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61화 (261/472)

261화. 위험한 상황

태경을 비롯한 모든 의료진의 시선을 받던 의진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일단, 우선 그냥 닫을게요. 봉합할 거 주세요.”

불안해하는 태경을 바라보는 의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봉합하기 위해 들고 있던 바늘과 실을 내려놓았다.

“정 선생?”

의아한 태경이 바라보자 그 시선을 의식한 의진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았다.

“잠깐, 통화 좀 할게요.”

이번에도 역시 은사님에게 통화를 하러 가는 걸 거다.

산부인과나 외과와 같이 수술하는 과들은 교육하면서 스승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분에게 지도받으면서 평생 유대 관계를 이어 가고는 한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이 새벽에 연락하기 건 분명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의진에게 시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산모의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태경 역시 저런 적이 있었기에 후배의 저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어렵고 위급한데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말이다.

지금 누구보다 의진이 마음이 제일 간절하고 복잡할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심정도 이렇게 애가 타는데 집도의인 본인은 그 마음이 말도 못 할 것이다.

태경은 학생 때 모든 과를 다 배웠지만, 너무 오래돼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은 외과의로서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으으!”

지금도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 가는 환자를 보자니 마음이 아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고통받는 환자를 도와주고 싶었다.

현실적으로 이 상황에서 태경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환자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시도는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환자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해.’

무엇보다 산모의 상태도 안 좋았고, 그에 따른 다섯 번째 바이탈의 냄새도 지독했다.

산모는 아직 막내딸의 얼굴도 마음 놓고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

태경은 고군분투하는 의진을 도와 환자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 환자를 위해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시도해 보자.’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를 위해 태경은 뭔가 결심했다.

“서, 선생님. 지금 뭐 하세요?”

옆에 있던 간호사가 태경의 행동을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

“잠시만요.”

거즈로 출혈을 막고 있던 태경이 자신의 손을 산모의 자궁 깊숙하게 넣었다.

그것도 도구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손만을 집어넣은 것이다.

곁에 있던 간호사들은 도구가 아닌 손만을 집어넣은 모습에 약간 당황했다.

아무리 수술을 잘하고 실력이 좋은 태경이라 해도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산부인과 의사가 아닌 외과 의사가 알지도 못하면서 시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태경은 산부인과 지식은 없지만, 수많은 수술 경험으로 손끝에도 또 하나의 눈이 달린 외과의였다.

그의 손끝에는 타고난 감각이 있었다.

‘분명히 후사를 하는 느낌이 이렇게……. 이쪽인가. 응!?’

손끝에 집중하던 태경은 순간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얇은 막이 점차 뜯어지다가 점점 두꺼워지는 느낌이었다.

‘이거다! 확실해.’

현재 자궁 안에서 이렇게 길게 뜯어질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머!”

“세상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간호사들이 전부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산모 주변에서 풍기던 4단계 짙은 포르말린 냄새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수술방에서 위급한 환자를 수술할 때 포르말린 냄새를 숱하게 맡았지만, 지금처럼 저 냄새가 싫은 건 처음이었다.

모든 환자가 다 소중하지만, 아마도 지금 이 환자가 산모였기에 그만큼 더 마음이 간절했던 거 같았다.

“잔류태반 거의 다 나온 것 같죠?”

“뭐라고요?”

통화를 마치고 다시 한번 시도하기 위해 들어오던 의진은 간호사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급하게 뛰어오며 말했다.

“……!”

그리고 태경의 손에 들려 있는 나머지 태반의 대부분을 보고 본인도 모르게 잔뜩 긴장된 표정이 풀어졌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아직 끝난 거 아니지?”

“네, 그럼요. 하지만 잔류태반 제거로 출혈 가능성은 크게 줄었고 환자에게 응급 수술의 필요성 또한 줄었어요.”

의진과 태경의 표정에서 느껴지던 긴장감이 한결 편안해졌다.

“자궁수축제 더 주고 수혈한 뒤 밤사이 지켜볼게요. 환자분, 고생 많으셨죠?”

