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달리는 열차 안에서
그리고 잠시 뒤-
태경이 논문에 집중하던 사이 열차 내에서 의사를 찾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승객분들 중에 의사 선생님이 계시면 1호차와 2호차 사이 승무원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한 번 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지만, 태경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안내 방송을 듣자마자 총알같이 뛰어나가 바로 환자에게 달려갔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커플의 대화를 피해 논문에 집중하려고 음악을 크게 틀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오빠? 방금 의사 찾는다는 소리 아니었어?”
“그러네. 누가 다쳤나?”
“다쳤으니까 방송했겠지? 많이 다친 거 아니었으면 좋겠다.”
걱정하는 커플과 달리 태경은 여전히 논문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장실 좀 갔다 와야겠다.”
그사이 안내 방송이 한 번 더 나왔고, 한동안 무서운 집중력으로 논문을 보던 태경은 소변을 보기 위해 이어폰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저분한테 한 번 물어볼까?”
뒤쪽에 있던 여자는 통로를 지나가는 태경의 모습을 보고 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물어보다니 뭘 물어봐? 너 또 잘생긴 남자 보니까 괜히 쳐다본 거지?”
“내가 너니? 맞기 전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런 게 아니라 아까 의사 찾는 방송 또 나왔잖아.”
“근데 그걸 왜 저 남자한테 물어보는데?”
“혹시 의사일지도 모르잖아.”
“하!”
밑도 끝도 없는 여자 친구 말에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농담이지?”
“아니, 진심인데. 저분 어디서 본 거 같지 않아?”
“뭔 소리야? 그리고 내가 사람 잘 보는 거 알지? 얼굴 딱 보니까 절대 의사 그런 쪽은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되게 공부 잘하고 신뢰감 쩌는 얼굴이잖아.”
“절대 아니야. 그냥 뭐랄까? 출장 가는 평범한 회사원 정도?”
“그냥 오빠 생각 아니야?”
“만약 저 사람이 의사면 요번 생일에 너 갖고 싶어 했던 핸드백 사 줄게.”
“진짜야? 핸드백? 장난치는 거면 가만 안 둔다.”
“진짜라니까. 약속.”
“약속했다. 어머! 오빠 들어온다. 내가 물어볼게.”
남자 친구와 열띤 토론을 벌이던 여자는 태경이 다시 들어오자 통로 쪽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저기?”
“네?”
“갑자기 죄송한데 혹시 의사 선생님이세요?”
“아, 네. 의사가 맞긴 한데 왜 그러시죠?”
“와! 진짜 의사 선생님이세요? 거짓말 아니죠?”
의사라는 말에 심드렁하게 앉아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되물었다.
“의사 맞아요.”
“그것 봐. 내가 뭐라고 했어. 느낌이 딱 의사 선생님이라고 했잖아.”
“말도 안 돼!”
“……!”
갑자기 지나가던 사람을 세워 의사냐고 물어보며 오두방정을 떠는 커플을 보며 태경은 당황했다.
‘뭐지! 이 상황은?’
“저기, 선생님?”
그냥 좀 특이한 사람들인가 보다 하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여자가 다시 태경을 불러 세웠다.
“네?”
“혹시 아까 방송 못 들으셨어요?”
“방송이요?”
“네, 안내 방송 몇 번 나왔었거든요.”
“이어폰을 듣고 있느라 못 들었는데, 근데 그게 왜요?”
“저기 근데 진짜 의사 선생님이세요?”
“아! 그만 좀 해라. 맞는다고 하시잖아.”
“윽!”
남자가 아직도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또다시 물어보자 여자 친구가 옆구리를 치며 입을 다물게 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의사 선생님을 찾는다는 방송이 나와서요.”
“……!”
의사를 찾는다는 말에 태경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지금 한 말 확실해요?”
“네, 승객 중에 의사 선생님 있으면 1번과 2번 열차 사이로 오라고 그랬거든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태경은 그 말을 듣자마자 여자가 말한 장소로 바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저 남자 진짜 의사인가 보네.”
“장난해? 의사가 맞는다잖아. 아무튼 오빠 핸드백 미리 땡큐. 약속 지켜.”
“알았어. 하여간 이놈의 입이 문제야.”
남자는 뛰어가는 태경의 뒷모습을 보며 구시렁거렸다.
‘이상하다. 아까 확인했을 땐 없었는데…….’
태경은 뛰어가면서 생각했다.
분명 처음 서울역에서 열차를 탔을 때 습관적으로 모든 열차를 확인했었다.
첫 번째 칸부터 꼬리칸까지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나 다섯 번째 바이탈을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정도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정차 역에서 들어온 건가?’
생각해 보니 열차가 출반한 지 좀 됐고 다른 역에서 탄 사람일지도 모르는 거였다.
‘하! 괜히 음악은 들어서 못 들었네. 그나저나 위급한 상황은 아니면 좋겠는데…….’
제발 중증 환자가 아니길 바라며 방송에서 말한 곳으로 계속 뛰어갔다.
“저기요?”
1번과 2번 열차 사이에 도착한 태경은 때마침 승무원실에서 나오는 승무원에게 다가갔다.
“네, 승객님. 도움이 필요하세요?”
“그게 아니라 의사를 찾는다는 방송을 했다고 해서 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세요?”
“네, 의사입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의사라는 말에 놀란 승무원은 이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송을 몇 번 했는데 아무도 안 오셨거든요. 그래서 안 계신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오셔서 정말 좋네요.”
“아, 네. 그런데 환자분은…….”
“어머! 죄송해요. 안내해 드릴게요. 저 따라오세요.”
태경은 승무원을 따라 환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현재 환자분 상태가 어떤가요? 많이 안 좋은가요?”
