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누구도 예상치 못한 환자
고개를 푹 숙이며 돌아서는 나띠미의 아빠를 보며 의진은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고 싶었다.
‘잠시만요! 아버님, 후회하시죠?’
‘……!’
뜬금없는 질문에 눈물을 보이던 나띠미의 아빠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세상 어느 천지에 죽은 자식을 두고 후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는 흐르던 눈물이 뚝 끊길 만큼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선생님처럼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가난합니다.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화가 당연했고 우리 딸이 잘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쪽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내가 좋은 아빠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나띠미 제 딸입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못난 부모라도 죽은 딸 앞에 아무렇지 않을 놈은 없습니다.’
그는 속에 응어리진 마음을 터트리기라도 하듯이 쏟아냈다.
‘조금 전에 후회하느냐고 물었죠? 후회합니다. 제가 딸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후회스러워요.’
‘아버님께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요?’
‘네, 많이 힘들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아버님의 그 후회가 또다시 반복되면 안 되잖아요. 남은 아이들은 더 이상 조혼을 강행하지 말아 주세요.’
부모에게는 딸이 몇 명 더 있었다. 의진은 나띠미의 여동생들이 더 이상 이런 일을 겪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이방인이 제가 이런 부탁을 드린다는 게 불편하시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이들을 사랑하신다면 나띠미를 생각해서라도…….’
‘안 하겠습니다.’
‘네?’
‘선생님 말씀대로 나띠미를 생각해서라도 남은 딸들은 조혼을 시키지 않겠습니다.’
어린 딸의 결혼식이 끝나고 늙은 남편을 따라 가기 전, 나띠미가 했던 말이 있었다.
‘아빠, 내가 결혼하니까 대신 동생들은 시키지 마. 그냥 가족들이랑 행복하게 살게 해 주세요.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 평범하게 결혼하게 해 주세요.’
잊고 있던 말이었는데 의진의 부탁이란 소리에 불현듯 떠올랐다. 눈물이 멈췄던 아이의 아빠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제가 정말 나쁜 놈이 맞네요. 동생들은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할게요. 나띠미의 부탁이니까요.’
‘믿을게요. 꼭 지켜 주세요.’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드릴 게 있었는데 깜빡했네요.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뭔가요?’
아이의 아빠가 주머니에서 꺼낸 건 하늘색 색종이로 접은 하트였다.
나띠미에게 처음으로 알려 주었던 종이접기가 바로 하트 접기였다.
‘한 번 열어 보세요.’
그 말에 의진은 천천히 하트를 열어 보다 색종이 안쪽을 확인하고는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마치 한글을 처음 써 보는 듯한 어색하고 삐뚤빼뚤한 글자로 ‘의진 언니 고마워요.’라고 쓰여 있었다.
아이의 아빠는 나띠미가 결혼하기 전에 집에서 한글 공부도 하면서 종이접기를 했다고 전했다.
아마도 의진에게 고마웠던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던 거 같았다.
‘선생님께서 딸에게 좋은 기억을 많이 주신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떠나신다는 말 들었는데 항상 건강하세요.’
아이 아빠의 마지막 인사에 화답하지 못한 의진은 그 자리에서 또다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사연을 전부 말한 의진은 아이 생각이 난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태경 역시 그랬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네. 힘들었겠다.”
천천히 침묵을 깬 태경이 의진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아이 아빠가 한 일이 결코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 아빠 말이야. 정말로 약속을 지켰을까?”
“솔직히 저도 반신반의했는데 지켰더라고요. 나중에 한국 들어오고 통역 선생님께 메일을 받았는데 동생들은 조혼을 시키지 않았대요.”
“약속을 지켜 줘서 다행이네. 진료실 액자 속에 있는 그 아이 맞지?”
“네, 맞아요.”
“잠시만.”
Rrrrrrrr
“환자요?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태경은 대화를 하던 중 콜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자 왔대요?”
“응. 그나저나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뒷정리 때문에 그러시죠? 환자 콜 왔는데 이게 문제예요. 얼른 가 보세요.”
“그래, 아! 맞다. 의진아?”
태경은 의국실을 나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춰 고개를 돌렸다.
“네, 선배.”
“고마워.”
“고맙긴요. 선배가 야식까지 사 주셨는데 이건 제가 치워야죠. 다음에는 제가 야식 쏠게요.”
“아니, 그거 말고. 쉽지 않았을 텐데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고.”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많이 힘들었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별말씀을요. 솔직히 저도 털어놓으니까 홀가분해요. 언제가 선배한테는 꼭 말하고 싶었거든요.”
“그래, 잘했어. 그런데 의진아. 네가 정말로 싫은 게 아니라면 나는 천천히 다시 했으면 좋겠어.”
주어가 빠진 말이었지만, 의진은 태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산부인과 진료에 관한 이야기였다.
“실은 저도 선배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까 싶었어요.”
“물론 그렇다고 당장 진료를 시작하자는 건 아니야.”
“알죠.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요.”
의진이 스스로 이야기를 꺼냈다는 자체가 뭔가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했다.
다급하게 밀어붙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운은 띄우고 싶었다.
게다가 지금도 그녀가 가끔 산부인과 관련 서적과 논문을 보고 있다는 걸 태경은 알고 있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마. 난 항상 네 의견을 존중하니까 무조건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그럼 지금 그 말은 원장님으로서 하는 말이에요. 아니면 의사 선배로서 하는 말이에요?”
“둘 다 아닌데?”
“네?”
