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전 세계 단 하나뿐인
“나 회진 돌고 올게.”
“네, 선생님.”
의료진과 직원 전체 회의를 마친 태경은 병동 회진을 돌고 있었다.
오전 시간에는 응급실 환자도 외래 환자도 여유가 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회진하기 편했다.
무엇보다 환자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주고 대화를 할 수 있어서 태경은 이 시간에 회진하는 걸 선호했다.
특히 오늘은 다른 날보다 여유가 있어 마음도 편했다.
철컥-
“안녕하세요. 산모님.”
차례차례 병실을 돌던 태경은 이틀 전 출산을 한 최미나 환자의 병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분만실에서 힘들었던 산모는 그사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그녀는 활짝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좀 어떠세요?”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는데 안 좋을 수가 있나요? 좋아요.”
“수술은 아마 좀 더 이따 하실 거예요. 수술 건에 대해서는 주치의 선생님께 들으셨죠?”
“네, 아까 정 선생님께 들었어요. 퇴원하고 제 상태 봐 가면서 한 달이나 두 달 있다가 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정 선생님이 많이 신경 쓰고 있으니까 수술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요.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확인해 주시고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자주 오셔서 물어봐 주시는데 정말 감사할 뿐이에요.”
산모의 말대로 의진은 거의 시간이 날 때마다 산모와 아이를 확인하며 꼼꼼히 살폈다.
산모는 그런 의진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아이가 정말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저도 제 딸이지만 너무 예뻐서 보러 갈 때마다 깜짝 놀란다니까요. 어떻게 저랑 남편 사이에서 이런 공주님이 나왔다 싶다니까요.”
아이를 칭찬하는 말이 나오자 최미나는 엄마답게 가장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오빠들이 다 좋아하죠?”
“말도 마세요. 셋 다 좋아서 어쩔 줄 몰라요. 다들 여동생 생겼다고 아주 신났어요. 남편 말로는 셋째가 가장 달라진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넷째가 태어나기 전 아직 막내였던 셋째는 여동생이 태어나자 한껏 의젓한 모습을 보인다고 전했다.
“이제부터 자기가 오빠니까 달라져야 한대요. 남편이 그러는데 자고 일어나면 이불 정리도 잘하고 청소도 혼자 하겠다고 그랬대요.”
“우주가 아주 멋진 오빠가 되겠네요.”
“네,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아이 하나를 키우는 것도 쉽지 않은데 산모님과 남편분이 참 대단하세요.”
“안 그래도 여기 선생님들이 볼 때마다 대단하다고 하시는데 전혀 그렇지도 않아요. 남편과 제가 아이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솔직히 목숨 걸고 아이 낳고 키우는 게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아이들 때문에 힘든 세상 살아가는 거라서 저희는 오히려 애들한테 고마워요.”
아이들을 생각하는 최미나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하긴, 아이들처럼 사랑스러운 존재는 없죠.”
“맞아요. 실례지만 원장님은 아직 결혼 전이시죠?”
“네, 아직 전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결혼하시고 아이 많이 낳으세요.”
“예, 알겠습니다. 꼭 그럴게요. 그럼 쉬세요.”
최미나의 병실을 나온 태경은 마지막으로 얼마 전에 위암 수술을 받은 아랍에미리트 왕족 하마드의 회진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병실을 향해 걸어가던 그는 좀 더 천천히 걸어가더니 병실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며 고민했다.
“그냥 가고 이따 오후에 올까?”
태경은 아무리 바빠도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회진을 도는 의사였다. 게다가 지금 회진은 환자와의 적극적인 소통이 가능해서 단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그 정도로 회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환자의 회진을 패스하려 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가? 말아? 회복도 잘되고 있고 특이사항도 없으니까 저녁에 와도 괜찮겠지? 하!”
“오늘도 들어갈까 말까 고민 중이세요?”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민하는 태경을 보며 병동에서 일을 보던 임정숙 간호사가 웃으며 다가왔다.
