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49화 (249/472)

249화. 아네모네

응급실에서 일하다 보면 대중이 없다.

웬일로 여유가 있다 싶어서 의료진들이 숨을 돌릴 때가 있으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친 듯이 바빠지기도 한다.

“으아아앙!”

“이 쌤? 9번 베드 환자 결과 나왔어요.”

“네, 바로 갈게요.”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응급실이 평화로웠는데 지금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야! 미친, 이 새끼 다리 병X 됐나 보다.”

“여기, 술 가져와!”

아직 어린 아이 환자부터 정신없는 10대 고등학생 환자, 언제나 빠지지 않는 취객까지 그야말로 응급실이 시장바닥이 따로 없었다.

“으아앙!”

“아고, 아팠을 텐데 잘 참네. 기특하다.”

최모나는 울고 있는 아이 환자를 달랬다.

“지금 수액 맞고 있으니까 조금 있으면 열이 떨어질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이 환자와 노인 환자라면 치를 떨던 최모나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떼를 쓰고 우는 아이를 보면 달랠 줄도 알고 고집이 센 노인 환자도 이해할 줄 알게 된 것이다.

환자들의 아픈 마음을 100% 전부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은 보기 좋았다.

“야! 창현아, 아프냐? 나도 아프다.”

“지랄한다. 닥쳐.”

교복을 입은 남학생 서너 명이 베드에 나란히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너 엄빠한테 연락했어?”

“아니, 엄빠한테 말하면 나 백퍼 욕먹어. 이따 집에 가서 말하려고. 나 축구 하다 다리 또 부러지면 엄마가 다시 못 하게 한다고 했거든.”

“올~ 이제 축구 못 하겠네.”

“당분간은 조심해야지.”

“야, 근데 여기 응급실 보니까 무슨 진짜 드라마에서 보는 거 같지 않냐?”

“그러니까. 저기 선생님들 뭔가 개 멋있다. 사진 찍어서 인스타 스토리 올려야지.”

“안 돼. 여기 사진 찍는 곳 아니야.”

남학생들이 응급실 전경을 사진 찍으려고 하자 마침 진료를 위해 다가온 최모나가 말렸다.

“창현이라고 했지?”

“네.”

“사진 찍은 거 봤는데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았고 뼈에 금만 갔어.”

“정말요? 다행이다.”

“너, 저번에도 다리 부러져서 왔었지?”

“오! 쌤 기억력 좋으시네요.”

“의사 쌤인데 당연히 기억력 좋겠지.”

“그래, 고맙다. 자꾸 부러지고 금 가면 안 좋으니까 조심하고. 다른 선생님이 오셔서 깁스 안내해 주실 거야. 깁스하고 처방전 받아서 가.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저기 쌤?”

“왜? 어디 불편하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랑 사진 한 번 같이 찍으시면 안 돼요?”

“안 돼. 의사는 환자랑 함부로 사진 찍으면 안 되거든.”

분명 질문을 받은 사람은 최모나인데 별안간 옆을 지나던 이찬희가 불쑥 끼어들며 답했다.

“김 쌤? 여기 학생 깁스 좀 해 주세요.”

“네, 선생님.”

“그리고 최 쌤은 빨리 3번 베드 환자 보러 가고.”

“안 그래도 갈 거거든.”

그렇게 남학생 진료를 마무리한 최모나는 다른 환자를 보기 위해 베드를 이동했다.

* * *

시내 레스토랑-

한 남자가 익숙하게 고급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훈훈한 얼굴에 큰 신장을 자랑하는 그의 이름은 곽용진으로, 레스토랑의 셰프다.

아직 30대 초반인 그는 큰 레스토랑을 책임지는 헤드 셰프로,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유럽에 있는 고급 요리 학교를 졸업한 그의 요리를 맛보기 위해 평일에도 늘 예약이 가득할 정도였다.

“다들 고생이 많네.”

“어! 셰프님.”

곽용진이 등장하자 주방에 있던 직원들의 얼굴에 하나둘 화색이 돋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쉬는 날인 그가 레스토랑에 왜 왔는지 직원들은 의아해했다.

“어제 퇴근하실 때 뭐 두고 가셨어요?”

“아니. 두고 간 거 없는데.”

“그러면 왜 오셨어요? 설마 저희 보려고 오신 거예요?”