“원장도 선배도 아닌 널 아끼는 사람으로서 한 말이야.”
Rrrrrrrrrrr
“어! 또 콜 들어온다. 가 볼게. 이따 보자.”
“……네.”
태경이 의국실을 나간 뒤 의진은 주변을 정리하고 혼잣말을 하며 진료실로 향했다.
“가만 보며 선배는 멋진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잘한다니까.”
철컥-
“아고! 배부르다.”
책상 의자에 털썩 기대앉은 의진은 한쪽에 있는 작은 액자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내가 다시 잘할 수 있을까? 언니 좀 응원해 줘.”
하늘색 하트 색종이가 붙은 작은 액자 속에는 눈부시도록 밝게 웃는 나띠미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찍혀 있었다.
* * *
“원장님, 저 결과는 어떻게 나왔나요?”
“검사할 때 대장 용종 제거한 거는 기억하시죠?”
태경은 진료실 모니터를 보며 중년 남자 질문에 답했다.
“그럼요.”
“제가 그때 말씀드린 대로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저 설마! 암인가요?”
“아니요. 조직 검사 결과도 이상 없어요.”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여기 보이시죠? 그때 용종을 꽤 많이 제거했어요.”
“제 말이 그겁니다. 저 올해 46살인데 나이에 비해 용종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남자는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대장 내시경 화면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요즘에는 20대에도 대장암에 걸리는 경우도 있어요. 사실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중요하죠. 그런데 우리 환자분은 술, 담배 다 하시잖아요?”
태경의 말에 남자는 머쓱한 듯 슬쩍 시선을 피했다.
“거기에 주로 고기 위주로 식사하고 채소는 잘 안 드시고요.”
“그, 그거야 직장 생활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거 풀려고 부어라 마셔라…….”
“관리하셔야 해요. 이러다 정말 큰일 납니다.”
“네……. 관리하겠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태경의 말에 남자는 꼬리를 내렸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예요. 고혈압에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잖아요. 건강은 기다려 주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원장님께서 정색하고 말씀하시니까 겁이 나네요.”
“그러니까 관리하세요. 아셨죠?”
“알겠습니다. 부탁이 있는데요. 우리 마누라가 물어보면 용종 제거했다는 소리는 비밀로 해 주세요. 알면 기겁을 하면서 한 달 동안 잔소리 폭격 맞습니다. 저 뼈도 못 추립니다.”
“대신 관리 꼭 하시고 다음 달까지 3kg 체중 감량하시면 말 안 할게요.”
“무조건 하겠습니다. 제가 마누라가 따라올까 봐 무서워서 미국 출장 가는데 이 새벽에 병원부터 들렀잖아요.”
남자는 커다란 캐리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결과가 좋다니 편한 마음으로 출장 갈 수 있겠네요.”
“너무 기름진 음식 많이 드시지 마세요.”
“그럼요. 토끼 새끼처럼 풀만 먹고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잘 다녀오세요.”
함께 진료실을 나와 환자를 배웅한 태경은 잠깐 누워있기 위해 의국실로 향했다.
통이 트기 전 이 시간이 환자가 가장 뜸한 시간이기에 잠시 눈을 붙이기 좋았다.
철컥!
“그건 아니요!”
안으로 들어가자 이찬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깻잎 떼어 주다 눈이라도 맞으면요?”
“그거 너무 과한데?”
“그러니까. 이 쌤 그거 오버야.”
이찬희의 말에 의진과 최모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에헤이! 두 분 다 너무 모르시네. 깻잎이 이렇게 위험하다니까요.”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야?”
침대에 털썩 앉은 태경이 대화에 합류했다.
“깻잎이 위험하다니 무슨 엉뚱한 소리야? 이찬희, 너 졸리면 얼른 자.”
“우리 선생님 반응 보니까 깻잎 논쟁 모르시네.”
“분모자도 오늘 아셨단다.”
“깻잎 논쟁은 또 뭐야? 뭐, 신조어야? 설마 먹는 깻잎 말하는 건 아니지?”
“그 깻잎 말하는 거 맞습니다. 요즘 깻잎 때문에 장안에 화제가 장난 아닙니다.”
“아니, 밥반찬이 논쟁거리가 될 만한 게 뭐가 있다고 깻잎 논쟁이야.”
도무지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건지 태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최 쌤 말대로 요즘 이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런 분이 여기 계셨네요.”
“그러지 말고 이 쌤이 설명 좀 해 드려.”
의진의 말에 이찬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깻잎 논쟁은 말이죠. 예를 들어 선생님과 여자 친구, 그리고 선생님의 친구분까지 이렇게 세 분이 식사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반찬으로 양념 깻잎지가 나왔는데 친구가 혼자서 깻잎을 못 떼어 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때 선생님의 여자 친구가 고군분투하는 친구의 깻잎을 젓가락으로 지그시 눌러서 도와주는 겁니다. 이때 선생님은 여자 친구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뭔 소리야? 깻잎 떼어 준 게 뭐가 어때서 그래.”
“아니죠! 단순히 깻잎을 떼어 준 게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깻잎을 떼어 주던 그 순간…….”
이찬희가 열변을 토하던 바로 그때였다.
철컥-
“선생님!”
임정숙 간호사가 다급한 얼굴을 한 채 의국실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막내 간호사가 뒤따라 들어왔다.
“선생님 어떡하죠? 일이 좀 생겼어요.”
“일이 생기다니요. 응급환자예요?”
“네, 그런데 환자분이 산모인데 아이가 곧 나올 거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