 똑같이 대하는 원장님의 자세가 더 좋더군요.”

“그런가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다행이네요. 저도 그래서 김 원장님을 신뢰합니다.”

“의원님이 신뢰하시는 분이라고 하니 더 마음이 놓이네요. 아니, 그런데 제가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어쩜 아랍어를 그렇게 잘하세요?”

“제가 젊은 시절 국회 몸담기 전에 중동에서 몇 년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어쩐지 능숙하다 싶었습니다.”

태경이 마음에 든 하마드는 병원을 들어올 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다음 일정을 소화했다.

두 사람이 수행원과 함께 병원을 나가고 그가 왔다 간 사실이 온 직원들에게 퍼졌다.

“대박! 선생님 그게 정말입니까?”

식판에 반찬을 대충 담은 이찬희는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은 태경의 옆에 자리 잡았다.

“방금 최 팀장님한테 들었는데 중동 석유왕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왔다면서요? 그것도 왕족이라던데 맞아요?”

“어, 맞아.”

“와! 아니, 그런 대단한 사람이 우리병원에 수술하러 오다니 이거 감개가 무량한데요.”

“오버하지 마.”

“오버가 아니죠. 진짜 재벌 중의 재벌인데요. 그래서 말인데요, 선생님. 수술은 언제예요?”

“음. 이틀 뒤, 오후에 입원이니까 삼일 뒤에 수술하겠지?”

이미 미국 병원에서 각종 검사와 함께 결과를 꼼꼼하게 챙겨왔기에 수술까지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선생님 그 수술 어시 제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수술에 적극적이야?”

“솔직히 언제 또 그런 재벌을 수술해 보겠나 싶어서요.”

“재벌이 뭐? 어차피 우리한테 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설마 이 선생, 그 환자가 수술해 주고 기름이라도 줄까 봐서 그래?”

“무슨 소리세요. 그런 거 아닙니다.”

“갑자기 목소리가 격해진 거 보니까 맞는 거 같은데?”

함께 밥을 먹고 있던 의진이 태경의 말에 동의하며 이찬희를 놀렸다.

“아니, 정 쌤까지 왜 그러세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제가 생각보다 순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무섭고 엄하신데요. 그래서 그런지 제가 어릴 때부터 남의 것은 함부로 탐내거나…….”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대신 준비 잘해서 들어와.”

“네! 당연하죠.”

태경은 안 그래도 이번 수술은 이찬희를 어시로 세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 없고 대신 끝나고 수술 보고서 써라.”

“예? 아, 그건 좀…….”

“싫어?”

“아니요. 쓰겠습니다.”

서둘러 밥을 뚝딱 비운 태경은 환자를 보기 위해 식당을 나갔다.

며칠 뒤-

병원의 바쁜 일상이 빠르게 지나고 드디어 하마드의 수술 날이 밝았다.

수행원과 전문 통역사와 함께 전날 입원한 하마드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한 채 수술실로 향했다.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자고 일어난다고 생각하세요.”

“오케이.”

태경이 통역사에게 배운 아랍어로 마취 전 하마드를 격려하며 전신 마취가 진행됐다.

“선생님. 마취됐습니다.”

“수고했어요. 마지막까지 환자 잘 부탁합니다.”

“네. 염려하지 마세요.”

“다들 끝까지 집중해 주세요.”

“네, 선생님.”

환자의 주변으로 멸균된 푸른색 일회용 종이 천들이 펼쳐졌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오염된 영역이 남지 않도록 진행한다.

한쪽에서는 이찬희가 보비를 들고서 일회용 종이 위에 전선을 고정한 뒤 복강경에 사용될 긴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카메라 받아 주세요.”

이찬희의 말에 서큘레이팅 간호사(circulating, 수술 도구 필요 시 꺼내주는 역할을 하는 수술방 간호사)가 그 뒤로 향했다.

곧이어 이찬희가 멸균된 카메라의 앞부분을 집어 들자 간호사가 멸균되지 않은 카메라의 뒷부분을 들고서 연결한다.

그리고 멸균되지 않은 부분이 닿지 않도록 투명한 비닐로 카메라 뒷부분을 덮고 완성된 카메라를 환자의 가슴 위로 올려놓았다.

환자의 머리에는 천이 수술방 천장 방향으로 올려 있어서 마취과의 영역과 수술 영역을 구분했다.

“정 선생님,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수술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고 진짜 수술이 시작됐다.

태경이 환자의 배꼽 아래를 엄지손가락과 검지로 잡아당기자 이찬희가 반대쪽으로 잡아당겨서 아랫배를 평평하게 했다.

“메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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