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63화 (263/472)

263화. 부산행

‘이건 아닌데…….’

그런데 그가 내민 건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달랐다.

“정말 제 마음을 담았습니다. 선생님, 이건 꼭 받아 주세요.”

하마드는 손에는 작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정말 다른 제 성의라고 생각해 주세요.”

“환자분께서 저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제가 앞에도 계속 말씀드렸지만 저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걸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환자분에게 선물을 받기 위해 수술을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환자분을 더 특별하게 봐 드린 것도 없습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게 저한테는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선물은 받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모든 환자에게 똑같이 대한다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그리고 방금 하신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더더욱 서운합니다. 지금 선생님께서는 다른 환자와 저를 차별하고 계시거든요.”

“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태경은 하마드의 말에 당황하며 되물었다.

“차별? 제가 환자분을 차별하고 있다고요?”

“네, 그동안 저 때문에 무조건 거절하시는 건 이해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게 뭔 줄 아십니까?”

하마드는 손에 든 봉투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편지입니다. 그것도 제가 직접 쓴 편지라고요.”

항상 상상을 초월하는 선물을 준비했기에 태경은 확인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거절했다. 그런데 편지를 준비했다는 그의 말이 상당히 의외였다.

“우리 병원에 처음 와서 선생님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인상 깊게 본 게 있었습니다.”

그날 정신이 없던 와중에도 하마드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으니 바로 환자들에게 받은 것들이었다.

인형부터 편지, 아이의 그림 등 지금까지 환자들이 준 뜻깊은 선물을 태경은 진료실 곳곳에 두었다.

하마드는 진짜 마음이 담긴 것이 뭘까 고민하다 진료실에서 봤던 것들이 떠올라 편지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제가 우리 와이프랑 부모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처음 쓴 편지인데 이래도 거절하시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이런 귀한 선물은 거절하면 안 되죠.”

“그럼 제 마음 받아주시는 거죠?”

“물론이죠. 이런 선물은 얼마든지 받습니다.”

태경이 기분 좋게 편지 봉투를 잡은 바로 그 순간,

“잠시만요!”

하마드가 쥐고 있던 편지 봉투를 뒤로 살짝 뺐다.

“선생님 혹시 제 앞에서 민망하게 편지를 읽지는 않으실 거죠?”

“그럼요. 저도 환자분 앞에서 읽는 건 부끄럽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냥 제가 감사한 마음 몇 자 적었습니다.”

“네, 그 마음 잘 받겠습니다.”

“그럼, 내일 퇴원하실 때 뵐게요.”

“네. 그때 뵙겠습니다.”

태경은 하마드와 인사를 한 뒤 병실로 나왔다.

“원장님?”

병실 스테이션에서 눈이 빠지게 태경을 기다리던 최 팀장이 빠르게 다가왔다.

“혹시 오늘도 환자분이 선물을 준비했나요?”

“네, 그것도 아주 예상 못한 선물을 준비했더라고요.”

‘예쓰!’

그 말은 들은 최 팀장은 주먹을 살짝 흔들며 내기에서 이긴 걸 속으로 기뻐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떤 선물이었나요?”

“지금까지 중에 가장 특별한 선물이라고나 할까요.”

“가장 특별한 거라면? 혹시 본국의 있는 석유 지분이라도 받으신 건가요?”

“아니요. 이겁니다.”

“이게 뭔가요?”

“편지요.”

“네!? 편지요오? 고작 편지…….”

지금까지 워낙 대단한 선물만 준비했던 하마드가 달랑 편지 하나만 줬다는 말에 최 팀장은 대놓고 실망한 눈치였다.

“원장님? 정말 하마드 씨가 편지만 준 게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마음이 편한 태경은 곧장 진료실로 향했다.

철컥-

“가만있자……. 편지를 아랍어로 쓴 거 아니겠지? 에이, 설마. 어디 한 번 볼까?”

뭔가 이 상황이 웃겼던 태경은 피식 웃더니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봉투 안에 종이를 꺼내려던 바로 그때였다.

Rrrrrrrrr

책상 위에 있던 핸드폰이 격하게 진동하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051-xxx-xxxx

051은 부산의 지역번호였다.

“네, 여보세요.”

부산에서 전화 올 곳이 없는 태경은 처음 보는 번호에 편지 봉투를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전화를 받았지만, 건너편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태경이 한 번 더 말했다. 그런데 거리감이 느껴지는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전화를 건 장소를 유추할 수 있었다.

-네, 해기쁨 호스피스 병원입니다.

‘호스피스?’

-어머! 죄송해요. 전화 받으신 줄 몰랐어요.

태경이 호스피스 병원에서 왜 자신에게 전화했을까 생각하던 찰나, 전화를 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김태경 선생님 핸드폰 맞나요?

“네, 제가 김태경입니다. 누구시죠?”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저 김진경이에요.

젊은 여자 입에서 나온 ‘김진경’이란 이름에 무슨 전화일까 싶던 태경의 궁금증이 단번에 해결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잘 지내셨죠?

“그럼요. 보호자분은 잘 지내셨어요?”

-네. 뭐, 저도 그럭저럭 잘 지냈어요.

잘 지내냐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김진경은 대충 답을 하며 말을 돌렸다.

-선생님, 불쑥 이렇게 전화 드려서 죄송해요.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지금 괜찮아요.”

-실은 선생님께 부탁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어요.

“부탁이요?”

