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55화 (255/472)

255화. 태경의 욕심

별안간 신지애의 손과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마른 침을 삼킨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경찰관님, 저 사람한테……. 불법으로 촬영한 성x계 동영상이 있어요.”

실바람에도 사정없이 떨리는 마른 잎처럼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입을 연 신지애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모래성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어금니를 꽉 물며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고 밝히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무덤까지 갖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밝혀야만 저 괴물이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그야말로 폭탄 발언으로 곽용진의 표정은 순간 굳어졌다. 그 표정을 본 경찰은 그녀의 말에 사실이라는 걸 직감했다.

결정적인 증거가 밝혀졌을 때 한결같이 보이던 범인들의 표정이 지금 곽용진 표정과 똑같았다.

“그러니까 곽용진 씨가 성x계 영상을 촬영했다는 건가요?”

“네, 맞아요. 몰래 도촬했고 그 영상을 세컨폰에 저장하고 있을 거예요.”

집안 곳곳에 있던 카메라를 찾던 날, 신지애는 침실에서도 카메라를 찾았었다. 그런데 그 위치며 각도가 정확히 침대 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이 나쁜 놈이 그동안 잠자리 영상까지 몰래 찍고 있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지애 씨, 힘드시겠지만 수사를 위해 질문을 좀 할게요.”

“아니요. 물어보셔도 돼요.”

“아시겠지만 증거라는 건 심증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해야 입증할 수 있어요. 그 영상을 직접 봤나요?”

“네, 제가 직접 봤어요.”

“……!”

직접 봤다는 소리에 곽용진의 동공이 크게 팽창했다.

이미 카메라에 대한 사실과 함께 헤어지자고 했던 신지애는 영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한동안 얌전하게 굴었다.

곧 죽어도 다시 한 침대에서 자고 싶지 않았지만, 영상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곽용진이 잠이 들면 몰래 일어나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일부러 눈을 감고 먼저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옆에 누워있는 곽용진이 핸드폰으로 도촬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곽용진이 반대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살짝 눈을 떠서 확인하니 화면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것만 같았다.

정말 그 순간 악마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체구 차이가 났기 때문에 달려들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 괴물이 완전히 잠들고 깊은 새벽에 숨소리까지 참으며 일어나 휴대폰을 확인했다.

평소에 들고 다니는 휴대폰이 아닌 세컨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영상을 지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문 인식이 걸려 있었기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마 지금 세컨폰도 갖고 있을 거예요. 늘 목숨처럼 갖고 다녔거든요.”

“곽용진 씨? 방금 신지애 씨가 한 말 사실입니까?”

경찰이 사실을 따져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이봐요! 곽용진 씨, 대답 안 할 거예요. 이럴수록 본인만 더 곤란해집니다.”

“아, 아니에요. 전 그런 적 없습니다. 저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요!”

불과 몇 분 전까지 만해도 신지애의 이름을 부르며 걱정하던 곽용진은 펄쩍 뛰며 반박했다.

“그런 적이 없다니까 그럼 곽용진 씨는 떳떳하다는 말이네요.”

“네, 전 떳떳합니다. 한번 뒤져 보세요.”

당당한 태도에 경찰은 그의 몸은 수색했지만 세컨폰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 경찰들은 주차장에 있는 곽용진의 차를 수색했다.

“다들 바닥이랑 트렁크까지 샅샅이 뒤져.”

차 안에 숨길만 한 공간이란 공간은 전부 뒤졌지만, 세컨폰은 나오지 않았다.

“그거 보세요. 차에도 없잖아요. 제가 스토킹을 한 게 아니라 저 미친 여자가 망상에 빠져서 헛소리한 거라니까요.”

“거참! 시끄럽네. 곽용진 씨 일단 차에 태워.”

“알겠습니다.”

자꾸만 목소리를 높이는 곽용진과 함께 경찰 한 명이 함께 경찰차에 탑승했다.

“저기, 원장님. 죄송하지만, 진료실을 좀 찾아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찾아보세요.”

경찰은 곽용진이 있던 동선을 따라 모든 곳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가 있던 응급실과 보호자 대기실까지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진료실로 향했다.

경찰 두 명과 태경 그리고 최 팀장까지 더해 진료실을 이 잡듯 뒤졌다.