“웃지 마세요. 심각합니다.”
처음 태경이 회진을 피하는 모습을 보고 임정숙 간호사 역시 깜짝 놀랐었다. 하지만 그 사정을 알고 나니 하마드 병실 앞에 서 있는 태경만 보며 웃음이 났다.
“그게 아니라 선생님이 오죽하면 회진을 다 피할까 싶어서 자꾸 웃음이 나네요.”
“전 진지하다고요.”
“설마 또 그러기야 하겠어요.”
“하긴, 그렇게 거절했는데 또 그러지는 않겠죠.”
“그럼요. 그리고 지금 회진 안 하고 가시면 선생님 기분이 좀 찝찝하시잖아요.”
임정숙 간호사는 태경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그러니까요. 그리고 하마드 씨가 본인만 회진 안 온 거 알면 엄청 서운해할 거예요.”
“그렇겠네요. 그럼 오늘은 아무 일이 없길 바라며……. 갔다 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철컥-
“수 쌤, 들어가셨어요?”
태경이 하마드의 병실을 들어가고 1층으로 내려온 임정숙 간호사를 보며 이찬희가 물었다.
“네, 들어가셨어요.”
“과연 오늘은 어떤 게 나올까요?”
“글쎄요. 근데 제 생각에 오늘은 아무 이벤트가 없을 거 같은데요?”
“아니요. 전 오늘도 뭔가 있을 거 같아요.”
“그건 이 선생님 말이 맞아요.”
한쪽에서 일을 보던 최 팀장이 두 사람에 대화에 합류했다.
“왕족 클래스가 있지, 몇 번 거절당했다고 여기서 멈추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죠. 전, 수 쌤 의견에 한 표입니다.”
세 사람의 알 수 없는 대화가 이어지던 가운데 이번에는 의진이 한마디를 던졌다.
“지금까지 의사로서 제 경험을 빗대 말을 하자면 이제는 그만할 때 됐어요. 보통 이 정도 거절하면 민망해서라도 안 그래요.”
“그 말인즉 선생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는 거네요?”
“예전에 대학병원에 있었을 때 그때 한 번 있었어.”
“오! 정말이세요? 대박. 근데 왜 나는 아직 한 번도 없지?”
“아직 이 선생 실력이 환자가 감동할 정도는 아닌가 보네.”
때마침 응급실로 향하던 최모나가 시크한 표정으로 이찬희에게 말했다.
“야! 개모나 너 일로 와 봐.”
“응. 안 가.”
“너, 이따 보자.”
“자! 그럴 게 아니라 이러지 말고 우리 내기하면 어떨까요? 진 팀이 오늘 간식 쏘기. 다들 어때요?”
“그거 좋은데요?”
“콜!”
최 팀장의 말에 다들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눈을 반짝였다.
“난, 한다.”
“전, 안 한다는 것에 한 표요.”
“정 선생님과 임 선생은 ‘안 한다.’에 한 표고 나랑 이 선생님은 ‘한다.’에 걸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내가 한 바퀴 쫙 돌면서 나머지 직원들의 의견을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최 팀장은 그 뒤 메모지를 들고 다니면서 병원 내 있는 모든 직원에게 의견을 묻고 다녔다.
“전, 한다요.”
“원장님 아직 안 나오셨죠?”
“네, 그러지 않아도 조금 전에 원장님 병실 들어가셔서 계속 주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모든 직원은 최 팀장이 의견을 물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답하며 하마드 회진에 관심을 보였다.
* * *
그 시각 태경은 하마드의 회진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시죠?”
“없습니다.”
하마드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답하자 옆에 있던 통역사가 말을 전했다.
“수술한 곳도 좋고 뭐든 게 다 좋습니다. 무엇보다 할랄 음식까지 주셔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닙니다. 아플 때는 입에 맞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식당 담당자분이 신경을 쓰셨어요.”
