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라이어 게임
마치 자신의 결백을 증명이라도 하듯 울먹이던 그의 입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은 건 제가 아니라 지애예요.”
“뭐, 뭐라고요?”
“……!”
뜬금없는 말에 태경과 경찰은 어이가 없었다.
“아까 의사 선생님께서 저한테 물어보셨잖아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받은 적 있냐고요.”
“맞아요. 제가 곽용진 씨에게 물었습니다.”
“전 받은 적이 없으니까 없다고 답한 거예요. 지애가 받았어요. 제가 거짓말하는 거 같죠? 경찰이시니까 알아보시면 되잖아요. 진짜예요. 진짜입니다.”
“……!”
계속된 어처구니없는 말에 여자 경찰은 말문이 막혔고 함께 자리하고 있는 태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 한 장면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울먹이는 곽용진을 보며 경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라이어 게임.
이쯤 되니 신지애와 곽용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
남녀 간의 데이트 폭력 범죄는 은근히 까다로운 게 많았다. 이유는 연인 간의 사랑이란 감정에서 싸움이 증식됐기 때문이었다.
한쪽은 이미 감정이 끝난 상태지만, 다른 쪽은 그렇지 못한 경우 사건을 매듭짓기가 더욱 복잡했다.
경찰은 조금 전, 신지애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같은 여자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동안의 경험과 경찰로서 촉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한쪽 말만 계속 믿을 순 없었다.
방금 곽용진이 한 말이 거짓말일 확률이 높았지만, 확인이 필요했다. 이렇게 된 이상 집에서 빨리 증거가 나왔으면 했다.
“확인 좀 부탁해. 그래. 알아보고 빨리 연락 줘. 선생님 잠시만요.”
경찰서로 연락해 신지애의 의료기록을 알아보라고 시킨 경찰은 태경을 한쪽으로 불렀다.
다행히 진료실 문 앞에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장득칠이 지키고 있었다.
“신지애 씨, 진짜 아픈 건 맞나요?”
지금까지 정황으로는 신지애를 의심하진 않지만 그래도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네, 확실합니다. 확실한 장염이고 탈수 증세도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제가 보기에는 신지애 씨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태경은 조심스럽지만, 경찰에게 자기 생각을 전했다.
병원에서 오랜 시간 동안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세상 사람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저마다 사연이 있고 또 그 안에서 도무지 믿기 힘든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사람을 겪다 보니 태경은 어느 정도 사람을 볼 줄 알게 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환자를 볼 줄 알게 됐다는 말이 더 맞았다.
적어도 그 환자가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인지 오랜 생활 의사로서 쌓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는데 신지애의 경우는 진실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일단 저 사람의 말도 확인은 해 보고 뭔가 나온 다음에 판단해야 할 거 같아요.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어렵네요. 여보세요?”
한쪽에서 대화하던 경찰은 선배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네, 경사님. 도착하셨어요? 저 지금 원장님 진료실에 있어요. 네.”
전화를 끊고 난 뒤 아까 신지애의 집으로 갔던 경찰이 도착했다.
철컥-
“어떻게 됐어요?”
증거를 찾았냐고 묻는 여자 경찰에 말에 선배는 대답 대신 핸드폰 사진을 보여 줬다.
“어! 찾았네요?”
“초소형 카메라 세 대 찾았고 피해자 말대로 현관 잠금장치도 있었어. 증거품은 일단 경찰서로 보냈는데 문제가 있어.”
“문제요?”
“속 빈 강정이야.”
“네?”
“내용이 없어. 노트북이고 PC 본체고 다 찾아봤는데 신지애를 촬영한 영상이 한 개도 없어.”
경찰서에서 계속 찾고 있지만, 현재까지 감시했다고 할 만한 증거 영상이 전혀 없었다.
비록 카메라를 찾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곽용진은 데이트 폭력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신지애 씨 의료 기록은요?”
“몇 년 전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은 적이 있더라고.”
“그게 사실이에요?”
“전부 사실이야.”
곽용진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 실제로 조사를 한 결과 신지애의 진료 기록이 존재했다.
“저기요? 경찰 선생님? 제 말 맞죠. 영상 없죠? 카메라는 제가 지애랑 떨어지면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불안감이 심해서 설치한 거라니까요. 의료 기록 확인하셨으니까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잖아요.”
한쪽에서 떠드는 곽용진의 말을 듣고 있던 경찰들은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게 곽용진을 맡기고 다시 신지애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하!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경찰에게 지금까지 일을 전부 들은 신지애는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신지애 씨, 예전에 정신과 진료받은 적 있으시죠?”
“걔가 말한 거죠? 네, 있어요.”
“곽용진 씨가 그러는데 신지애 씨가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이력이 있고 그 때문에 정신과 진료받은 적과 약을 복용한 적이 있다고 말했어요.”
“미쳤어.”
“그것 때문에 신지애 씨가 혼자 이따가 또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그래서 카메라를 설치했지 아직 촬영한 적은 없다고 했고요.”
“말도 안 돼! 어떻게…….”
그 말을 듣자마자 신지애는 입을 틀어막았다. 도무지 기가 막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는 것만 같았다.
“진료를 받고 약을 먹은 건 사실이지만, 살면서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럼 진료는 왜 받은 거죠?”
“일 때문에요.”
모델 일을 하고 있던 신지애는 한동안 몸매 강박증에 걸렸었다고 했다.