“근데 여기도 없으면 어떡하죠?”

“집 수색을 다시 하고 직장에도 가 봐야지.”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지던 그때였다.

“여기요!”

혹시나 싶은 태경이 엎드린 자세로 진료실 한쪽에 있는 책장 밑을 의료용 랜턴으로보다 소리쳤다.

“여기 뭔가 있어요.”

그 말에 경찰이 바닥에 얼굴을 대고 납작 엎드린 채 랜턴을 비추자 안쪽에 있던 핸드폰이 확연히 보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핸드폰이 맞네요.”

“아니, 그런데 아까 경찰분과 같이 있었다면서 어떻게 핸드폰이 저기 들어가 있을까요?”

옆에서 안절부절 상황을 살피던 최 팀장이 궁금한 듯 물었다.

“아마 무전을 치는 사이나 잠깐 안 볼 때 떨어뜨린 다음 다리를 이용해 책상 밑으로 보냈을 겁니다. 그나저나 원장님, 이거 책장을 옮기려면 책을 좀 꺼내야겠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당연하죠. 괜찮습니다.”

태경과 경찰들은 책장에 있는 책을 빼낸 뒤 책장을 옮겨 핸드폰을 확보했다.

“곽용진 씨 폰이 맞네요.”

지문 인식이 되어 있긴 했지만, 신지애가 말대로 아네모네 꽃 사진이 배경으로 되어있었다.

“이제 핸드폰만 확인하면 되겠네요.”

경찰들은 곧장 곽용진이 있는 차로 가서 계속해서 발뺌하던 그의 얼굴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이거, 그쪽 핸드폰 맞죠?”

“예? 아, 아닌데요?”

“그래요? 그럼 맞는지 아닌지 곽용진 씨 손가락 좀 여기 대보시죠. 확인 좀 해 보겠습니다.”

“아니. 왜 이래요. 내 폰 아니라니까 그러네. 변호사 불러…….”

절대 자기 핸드폰이 아니라고 우기던 곽용진의 입과 달리 그의 손가락은 정직했다.

“맞잖아!! 어!! 이래도 네 핸드폰이 아니라고. 시끄러우니까 입 닥치고 가만 있어.”

경찰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민망해진 곽용진은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다는 걸 자신도 깨달은 듯싶었다.

“확인해 봐.”

“네, 알겠습니다.”

선배 경찰의 말에 여자 경찰이 음소거를 한 뒤 핸드폰 안에 있는 영상을 확인했다. 그리고 몇 번 화면을 터치하자 문제의 동영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

그런데 경찰은 영상을 확인하자마자 경악하고 말았다.

신지애의 영상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의 영상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두 명이 아니었고, 꽤 많았다.

“야! 이 천하의 쓰레기 같은 놈아? 네가 이러고도 사람이니? 어? 김 경사님, 이 새끼 사람도 아닙니다.”

“고 순경? 참아! 열 받을 가치도 없는 놈이야. 세상이 진짜 말세다 말세야.”

경찰들은 곽용진의 본모습에 혀를 차며 분노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빨리 서로 이동하자고. 원장님, 오늘 정말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게 없는데요.”

“그런 소리 마세요. 신고부터 시작해서 정말이지 큰 도움 받았습니다.”

“저 나쁜 놈은 확실히 처벌받는 거죠?”

“그럼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작년에 디지털 성범죄가 처벌이 높아져서 이 정도면 빠져나가지도 못해요.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심신 안정이 필요한 피해자 조사는 신지애가 퇴원 후에 하기로 했다.

여자 경찰이 병실에 들러 앞으로의 일을 설명하고 그녀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들은 조언한 뒤, 경찰들은 경찰서로 출발했다.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지는 경찰차를 보던 태경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신지애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철컥-

“환자분, 몸은 좀 괜찮으세요?”

마음이 괜찮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설사로 힘들었을 몸이라도 괜찮으면 싶었다.

“네, 주사 맞고 수액도 맞고 있어서 그런지 처음 올 때보다는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아까 친구 온 거 갔던데 왜 혼자 있어요.”

“필요한 거 사러 간다고 잠깐 편의점 갔어요. 저기 선생님…….”