주방장 오계순은 아랍에미리트 사람인 하마드를 생각하며 그들이 먹을 수 있는 할랄 음식을 직접 만들어 제공했다.
“그분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그럴게요. 그럼 다음 회진 때 뵐게요.”
“Doctor, Kim? Stop!”
태경이 빠르게 병실을 나가려고 하자 하마드가 통역사를 거치지 않고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환자분, 혹시 할 말 있으세요?”
태경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네,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그동안 제가 생각이 짧았던 거 같습니다.”
통역사의 말이 끝나자 베드에 앉아있던 하마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선생님을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아닙니다.”
구구절절 정중하게 쏟아지는 말을 듣고 있던 태경은 이제야 안도하며 표정이 밝아졌다.
사실 요즘 하마드 때문에 곤란한 게 말이 아니었다.
처음 시작은 며칠 전 회진을 할 때였다.
‘제가 선생님께 드릴 게 있습니다.’
‘저한테요?’
‘네, 선생님께서 보여 주신 따뜻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어서요.’
위암 수술 후 하마드는 수행원인 오마르에게 태경에게 보답하고 싶다며 그에게 줄 선물을 알아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오마르는 그때부터 어떤 선물이 좋을지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알아본 뒤 하마드에게 전달했다.
‘이거 받아 주세요.’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상자를 받은 태경은 그걸 열어 보자 깜짝 놀랐다.
‘……!’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건 억 소리가 절로 나는 유명 외제차의 차 키였다. 그것도 전 세계 몇 대 없는 일반 사람은 구하기도 힘든 그런 차였다.
‘어떻게 마음에 드십니까?’
‘저기 환자분? 절 생각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이걸 받을 순 없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한껏 들뜬 하마드와 오마르의 기대와 달리 태경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두 사람은 당황했지만, 평소 태경의 성격으로는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하마드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선생님께서 거절하셨는데요?’
‘오마르, 다른 것도 준비됐지?’
‘물론입니다.’
‘그럼 다음에는 그걸로 준비해.’
‘알겠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아랑곳하지 않던 하마드는 이틀 뒤 회진 때 다른 선물을 준비했다.
그건 청진기였다.
의사에게 필요한 필수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하마드가 준비한 청진기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평소에도 차를 탈 일이 많지 않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필요한 걸 준비했습니다.’
들숨과 날숨에도 돈 냄새가 날 것 같은 그가 준비한 청진기는 무려 다이아몬드가 박힌 청진기였다.
환자의 상태를 들을 수 있는 양쪽 귀관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 때문에 눈이 부셔 청진기를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정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어떻습니까? 제가 직접 선생님을 위해 제작한 전 세계 단 하나뿐인 청진기입니다.’
‘대단히 감사하지만, 전 이거면 충분합니다.’
역시나 태경은 자신의 청진기를 보이며 정중한 인사와 함께 거절했다. 그 뒤로도 하마드의 선물은 끊이지 않았다.
구하기도 힘든 초고가 시계부터 영화에서나 보던 금괴까지 가져온 날도 있었다.
계속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은 선물 공세에 태경은 민망하고 난감한 상태였다.
그렇게 이제 그만 하마드가 포기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병실로 들어왔는데, 조금 전 그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제는 포기한 듯싶었다.
정말이지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요즘 저 때문에 많이 곤란하셨죠?”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실례를 한 거 같더군요. 제 뜻은 그게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죄송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괜찮습니다.”
“선생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제가 내일 퇴원을 합니다.”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퇴원하면 한국 정부와의 일을 마무리하고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돌아가는 건 너무 아쉽더라고요.”
“……!”
“누가 너의 생명을 구해 줬으면 반드시 상대에게 똑같이 정성을 다해 갚아라. 오래전부터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지나가는 건 집안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자 태경은 하마드의 선물 공세가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건 아닌데…….’
그런데 그가 내민 건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달랐다.
“정말 제 마음을 담았습니다. 선생님 이건 꼭 받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