“내가 오긴 왜 왔겠냐? 당연히 너희들 보려고 왔지?”

“예? 정말이세요? 왜요?”

자신들을 보러 왔다는 말에 직원들은 술렁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근처 일 때문에 왔다가 너희들 먹을 거라도 해 주려고 들렀어.”

“와! 대박!”

곽용진이 쉬는 날 레스토랑에 나온 이유는 직원들 때문이었다. 곧 있으면 직원들 상대로 신메뉴 개발 출품이 있는 날이었다.

근무 날에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기에 주로 퇴근 후나 쉬는 날 직원들이 레스토랑에 나와 각자 메뉴 개발 연습을 하고 있었다.

곽용진은 그런 직원들에게 밥을 해 주려고 찾아온 것이다.

“저희 밥해 주시려고요?”

“맞아. 다들 메뉴 개발한다고 밥도 못 먹고 일하고 있을 거 같아서. 오늘만 특별히 해 주는 거니까 사양하고 먹어라.”

“예, 셰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봐.”

“파스타요. 셰프님 파스타 먹고 싶어요.”

“그래? 재료 뭐 있지?”

“지금 홍합 있습니다.”

“그럼 홍합 파스타 해 줄게.”

잠시 뒤, 곽용진은 빠른 손놀림으로 직원들에게 맛있는 홍합 파스타를 만들어 줬다.

“우와! 셰프님, 진짜 미치도록 맛있어요.”

“진짜 이게 바로 미슐랭과 블루리본이 인정한 파스타 맛이구나 싶네요. 정말 최고예요.”

“오버들 하기는. 맛있게 먹어 주니 고맙다. 난 이만 가 볼 테니까 이따 연습 다 끝나고 뒷정리들 잘하고 가라.”

“예,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그래, 내일 보자.”

“미친! 진짜 다 가졌다.”

곽용진이 주방을 나가자 직원들은 하나같이 그를 칭찬했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완벽할까요? 외모 인성 능력까지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어.”

“맞아요. 전 우리 셰프님 진짜 좋아요. 솔직히 화내실 때도 멋있다니까요.”

“아서라. 셰프님 여친 있으시다.”

“진짜요?”

“그럼, 저 얼굴에 저 실력에 여친이 없겠냐? 듣기로는 엄청 미인이라고 하던데……. 암튼 임자 있으니까 다들 이상한 생각하지 말도록.”

“아쉽다.”

직원들이 아쉬워하는 사이, 레스토랑을 나온 곽용진은 마트로 향했다. 간단한 식재료를 산 그는 근처 꽃집에서 여자 친구에게 줄 꽃도 샀다.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네. 꽃 있죠?”

“그럼요. 오늘도 같은 거로 하실 거죠?”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런데 손님께서는 왜 아네모네 꽃만 사 가세요?”

“제가 개인적으로 아네모네를 좋아해서요. 여자 친구랑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아, 그러시구나. 여기 포장 다 됐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곽용진은 예쁘게 포장한 아네모네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띠- 띠- 띠- 띠-

현관 도어락 비번을 누르고 집에 도착한 그는 마트에서 산 식재료와 꽃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현재는 곽용진은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지애야? 나 왔어. 지애야?”

철컥-

이쪽저쪽 방문을 열어도 여자 친구가 보이지 않자 곽용진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 여기 있……!”

“지애야?”

때마침 화장실에서 나온 여자 친구 신지애가 휘청거리자 곽용진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붙잡았다.

“자기, 괜찮아? 아직도 그래?”

“응.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네. 나 너무 기운이 없어. 용진아 나…… 쓰러질 거 같아.”

곽용진 품에 안겨 있던 신지애는 기력이 없는 듯 다시 한번 휘청거렸다.

“지애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병원 가자.”

그는 벌써 며칠째 설사를 하고 몸 상태가 안 좋은 신지애가 걱정스러웠다.

“벼, 병원……?”

병원이란 말에 기력 없는 신지애의 눈빛이 순간 파르르 흔들렸다.

“그래도…… 괜찮겠어?”

“자기가 이렇게 아픈데 당연히 괜찮지, 그게 무슨 소리야. 대충 옷 걸치고 얼른 가자.”

“응. 알았어. 모처럼 쉬는 날인데 미안해.”

“그런 소리 하지 마. 난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중요해.”