-네, 그게 사실은…….

“아……. 그랬군요.”

한참 동안 김진경의 말을 듣는 태경의 표정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이따금 짧은 탄식을 내뱉기도 했고 얼굴 위로 근심이 쏟아지기도 했으며 착잡함도 느껴졌다.

-이런 부탁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아니에요. 전화 잘 줬어요. 일단 일정 확인을 하고 바로 연락할게요.”

-네, 저기 선생님?

“네, 말해요.”

-일부러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알았어요.”

전화를 끊은 태경은 급하게 모니터를 보며 오늘 일정을 확인했다.

그 뒤, 임정숙 간호사를 불러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모든 의료진을 만나 환자들에 대해 전달 사항을 알리고 진료실로 돌아와 가운을 벗었다.

“내가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김진경과 통화한 태경은 휴가를 내고 병원을 나섰다.

생각에도 없는 갑작스럽게 낸 휴가였지만, 지금까지 휴가는 고사하고 환자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그였기에 병원 사람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님, 이참에 부산 가서 머리도 좀 식히시고 바람도 쐬고 오세요.’

오히려 하루 더 쉬고 오라며 그의 휴가를 반겼다.

한 시간 뒤-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태경은 KTX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병원을 벗어나지 않던 사람이 전화 한 통에 병원을 뛰쳐나온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몇 달 전, 우리병원에 입원한 사람 중에 사이비 종교에 빠져 환자는 물론 가족들까지 고생했던 일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 환자는 태경이 신화대병원에 있던 시절 유방암 초기에 만났던 환자였다. 하지만 사이비로 인한 잘못된 믿음으로 병을 키워 말기까지 가고 말았다.

환자는 병원에 와서까지 사이비 교주가 주는 물이 생명수라고 여겼고, 의료진과 가족들 몰래 그 물을 계속 마셨다.

자신의 곁을 지키는 딸과의 갈등이 계속될 무렵 태경의 도움으로 환자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뒤, 환자는 딸과 관계를 회복하고 치료를 중단한 채 병원을 떠났다.

워낙 삶의 의지가 강했던 환자라 조금 의아했지만, 치료받기에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

아까 휴대폰으로 전화한 김진경은 유지천 환자의 보호자이자 딸이었다.

유지천 환자는 태경에게 안타까운 환자였다. 그래서 전화를 받자마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사실 퇴원을 한 뒤로 아무 연락이 없어서 잘 지내겠거니 하면서도 걱정했었다.

그동안 연락을 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마음처럼 쉽게 할 수는 없었다.

가족들이 일부러 연락을 안 하는 걸 수도 있고 어쩌면 이미 고인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평소처럼 오지랖을 부릴 순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연락을 오니 반가웠다. 게다가 정말 다행스럽게도 오늘 암 환자나 중증 환자의 수술 일정은 없었다.

간단한 치질 수술 일정이 있었는데 환자의 사정으로 수술이 연기됐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수술이 없던 날이 처음이었다. 마치 유지천 환자에게 인사를 하러 가라고 하늘에서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일하고 나서 이렇게 멀리 나온 적도 처음이네.”

일단 이런저런 무거운 생각을 잠시 내려놓은 태경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네.”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열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언제 이렇게 초록색으로 바뀌었지?”

항상 병원에만 있어 느끼지 못했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태경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으로 창밖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찰칵- 찰칵-

“촌스럽게 누가 창밖의 모습을 사진 찍어?”

나름 진지하게 사진을 찍고 있던 태경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망해져 슬쩍 카메라를 내렸다.

“뭐 어때?”

“나 순간 오빠 보고 우리 부장님 생각났잖아. 예전에 부장님도 KTX 타고 가는데 혼자만 계속 창밖 보면서 사진 찍더라. 어휴! 꼰대.”

“그럼 우리 자기 얼굴이나 찍을까?”

“좋지.”

평일이라 그런지 특실에는 태경과 젊은 커플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저 둘의 달달한 대화가 잘 들렸다.

“논문이나 볼까?”

태경은 핸드폰으로 논문 사이트에 들어가 요즘 관심 있게 보던 논문을 클릭했다.

집중하려고 하는데 또다시 커플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하! 졸려.”

“졸려? 졸리면 얼른 자.”

“뭐야, 왜 갑자기 자래. 나 재우고 뭐 하려고?”

“하긴 뭘 해. 그게 아니라 자기 지금 안 자면 밤에 또 일찍 잘 거 아니야. 내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빠 오늘 너 재울 생각 없다.”

“여기 공공장소거든. 조용히 해라.”

“우리 말고 아무도 없어. 뽀뽀나 할까?”

“뭐래! 이 바보가. 저 앞에 한 분 계시거든. 너 미쳤냐?”

“진짜네. 자 사람 자는 거 같은데? 나야 늘 너한테 미쳐 있지. 그리고 저기까지 안 들려.”

남자의 말과 달리 들렸다. 다른 승객들이 없어서 그런지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잘 들렸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갑자기 의진이 보고 싶네.”

혼잣말로 넋두리하던 태경은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틀어 귀에 꽂고 특실 선물로 받은 쿠키를 먹은 뒤 다시 논문에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뒤-

태경이 논문에 집중하던 사이 열차 내에서 의사를 찾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잠시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열차를 이용하고 계신 승객분들 중에 의사 선생님이 계시면 1호차와 2호차 사이 승무원실로 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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