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볼펜
커다란 손으로 신지애의 얼굴을 쓰다듬던 곽용진은 점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댔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밀착하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자기, 쓸데없는 생각하는 건 아니지?”
서늘한 음성이 고막을 강타하자 신지애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이불 속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음성은 곽용진의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일종의 신호와도 같았다.
무미건조할 정도로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시작될 때마다 마치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경직되며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주먹을 쥔 손끝이 의지와 상관없이 파르르 떨리던 그때, 다시 한번 기분 나쁜 음성이 그녀의 고막을 유린했다.
“어라! 내가 분명 싫다고 했을 텐데…….”
“……!”
“지애야? 우리 착한 지애 대답 안 할 거야? 내가 대답 안 하는 거 질색한다고 했잖아?”
신지애의 마음은 벼랑 끝에서 떨어져 뭉개지고 짓밟히고 불안한 상태였다. 반면, 곽용진의 표정은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불과 조금 전까지 사랑스러운 눈빛과 표정으로 여자 친구를 걱정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게다가 모든 직원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찬하던 성공한 셰프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저, 한 여자를 향한 지독한 소유욕에 가득한 삐뚤어진 사랑을 보일 뿐이었다.
“미, 미안. 이상한 생각 안 했어.”
“확실해? 근데…….”
별안간 질문을 던진 그가 그녀의 귓가에 들이밀던 얼굴을 들더니 살짝 열린 커튼을 확실히 여미며 밖을 차단했다. 그러더니 다시 얼굴을 신지애 귓가에 갖다 댔다.
그리고 옆 베드에서 들리지 않도록 완전히 입술을 귀에 밀착한 채 아주 천천히 한 글자씩 말했다.
“너! 일부러 넘어졌지?”
“……!”
그 말을 듣는 순간, 신지애는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몸속 모든 세포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무슨 소리야.”
잔뜩 굶주린 맹수 앞에 있는 작은 토끼처럼 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신지애는 이를 꽉 물고 태연한 척하려 애를 썼다.
“내가 왜 일부러 넘어져.”
“내가 모를 줄 알았지? 지애 너, 아까 여자 의사한테 일부러 넘어진 거잖아.”
눈치가 빠른 곽용진은 조금 전, 최모나와 부딪혔던 신지애의 행동을 의심하며 채근했다.
“너 아프다고 해서 일부러 병원까지 데리고 왔더니 설마 쇼하는 거야? 나 속이고 도망가려고?”
“속이다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요즘 네가 너무 얌전해서 나 사실 눈물 나게 좋았거든? 그래, 이제야 지애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나를 이해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어. 근데 이상하지? 그러면서도 뭔가 마음 한구석이 살짝 찜찜하더라고. 그런데 아까 그 의사랑 부딪혔을 때 그때 내가 ‘아차!’ 싶었다니까. 왜 그런 줄 알아?”
“…….”
“너무 어색하게 넘어졌거든. 그렇게 티가 나면 내가 바로 눈치채잖아. 재미없게…….”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자기가 잘못 생각했어.”
신지애는 소름 끼치는 곽용진의 언행에 넘어가지 않으려 애를 썼다.
“내가 만약 진짜 도망가려 했다면 병원으로 오지도 않았을 거야. 아파서 병원 온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도 서운해. 그리고 나 이제 더는 자기 두고 혼자 떠날 생각하지 않아.”
이불 속에서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재빨리 꺼낸 신지애는 곽용진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자기도 나 믿어 줘.”
“정말이지?”
“당연하지. 내가 가긴 어딜 가겠어. 그러니까 나 믿어도 돼.”
“알았어.”
확신에 찬 표정으로 강하게 어필하는 여자 친구의 말에 의심 가득한 눈빛이 어느새 수그러들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신지애가 며칠 동안 설사로 고생한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괜히 내가 아픈 자기를 의심했네. 미안.”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괜찮아.”
신지애는 일부러 곽용진의 손을 잡으며 더욱 다정한 모습을 연출했다.
* * *
한편, 신지애가 곽용진과 대화를 하고 있던 그때 태경은 최모나와 함께 집중 처치실에서 대화하고 있었다.
“최모나, 너 무슨 일 있지?”
“진료 보시던 중에 죄송합니다. 선생님.”
최모나는 일단 사과부터 전했다.
“됐어. 그보다 무슨 일이야?”
태경은 후배를 혼내지 않았다. 오죽 급한 상황이면 그럴까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진료를 보던 환자가 당장 처치가 필요하거나 위급한 상황이었다면 지금처럼 중간에 나오질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최모나 또한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한 검사를 해야 했지만, 다행히 진료를 보던 신지애 환자도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신체검사에서도 그렇고 다섯 번째 바이탈에서 독한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교적 가벼운 증상일 때 나타나는 2단계 암모니아 냄새가 좀 진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기에 태경은 일단 최모나의 장단에 맞춰준 것이다.
“선생님, 방금 13범 신지애 환자 말입니다.”
“그 환자가 왜?”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이야기해.”
“도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도움? 다이아리아(Diarrhea, 사) 증상 말고 말하는 거야?”
“네, 병적인 증상이 아니라 그게 아무래도 다른 쪽으로 도움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다른 쪽으로 도움이라니?”
“실은 아까 제가 신지애 환자랑 부딪혀서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최모나는 아까 응급실에서 신지애와 부딪혔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두 번이나 제게 분명히 ‘도와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환자가 도와 달라고 했다는 거야?”
“예, 소리 내서 말한 건 아니었지만, 분명히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확실히 느낀 건 일부러 저한테 부딪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신지애 환자 데이트 폭력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데이트 폭력!?”
“네, 선생님.”