태경과 대화하던 의진은 고통으로 정신이 없던 환자에게 지금까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며 위로했다.

“정말 애쓰셨어요. 그리고 예쁜 공주님은 건강하게 잘 나왔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지금은 산모님 몸 회복에 신경 쓰세요.”

“네, 감사……합니다.”

산모는 기운이 없는 목소리로 의진과 태경에게 눈을 맞추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제가 넷째 출산이라 좀 마음을 편하게 먹었던 거 같아요. 아까 병원 이송할 때부터 겁이 났는데 아파서 정신이 없었거든요. 두 분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려요.”

“아니에요. 환자분이 고생하셨어요.”

“그럼요. 감사라니 그런 말 마세요. 방금 우리 정 선생님 말대로 환자분이 애쓰셨죠.”

의진에 이어 태경도 환자를 위로하고 나섰다.

“우선 큰 걱정은 덜었어요. 물론 출혈 위험이 있지만, 잘 넘기도록 정 선생님 제가 잘 지켜볼 겁니다.”

“네…….”

“원장님 말씀대로 앞으로 저랑 우리 의료진이 수시로 확인할게요. 그리고 출혈이 잘 멈추고 이제 출산 이후에 자궁이 돌아오면 그때 근종 제거할게요. 긴 시간 너무 고생하셨어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의진의 진심 어린 위로와 설명을 듣던 산모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감더니 눈물을 흘렸다.

아마 같이 고생한 의료진에게 고마운 마음과 함께 위로의 말을 듣고서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경과 의진도 코끝이 찡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렸다.

“자! RBC 2팩 주세요. 우선 하트만 솔루션 300 full drop(조절하지 않고 그대로 혈관에 흘려보냄) 해 주시고, 시간당 소변량 측정해서 노티 해 주세요. 그리고 혹시 바이탈 흔들리면 바로 연락하세요.”

“네, 선생님. 알겠습니다.”

“산모님, 또 뵐게요.”

“네, 선생님. 수고하셨어요.”

나머지 오더를 내린 의진은 태경과 함께 수술복을 벗고 분만실에서 나왔다. 그 뒤, 두 사람은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보호자 대기실로 향했다.

“선생님!?”

두 사람을 보자마자 산모의 남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가왔다. 그리고 마치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삼 형제 역시 쪼르르 다가와 할머니와 함께 긴장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우리 아내는 괘, 괜찮은 거죠?”

“네, 일단 고비는 넘겼고 아이도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산모님이 잘 견뎌 줬어요.”

의진은 걱정했을 가족들에게 산모의 상태를 꼼꼼하게 알려 줬다.

“저랑 원장님이 잘 지켜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이고! 우리 딸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라도 잘못되는 건 아닐까 하고 마음 졸였던 남편과 장모는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감사합니다.”

듬직한 첫째도 까불이 둘째도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저도요. 저도 감사해요.”

“다들 고마워요.”

“……저기 선생님?”

그리고 가족들 사이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던 순둥이 셋째가 의진의 가운 끝자락을 잡아당기며 조심스럽게 불렀다.

“응. 우리 친구 할 말 있어?”

의진이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우리 엄마랑 막내 그니까 소엘이도 괜찮은 거죠?”

아직 어린 초등학생인 셋째는 엄마와 막내 여동생이 어찌나 걱정됐던지 커다란 눈망울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아빠 할머니 그리고 형들 못지않게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여동생 이름이 소엘이야?”

“네, 이소엘이에요. 저는 오빠 이우주고요, 둘째 형 이름은 이우선 큰형은 이우민이에요.”

“다들 이름이 너무 멋지고 예쁘다. 소엘이랑 엄마는 괜찮아. 우리 우주가 걱정이 많았구나. 기특해라.”

“정말이죠? 엄마랑 소엘이 괜찮은 거죠?”

“그럼. 괜찮지. 이제 우주가 오빠 됐네?”

“네, 오빠 됐으니까 동생도 잘 보고 엄마 아빠 말씀도 잘 듣고 그럴 거예요.”

“우와! 우리 우주 진짜 대단하다. 선생님이 보니까 진짜 멋진 오빠가 될 거 같은데?”