“할 말 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신지애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런 말 말아요. 고맙긴요. 환자분이 용기를 낸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된 거지 내가 도와준 건 없어요.”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아까 최모나 선생님께 들었어요. 손바닥에 적은 메시지도 그렇고 경찰 신고도 그렇고 저 도와주시려고 애쓰셨다고요. 제가 진짜 절박했거든요. 그런데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런 말이 위로될지는 모르겠지만, 지독한 악몽을 꿨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그저 몸이 회복되는 데 집중해요.”

“네, 안 그래도 저도 그렇게 생각하려고요. 솔직히 그 일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모든 사실을 말하고 나니까 한편으로 속은 후련해요.”

진짜 그랬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면 자신에게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경찰도 의료진들도 진심으로 도와주고 위로하는 모습을 보며 신지애는 묵직했던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요. 푹 쉬고 불편한 곳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해 줘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병실을 나온 태경도 마음이 가벼웠다.

혹시라도 신지애가 크게 상심하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씩씩해서 다행이었다.

병동 스테이션에 잠시 들른 태경은 응급실로 향했다.

“하! 진짜 싸이코네.”

“세상에 난 소름이 다 끼친다.”

“어쩜 본인이랑 그렇게 딱 맞는 꽃을 좋아했을까?”

“이 정도면 일부러 알고 좋아한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어요.”

응급실로 들어서자 스테이션에 있는 의료진의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어! 원장님 오셨어요? 환자분은 어때요?”

“괜찮아. 근데 뭐가 소름이 끼친다는 거야.”

“그 죽일 놈 말입니다.”

옆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던 최모나가 답했다.

“곽용진 그 사람?”

“네, 아까 경찰분도 그러는데 그놈이 핸드폰과 노트북에도 그렇고 집에도 아네모네 꽃이랑 그림이 꽤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게 왜?”

“최 쌤한테 듣고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 검색을 좀 해 봤거든요.”

임정숙 간호사가 말한 뒤 곧장 이찬희가 내용을 이어받았다.

“검색하다니 뭘?”

“제가 이래 봬도 어릴 때 코넌과 김젼일을 재미있게 봤거든요. 아! 우리 선생님 공부만 하셔서 뭔지 모르시겠구나. 그 범죄 추리로 유명한 만화책인데 이게 인기가…….”

“됐고! 얼른 요점만 말해.”

“네.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아네모네 꽃말을 찾아봤어요. 뭔가 느낌이 딱 오더라고요.”

“꽃말?”

“네, 그 꽃이 다른 꽃에 비해서 꽃말이 많기로 유명한데 그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비록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무섭네. 그놈이 정말 그걸 알고 좋아했다면 진짜 사이코다.”

“제가 보기에는 백 퍼센트 알고 그런 거예요.”

“뭐, 꽃말이 어찌 됐든 경찰에 잡혀가서 다행이네. 난 진료실 가 있을 테니까 응급 오면 콜해.”

“알겠습니다.”

“최 선생은 이따 새벽 회진 갈 때 신지애 환자 괜찮은지 한 번 더 체크해 봐.”

“네, 선생님.”

응급실을 나서는 태경은 오늘 있었던 일 때문인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제대로 사랑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그러지 못한 사람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안타까웠다.

‘진짜 별 거지 같은 놈이 다 있네.’

그래도 곽용진이 잡혀서 정말 다행이었고, 무엇보다 힘든 시간을 보낸 신지애의 몸과 마음이 빠르게 회복되길 바라며 그녀의 앞날에 행복만 가득하길 바랐다.

병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

환자들은 몸이 아파서 오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여러 사연과 함께 마음의 상처를 품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욕심일지 모르지만, 태경은 병원에 오는 환자들에게 아픈 몸뿐만 아니라 상처까지 치료해 주는 그런 의사이고 싶었다.

그래서 항상 이런 일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환자 일에 나섰는지도 몰랐다.

“오지랖이면 어떠냐. 이게 나란 사람인데…….”

누군가는 이런 모습을 보며 여전히 오지랖을 떤다고 욕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환자와 함께 울고 웃고 치료하는 게 가장 즐거웠기 때문이다.

“으하! 졸리네.”

태경은 기지개를 크게 켜며 진료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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