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진료를 받은 건 제가 아니라…….
‘맞다! CCTV에 찍히지 않았어?’
‘CCTV야 있지. 그런데 무용지물이야.’
‘무용지물? 왜?’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냅다 때리고 튀었어. 거기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써서 얼굴도 안 보이고 비까지 와서 식별이 더 힘들다네. 볼래?’
‘여기서 볼 수 있어?’
동료 모델은 경찰에서 받은 핸드폰 속 CCTV 영상을 보여 줬다.
영상 속에서 동료는 골목에 주차된 차를 타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도배한 남자가 나타나더니 커다란 망치로 그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가격한 뒤 도망갔다.
불과 5분 안에 일어난 어이없고 황당한 일이었다.
‘진짜 돌아이네. 아니 어떻게 멀쩡한 사람을 갑자기 때리고 도망갈 수가 있어?’
‘그러니까 묻지 마 범죄지. 경찰 말로는 요즘 그런 일이 은근히 자주 있대. 근데 그게 왜 하필 내가 당하느냐고.’
‘내가 다 어이없네. 우리가 요번 촬영 얼마나 준비를 많이 했는데. 속상하다.’
이번에 신지애와 동료가 함께 촬영하기로 했던 브랜드는 명품 회사의 쥬얼리 라인이었다.
오래된 연인을 모티브로 개발한 제품으로, 콘셉트 역시 오래된 연인의 사랑이었다.
편안하지만 여전히 뜨겁고 한결같은 사랑을 주제로 만들어진 제품으로, 약간의 세미 누드가 있는 촬영이었다.
그래서 신지애도 동료도 촬영 한 달 전부터 몸을 만들고 식단을 할 만큼 준비를 열심히 했다.
워낙 화보 자체가 화제성이 높은 브랜드였기에 두 사람 다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친 것도 다친 건데 솔직히 화보 촬영 밀릴 게 더 빡쳐. 막말로 그쪽 일정 안 맞으면 모델 교체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게. 이딴 놈 때문에…….’
동료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CCTV 화면을 다시 보던 신지애는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
CCTV 영상 속 동료를 폭행했던 남자가 남자 친구인 곽용진인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얼굴은 식별이 불가능했지만, 그녀가 놀랐던 이유는 신발이었다. 흔하디흔한 운동화였지만, 절대 흔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바로 기념일 날 곽용진만을 위한 커스텀을 한 운동화였기 때문이다. 신발 옆면에 직접 그렸었다.
화려한 무늬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에게 의미 있는 표식이었기에 신지애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화보 촬영을 앞두고 곽용진이 보인 반응이 뇌리를 스쳤다.
‘지애야. 너 그 촬영 꼭 해야 해?’
‘일인데 당연하지? 왜?’
‘아니……. 그냥 뭔가 다른 남자랑 다정하게 촬영한다니까 좀 질투 나서. 그 남자 모델 잘생겼잖아.’
‘뭐야. 그냥 일이야. 그 사람은 동료일 뿐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잖아.’
촬영의 콘셉트를 들은 뒤부터 곽용진은 은근히 불편함 심기를 드러내며 안 찍었으면 하고 바랐다.
신지애는 그 길로 빠르게 병문안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왔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심증이 아니라 진짜 그렇다면 곽용진과 헤어지고 경찰에 알리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신발장을 뒤졌지만, 문제의 운동화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여기 있어야 하는데. 어디 갔지?’
항상 놓여 있던 자리에 있어야 할 운동화가 보이지 않자 의심은 더 커졌다.
‘설마…….’
순간 드레스룸에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곧장 방으로 들어가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빗물 흔적이 남아 있던 문제의 운동화를 발견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신발뿐만 아니라 함께 발견한 카메라였다.
운동화를 찾기 위해 방 안을 이 잡듯 뒤지다가 작은 카메라까지 발견한 신지애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의 카메라는 곽용진이 자신을 도촬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걸 인터넷을 검색한 뒤 알 수 있었다.
‘용진아, 너 이거 뭐야?’
카메라까지 발견하자 참을 수 없어 그날 저녁 곽용진에게 따져 물었다.
‘설마 이걸로 나 감시했어? 맞아?’
‘지, 지애야. 그게 아니라…….’
‘왜 그랬어? 나는 이런 상태로는 사귈 수 없어. 우리 그만 헤어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신지애는 곽용진에게 이별을 고했다. 더는 함께 살 수도 만날 수도 없었다.
일부러 동료 일은 말하지 않고 헤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온몸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헤어져? 누구 마음대로. 내가 그 새끼 다리 부러트린 거 너도 알지?’
‘……!’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신지애에게 곽용진은 더 이상 착한 남친 코스프레를 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하는 일, 먹는 거, 좋아하고 싫어하는 거, 가는 곳 전부 다 알고 있어.’
그녀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그는 알고 있었다.
‘지애야,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 넌 나를 못 벗어나. 헤어지다니. 그런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그땐 내가 돌지 몰라.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곽용진은 신지애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광기 어린 사람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에 집착했고 모든 걸 소유하려 들었다.
몇 번이나 도망가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목숨까지 협박당한 신지애는 어쩔 수 없이 일까지 그만두면서 그의 인형이 되어 집에만 있어야 했다.
집 전화는 물론 핸드폰에 인터넷까지 비번을 걸어 주고 카메라로 감시를 하는 탓에 외부와의 연락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점점 피폐해져 가는 자신을 느끼고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죽을 것만 같았다.
‘지애야, 아프지 마.’
며칠 동안 방도를 생각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늘 주문처럼 떠드는 곽용진의 말귀가 떠올랐다.
‘나는 네 몸에 흠집 하나라도 나는 게 싫어. 네가 아픈 건 더 싫어.’