“감사합니다. 그리고 선생님도 감사합니다.”

셋째는 의진과 태경에게 공존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대기실에 모인 어른들은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선생님, 이거 받으세요.”

아이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작은 스티커를 의진에게 건넸다.

“제가 가장 아끼는 건데요. 이 캐릭터가 마법을 부려서 사람들 도와주거든요. 선생님과 닮았어요.”

엄마와 동생을 도와줬다는 마음에 셋째는 가장 아끼는 스티커를 선물로 주고 싶어 했다.

“세상에 고마워라.”

“선생님이 여기다 붙이고 앞으로 더 열심히 사람들 도와줄게.”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거절하고 싶지 않던 의진은 가운 한쪽에 스티커를 붙였고, 우주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주 나중에 또 보자.”

“네, 선생님.”

“그럼, 또 뵙겠습니다.”

가족들과 인사 후 임정숙 간호사가 들어와 면회에 관해 이야기를 해 주고 두 사람은 대기실을 나왔다.

그 후, 한 시간 뒤 태경과 의진은 다시 산모의 상태를 확인했고 다행히 더 좋아졌다.

산모의 곁에서 맴돌던 지독한 다섯 번째 바이탈 냄새도 사라지고 2단계를 띠고 있었다.

“산모님, 쉬고 계세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철컥-

“커피 한잔할래?”

“좋죠.”

태경이 커피를 뽑는 동안 의진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

이제야 온몸을 돌아다니던 모든 긴장감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힘들었지?”

“다리에 힘이 다 풀리는 거 같아요. 아까는 진짜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했다니까요. 내가 괜히 욕심이 앞섰던 건 아닐까? 그냥 받지 않았던 게 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건 아니지.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오지 말라고 했으면 저 환자는 더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을 거야.”

후배를 위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만약 의진이 분만을 하지 않았다면 저 상태로 출산이 임박했던 산모는 거리가 먼 대학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쉽지 않은 상황인데 고생했어.”

“아니에요. 선배 덕분에 큰 걱정도 덜었어요. 감사해요.”

“무슨 소리야. 너 오늘 충분히 잘했어.”

“생각보다 어려운 케이스였긴 했는데, 산모님이 출산을 잘하셔서 다행인 거 같아요.”

“그렇지. 근데 아까 아이 나올 때 말이야. 그때 기분이 참 묘하고 뭐랄까? 감동적이고 참 신비한 거 같더라.”

“그렇죠? 원래 그래요. 사실 저도 분만은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아이를 딱 받자마자 잊고 있던 그 기분이 확 살아나더라고요.”

산모 때문에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지만, 의진 역시 그 순간이 감동적인 건 똑같았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은 차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과 감동임은 틀림없었다.

“선배? 앞으로 틈틈이 공부도 하고 학회도 다시 나가고 그러고 시작할게요.”

“그래.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 봐. 대신 무리는 하지 마.”

“그 말, 제가 매일 선배한테 하는 말인 거 아시죠?”

“그랬던가? 모르겠네.”

“제가 매일 무리하지 말라고 해도 안 들으시니까 그렇죠.”

“오늘따라 커피가 더 맛있네. 안 그래?”

“말 돌리지 마시고요.”

“말은 물건이 아닌데 어떻게 돌리지?”

“아으! 재미없어. 선배 은근히 썰렁한 거 알아요?”

“그럴 리가. 내가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장난을 치며 의국실로 향했다.

의진은 처음 아기를 받았던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더 잊을 수 없던 경험이었다. 그런데 오늘 또 그때와 같은 기분과 감정을 느꼈다.

아마 오랜만에 아이를 받아서일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이 산부인과 의사로서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취과 일도 산부인과 일도 더 열심히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경과 함께 정문을 지나던 의진은 까만 새벽을 몰아내고 밝아진 하늘을 보며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피곤하지만 어느 때보다 뿌듯했다.

그리고 가운에 붙인 스티커를 보며 처음 인턴을 시작할 때 했던 다짐을 또다시 생각했다.

‘환자한테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되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