실제로 모델들은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른 체형을 유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때로는 소속사에 권유가 있거나 쇼에 발탁된 브랜드 측에 요구로 마른 몸을 더 빼야 하기도 했다.
신지애 역시 그랬다.
그렇게 운동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식단으로 먹는 걸 줄여 살을 뺐지만,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고 다이어트에 더 집착했다.
그러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정신의학과 진료를 보게 됐다. 자신을 괴롭히는 걸 멈추고 싶었다.
초반에 약을 먹었지만, 오래 먹진 않았고 좋은 의사를 만나서 말라야 한다는 강박증을 고치게 됐다.
이런 사연을 신지애는 연애 초반에 곽용진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그는 혼자 힘들었겠다며 위로했고 앞으로는 무조건 힘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이어트 강박증을 자살 스토리로 바꿔 경찰에게 거짓말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사실인가요?”
“전부 사실이에요. 내일 제가 진료받았던 그 병원에 확인하시면 아실 거예요. 전, 제 일도 사랑하고 자부심도 있어요. 그런 제가 왜 자살을 결심하겠어요. 오히려 저 나쁜 놈 때문에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두 경찰은 점점 머리가 아파 왔다. 현재 곽용진을 데이트 폭력범이라고 할 수 있는 만한 증거가 없었다.
“흐으흑!”
경찰들과 태경이 잠시 의견을 나누고 있던 그때 별안간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신지애가 눈물을 흘렸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괜찮은지 묻는 태경의 말에 흐느껴 울던 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대성통곡으로 바뀌었다.
“흐윽! 하아!”
신지애는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친 듯이 울었다.
“환자분, 진정하시고 숨을 크게 들이켜세요. 천천히!”
숨을 헐떡이며 어찌나 심하게 울던지 과호흡이 올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경은 빠르게 그녀를 진정시켰다.
“날 따라 해 봐요. 후우!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좋아요. 임 선생님 여기 따뜻한 물 좀 갖다 주세요.”
“네, 선생님.”
“다시 한번 더 해 볼게요. 천천히 해요. 좋아요. 물 좀 마셔요. 괜찮아요?”
“네…….”
빠른 조치로 진정된 신지애는 눈물을 닦으며 마음을 추슬렀다.
“이제 괜찮아요. 놀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보다 일단 환자분이 안정을 취해야 할 거 같은데요.”
“아니요. 선생님. 저 지금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요.”
태경이 경찰에게 말하던 그때 신지애가 다급하게 서둘러 말했다.
“저 확실한 증거를 알고 있어요.”
“확실한 증거요?”
“……네.”
“그게 뭔데요?”
“…….”
경찰에 물음에 신지애는 잠시 침묵했다. 뭔가 어렵고 힘든 말이 있는 듯한 그녀의 행동에 아무도 빨리 말하라고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준비될 때까지 모두가 기다릴 뿐이었다.
“차마 이것까지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5분이 지나고 다시 10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신지애가 침묵을 깨고 어렵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기 경찰관님? 그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뭐든지 물어보세요.”
“확실한……. 정말 확실한 증거가 있고 두 분이 판단하시기에 그렇다고 느끼면 처벌이 가능한 거죠?”
“물론이죠. 데이트 폭력의 처벌은 2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이 내려지고, 신체 상해를 입히면 그보다 처벌이 더 올라갑니다.”
“그때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 1000만 원이에요.”
신지애의 답변에 두 경찰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혹시 곽용진을 여기로 불러 주실 수 있을까요?”
“예? 곽용진 씨를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일부러 두 사람을 떨어뜨렸는데 다시 곽용진을 불러 달라니.
경찰과 태경은 신지애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 싶었다.
“저희가 지금 일부러 곽용진 씨를 지애 씨랑 따로 조사하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저도 그놈 얼굴 보지 않아서 마음도 더 편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자식 도망갈 구실을 생각하고 빠져나가서 다른 피해자가 생길지도 몰라요. 그래서 곽용진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고 싶어요.”
조금 전, 카메라는 발견했지만 안에 영상이 없다는 말에 신지애는 곽용진이 분명 영상을 삭제했다고 확신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의 손아귀에 또다시 놀아난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았기에 큰 결심을 한 것이다.
“곽용진은 제가 자신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전 그게 틀렸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요.”
“정말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이 일을 들추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제가 넘어야 할 산이니까요.”
결국 신지애의 의견을 반영한 경찰은 곽용진을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사실 지금까지 조사 결과 두 사람의 증언이 상당 부분 엇갈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을 한자리에 불러 이야기를 들어 보고 판단하는 것도 필요했다.
철컥-
“지애야? 괜찮아? 네가 날 고소했다니 그게 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곽용진은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걱정을 늘어놓았다.
“곽용진 씨, 가까이 가지 마세요.”
“너야말로 내가 자살 기도를 했다고 말했다며? 내가 걱정돼서 그래서 카메라를 설치했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지애야 난 네가 그때 말해 줘서 그런 줄 알고…….”
“거짓말하지 마. 난 너한테 그렇게 말한 적 없어. 날 감시하던 영상도 이미 다 지웠겠지?”
“영상이라니?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가증스러우니까 시치미 떼지 마. 곽용진, 내가 비밀 하나 말해 줄까? 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어. 과연 이것도 거짓말할 수 있을까? 경찰관님?”
별안간 신지애의 손과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마른 침을 삼킨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경찰관님, 저 사람한테……. 불법으로 촬영한 성x계 동영상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