방금 최모나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충분히 도움을 요청(*요청할) 상황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말만 믿고 무조건 함께 온 남자를 데이트 폭력범으로 의심하고 경찰을 부를 수는 없었다.
물론 환자가 폭력에 노출된 상황이거나 위험한 상황이라면 경찰에 알리는 게 맞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확실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제 생각에는 저 환자분이 도움을 요청하는 거 같습니다.”
“최모나?”
“네, 선생님.”
“저 환자가 도움을 요청한 거 말고, 네가 생각했을 때 데이트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 뭔데?”
“네, 그건…….”
사실 신지애가 말했다는 거 말고는 아직 뚜렷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도움을 주기 위해선 확실해야지.”
괜히 확인도 안 된 상태에서 무턱대고 경찰을 불렀다가는 더 안 좋은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최모나의 말대로 환자가 일부러 부딪혀서 은밀하게 도움을 요청한 거라면 더더욱 경찰을 대놓고 부르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환자에게 직접 확인을 한 다음에 정말 맞는다면 도와주자.”
“환자에게 직접 말입니까?”
“당연히 환자에게 해야지.”
“그게 가능할까요? 저 남자 화장실 문 앞까지 따라갈 정도로 환자분이랑 안 떨어지는 거 같습니다.”
“여보세요? 잠깐 처치실로 오시겠어요? 네, 지금요.”
태경이 핸드폰으로 급하게 전화를 하고 난 뒤, 곧장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세요?”
“원장님, 부르셨습니까? 어라! 임 선생에 최 선생님까지 계시고 무슨 일인가요?”
“지금 13번 베드에 젊은 여자 환자가 내원했는데 작은 문제가 생긴 듯해요.”
“문제요?”
갑자기 호출을 받고 어리둥절한 두 사람에게 태경이 빠르게 설명했다.
“세상에! 데, 데이트 폭력이라니요?”
“아이고, 팀장님 목소리 좀 줄이세요. 밖에 다 들리겠어요.”
“미안해요. 임 선생. 내가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그래서 뭔가 좋은 방법이 있을까 해서 두 분을 불렀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검사를 하러 갈 때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고 환자분이랑 대화해 보는 게 좋은데……. 지금 신지애 환자분 검사가 그리 오래 걸리는 검사들이 아니라서요.”
“이렇게 하죠.”
잠시 생각에 잠기던 태경은 최 팀장이 손에서 놀리던 볼펜을 보고 무언가 떠올랐다.
그러더니 가운 포켓에 꽂혀 있는 볼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눈을 두 번 깜빡이세요. 그리고…….
태경은 손바닥에 적은 문구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며 설명했다.
“환자한테 가서 나머지 설명을 하면서 이 손바닥을 보여 줄 테니까 그때 임 선생님이 남자 보호자에게 가서 잠시 시선을 돌려 주세요.”
“그럼 제가 환자분 접수 관련해서 다시 물어보면 되겠네요.”
“그래요. 그리고 만약 환자분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일단 CT실로 옮겨서 물어보죠.”
“CT실이요?”
“네.”
CT는 남자 친구가 따라와도 안에서 대화가 충분히 가능했고, 한 번 찍을 때 시간이 조금 걸리기 때문에 이야기할 시간도 있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지금 당장 CT 찍을 환자 있는지 그것만 체크해 주세요.”
“예, 제가 바로 알아볼게요.”
“저기, 그런데 원장님 만약 환자분이 눈치를 못 채면 어떡하죠? 아니, 이렇게 했는데 상황 이해를 잘못해서 뭐랄까 아다리가 안 맞아서 실패하면 어쩌나 해서요.”
“어으! 진짜 팀장님은 가끔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하시더라. 됐어요.”
지나친 최 팀장의 걱정에 임정숙 간호사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답답해했다.
“경찰 신고가 필요하면 신호를 보낼 테니까 팀장님은 그때 신고해 주세요.”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자! 그럼 이만 나가죠.”
대화를 끝낸 태경과 직원들은 처치실을 나와 각자 준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태경이 다시 베드로 돌아가 못다 한 설명을 이어 갔다.
“환자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기, 선생님?”
괜찮다는 신지애와는 달리 곽용진은 조금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진료 보기 전부터 기다렸는데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네요.”
“자기야, 왜 그래. 급한 환자 때문에 그런 거잖아.”
“자기도 아프니까 그렇지.”
“죄송합니다. 보호자분이 염려하시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환자분이 탈수가 생기지 않게 해 드릴게요. 그리고 세균성인지 바이러스인지 아직 분명하지 않아요. 그래서 항생제도 드리고 경과를 지켜볼게요.”
“네.”
“오늘 밤은 수액을 맞으시는 걸 권해 드릴게요. 수액 맞으시다가 어지럽거나 다른 불편한 곳 있으면 의료진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몇 가지 검사도 좀 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 간단한 검사를 제가 바로 좀 해 볼게요.”
“저기, 보호자분?”
태경이 검사를 한다는 말을 꺼내자 스테이션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임정숙 간호사가 곽용진에게 다가왔다.
“신지애 환자분 보호자님 되시죠?”
“예. 그런데요?”
“아까 환자분께서 주소를 적어 주셨는데 잘못 적으셨는지 검색이 안 돼서요.”
임정숙 간호사는 접수처에 가서 신지애가 적었던 환자 인적 사항을 다시 들고 왔다. 그리고 센스 있게 적은 주소에 받침을 더해 잘못 적은 거처럼 해서 곽용진에게 보여 줬다.
“확인 한 번 부탁드릴게요.”
“예, 알겠습니다.”
그사이 옆에 있던 최모나가 몸을 살짝 틀며 곽용진의 시선을 막았고, 태경이 신지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환자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