곽용진은 아픈 신지애를 살뜰히 챙기며 병원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병원 건물로 향했다.

“왜? 그냥 나와? 접수 안 해?”

두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한 여자가 건물 밖으로 나온 여자에게 말했다.

“오늘 환자가 많아. 이따 다시 올까?”

“그렇게 많아?”

“엄청나.”

이찬희와 최모나가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는 사이, 태경은 응급 수술 중이었다.

갑자기 TA(교통사고) 환자가 이송해 오는 탓에 외래 진료를 보다 급히 수술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대기실에는 외래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꽤 있었다.

“그럼 이따 다시 오지 뭐.”

“저기요?”

곽용진이 병원을 나오는 중년 여자를 불렀다.

“네?”

“지금 안에 사람 많아요?”

“지금 대기 환자 많던데 그래서 우리도 이따 다시 오려고 가는 중이에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여자에게 꾸벅 인사를 한 곽용진은 여전히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신지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축한 채 물었다.

“자기야, 사람 많은데 괜찮겠어?”

그는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눈빛으로 여자 친구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 사이가 좋아 보였다.

“다른 데 갈까?”

“아니……. 그냥 기다렸다 보자. 나 너무 힘들어.”

곽용진의 말에 신지애는 힘없는 얼굴로 답했다.

“그래. 그러자. 여기서 다른 병원 가려면 또 시간 걸리니까 여기서 진료 보자. 일단 가서 접수하자.”

“응.”

“안녕하세요. 어디 불편하셔서 오셨어요?”

“설사 때문에 왔어요. 장염 증세가 심한 거 같아서요.”

접수처 직원의 말에 신지애가 힘없이 답했다.

“외래 진료는 현재 원장님께서 수술 중이라서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오래 기다려야 할까요?”

“응급 수술이라서요. 그리고 먼저 온 순서대로 진료를 보는 거라서 시간 좀 걸릴 거 같아요.”

“저……. 혹시 응급실도 오래 걸릴까요?”

직원의 설명을 대충 들으며 응급실 쪽을 쳐다보던 신지애가 다시 물었다.

“응급실도 지금 환자가 많아서 기다려야 하는 거 똑같은데, 조금 빠를 수도 있어요. 근데 제가 정확히 장담을 드릴 수는 없어서요.”

“그럼 응급실로 진료 볼게요.”

“왜? 자기 응급실 진료 보려고?”

신지애의 말을 듣고 있던 곽용진이 물었다.

“응. 조금이라도 빨리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좀 힘드네.”

“그래, 그러자. 자기 힘든 것보다는 그게 나을 거 같아.”

“일단 접수되셨고요. 저쪽에 보이시는 응급실 입구로 들어가시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곽용진은 마치 신지애가 불면 날아갈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대하며 응급실로 천천히 이동했다.

“방금 두 사람 보기 좋다.”

접수처 직원이 두 사람을 보며 말하자 동료 직원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요. 남자 눈에서 꿀 떨어지는 거 보셨죠?”

“내 말이. 여자 친구한테서 시선을 떼지를 못하던데. 둘 다 인물들도 좋고 아주 선남선녀가 만났네. 부럽다. 부러워.”

“남자 정말 잘생겼더라고요. 저런 남친 있으면 아파도 기운 날 거 같아요.”

“몸은 아파도 마음은 든든하겠지.”

접수처 직원의 부러움을 샀던 비주얼 커플인 두 사람은 응급실 들어온 상태였다.

“저기, 진료 보러 왔거든요.”

“접수하셨어요?”

“네.”

“혈압 측정한 뒤 종이 주시고 좀 기다리고 계시면 순서대로 성함 불러 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용진아, 나 잠시만…….”

간호사의 설명을 듣고 혈압 측청기로 향하던 신지애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왜? 쓰러질 거 같아? 많이 안 좋아?”

“아니, 그게 아니라 화장실 가려고. 또 설사 나올 거 같아.”

“알았어. 저기 여기 화장실 어디 있어요?”

“저쪽 코너 돌면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지나가던 간호사의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은 화장실로 이동했다.

“지애야, 나 여기 있을게 얼른 갔다 와.”

“어, 알았어.”

철컥-

신지애는 밖에서 기다리는 곽용진을 뒤로한 채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어쩐지 그녀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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