한두 번이 아닌 반복적으로 했던 아프지 말라는 그의 말이 떠오르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바로 자신의 몸을 혹사하는 거였다.
평소 대장이 예민한 그녀는 음식이 안 맞으면 바로 설사를 했다. 그래서 곽용진도 그녀의 식사에 신경을 썼다.
‘지애야, 오늘은 신선한 브로콜리 수프를 준비했어,’
‘오늘은 우리 기념일이라 소고기 스테이크야.’
‘유기농 채소니까 안심하고 먹어.’
온갖 비싼 식자재와 몸에 좋은 것들만 가득했기에 장을 괴롭히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어!’
결국 신지애는 곽용진 몰래 음식을 조금씩 숨겨서 신선도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카메라 사각지대에서 몰래 그 음식물을 섭취했고 계획대로 심한 장염에 걸려 병원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하! 기가 막혀.”
“확실히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저거 진짜 이상한 놈이네.”
신지애로부터 모든 정황을 들은 경찰들은 말 그대로 어이가 없었다. 경찰뿐만 아니라 태경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계속 그 집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감금된 채로 있던 거예요?”
“네, 계속 감시와 감금당했어요.”
“일단 그럼 곽용진 씨를 조사해 볼게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피해자께서 말씀하신 것들에 대한 정확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당연한 소리였다.
특히나 남녀 간에 데이트 폭력은 증거가 없으면 단순히 사랑싸움으로 결론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집을 수사해 주세요. 집을 조사해 보시면 카메라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신지애는 집을 수사하라고 답했다. 원래 살던 집이었기에 집 계약자가 본인이라서 수사하기 용이했다.
아마 곽용진의 집이었다면 거부할 게 뻔했고, 바로 수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 경찰은 곧장 병실을 나와서 경찰서에 있던 다른 동료와 신지애의 집으로 향했다.
“환자분, 몸은 좀 괜찮으세요?”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태경이 신지애를 걱정하며 물었다.
“네, 선생님……. 치료를 받고 있어서도 그렇고, 그 사람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해요. 아까 그 여자 선생님도 그렇고, 선생님께도 그렇고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연락할 가족은 없어요? 혼자 있는 것보다는 가족이나 친구가 함께 있으면 도움이 될 거예요.”
“그게 가족은 외국에 있어서 일단 친구한테 연락했어요.”
“그래요. 잘했어요.”
태경은 임정숙 간호사를 불러 친구가 올 때까지 신지애와 함께 있도록 부탁했고, 여자 경찰과 함께 보호자 대기실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들이 대단하시네요.”
“아닙니다. 그냥 신고만 도와줬을 뿐인데요. 뭘.”
“신고한 게 얼마나 큰 건데요. 가끔 병원에서 신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여러 환자 보느라 바쁘셔서 그런지 이렇게 신경 쓰는 선생님들은 본 적이 없거든요.”
대화하며 보호자 대기실로 온 두 사람은 일단 태경의 진료실로 자리를 옮겼다.
“저기……. 선생님. 우리 지애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혹시 수술이 잘못됐어요?”
완벽하게 수술실로 들어간 신지애를 봤기 때문인지 곽용진은 갑작스러운 경찰 등장에도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거 같았다.
“지애 괜찮은 거예요? 네?”
“곽용진 씨 되시죠?”
여전히 신지애 수술이 잘 끝났는지 별일 없는지만 묻는 그에게 경찰에 입을 열었다.
“네, 제가 곽용진인데요.”
“신지애 씨, 아시죠?”
“네, 남자 친구입니다.”
“글쎄요. 그건 본인 생각이시고요. 신지애 씨가 곽용진 씨를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저, 저를요? 지애가요? 그럴 리가. 제 여자 친구는 지금 수술 중인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곽용진은 말끝을 흐리며 자연스럽게 태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환자분께서 도움을 요청하셨어요. 현재 환자분은 수술 중이지 않습니다.”
“방금 선생님 말씀 들으셨죠? 곽용진 씨로부터 지속해서 감금과 감시 그리고 협박을 받고 있다고 신지애 씨가 다 설명했어요.”
경찰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곽용진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알렸다.
“피해자분이 헤어지자고 했는데 일도 그만두게 하고 집에서 못 나가게 했다면서요. 집안에 카메라까지 설치해서 감시하고. 곽용진 씨 그거 데이트 폭력에다 스토커예요.”
“하!”
이야기를 듣던 곽용진은 별안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며 대뜸 사과하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아니, 이게 죄송해서 될 일이 아니라 함께 경찰서까지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애를……. 지애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습니다.”
곽용진은 계속된 사과와 함께 경찰에 말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실은 제가 분리불안증이 있어요. 지애가 곁에 없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요.”
“혹시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받은 적 있으신가요?”
“네? 아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이보세요. 곽용진 씨,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니라고요? 제가 지애를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경찰분께서 그런 식으로 제 사랑을 깎아내리는 건 불쾌합니다.”
태경의 질문에 아니라고 답한 그는 경찰의 말에 발끈하며 반박했다.
“오히려 너무 사랑해서 벌어진 일이라고요. 태어나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고, 그러다 보니 지애를 향한 제 마음이 서툴고 잘못됐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녀를 스토킹하거나 감금 감시한 적은 없어요.”
구구절절 이야기를 꺼내던 곽용진은 급기야 자신은 스토킹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애를 위해서였어요.”
오히려 여자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이봐요! 곽용진 씨? 조사하면 다 나옵니다. 거짓말하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좋아요.”
“제가 질투가 많아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전 지애가 다른 남자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싫었어요. 하지만 결코 감금하거나 스토킹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애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니까요. 거짓말하는 거 아닙니다.”
마치 자신의 결백을 증명이라도 하듯 울먹이던 그의 입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은 건 제가 아니라 지애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