“그게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 그분은 본인 때문에 방송했는지도 모르실 거예요.”
“……?”
태경은 승무원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환자분이 도움을 요청해서 방송한 게 아닌가요?”
“네, 그게 아니에요. 아까 oo 역에서 타신 분인데 피를 흘리고 계시더라고요.”
승무원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50분 전 정차한 역에서 열차에 탄 여자가 한쪽 팔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했다.
놀란 승무원은 도움을 주겠다고 했지만, 여자는 큰일이 아니라며 한사코 도움을 거절했다.
하지만 여자가 걱정됐던 승무원은 다시 한번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팔에 붙은 휴지가 피로 흥건한 걸 보고 방송으로 의사를 찾은 것이라고 했다.
“상처가 심해 보였나요?”
“자세히는 못 봤는데 피가 꽤 많이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걱정돼서 저희 팀장님께 말씀드렸더니 방송하라고 하신 거예요.”
다친 사람 본인은 괜찮다고 하고 승무원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피를 흘린 여자의 상태를 직접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저쪽 보이세요? 오른쪽 제일 끝쪽에 앉아 있는 저분이세요.”
10호 열차로 들어선 승무원이 손가락으로 가리켰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반대 방향으로 앉아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다섯 번째 바이탈이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는 거였다.
“저기……. 승객님, 좀 괜찮으세요?”
가까이 다가간 승무원이 여자에게 물었다.
“아, 네. 괜찮습니다.”
“의사 선생님을 모셔 왔어요.”
“예? 그럼 아까 그 방송 저 때문에 하신 거예요?”
의사를 데려왔다는 말에 깜짝 놀란 여자는 승무원과 태경을 번갈아 쳐다봤다.
“네, 아무래도 피를 많이 흘리신 거 같아 걱정돼서요.”
“팔을 다쳤다고 들었는데 제가 좀 봐도 될까요?”
“아, 그게 저 괜찮은데…….”
태경은 여자의 팔을 감싼 휴지를 보았다.
겉은 피로 물들어 있어 보였지만, 다행히 출혈이 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상처 난 지 얼마나 됐어요?”
“아마 한 시간 좀 됐을 거예요.”
답변의 귀를 기울이던 태경은 우연히 여자가 앉아 있는 좌석 아래쪽에 있는 무언가를 봤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다시 돌아와 그녀의 팔에 집중했다.
“휴지가 붙어서 잘 안 떨어지네요.”
팔에 흘린 피로 휴지가 붙어서 잘 안 떨어졌다. 이럴 땐 휴지를 적셔서 떼어 내면 되는데 수돗물은 감염의 우려가 있으므로 식염수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승무원님, 여기 식염수가 있을까요? 팔에 붙은 휴지를 떼어 내려면 식염수가 필요하거든요.”
“식염수……. 아! 맞다.”
곰곰이 생각하던 승무원은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태경에게 물었다.
“혹시 코 세척하는 식염수도 가능한가요?”
승무원은 비염이 심해 늘 코 세척을 하는 동료가 갖고 있던 식염수가 생각났다.
“그것도 가능해요.”
“빨리 가서 갖고 올게요.”
“혹시 구급상자도 있으면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그것도 얼른 갖고 올게요.”
“아프지 않아요?”
승무원이 식염수와 구급상자를 가지러 간 사이 태경이 여자에게 물었다.
“참을 만해요. 지금은 그리고 저 다친 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 솔직히 신경 쓰이지도 않았어요.”
아주 간단한 상처라도 내 몸에 난 상처면 아프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자는 정말 태연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아 했다.
그보다 몇 번이나 급하게 걸려오는 전화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고 긴장돼 보였다.
“선생님, 여기요! 여기 가져왔어요.”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승무원이 식염수와 커다란 구급상자를 갖고 돌아왔다.
“이 안에 없는 게 없네요.”
“그렇죠? 저희 팀장님께서 열차 안에서 응급환자 생기면 기본 처치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웬만한 건 다 사다 구비하라고 하셨거든요.”
“팀장님이 대단하시네요. 자, 제가 상처 좀 볼게요.”
“네.”
태경은 식염수로 휴지를 떼어 낸 후 팔에 난 상처를 확인 후 설명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은데 그래도 봉합이 필요한 상태예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병원 가서 꼭 봉합 받아요.”
“이 정도 상처로 죽는 것도 아니고…….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소독만 대충 빨리 해 주시겠어요?”
“소독만 대충?”
여자의 말에 태경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이봐요, 이예진 씨? 지금 소독만 대충이라고 했어요?”
말한 적도 없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여자는 놀란 표정을 보였다. 눈썰미가 좋은 태경은 조금 전, 여자가 갖고 있던 노트 겉면에 쓰인 이름을 본 것이다.
“감염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피부에 있는 상재균 감염을 막는 항생제도 복용해야 해요. 이예진 씨도 알고 있잖아요.”
“…….”
“지금 누구보다 마음이 급한 건 잘 알겠어요. 하지만 남의 목숨을 위해 뛰어다니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자신 목숨도 귀한 줄 알아야죠. 그리고 지금 그 상태를 사람들이 보면 놀라지 않겠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마음이 급한 건 뭐고 남의 목숨을 위해 뛰어다니는 건 또 뭔지…….
안일한 여자와 단호하게 말하는 태경을 보며 옆에 있는 승무원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닌데 죄송해요.”
“아니에요. 이예진 씨, 본인 몸을 잘 돌보라고 한 말이니 오해하지 말아요.”
“그럼요. 알고 있어요. 저기 선생님 그럼……. 저 치료 좀 해 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죠.”
“아니, 소독 말고요. 저 봉합해 주세요.”
조금 전까지 대충 소독만 해 달라고 하던 이예진은 별안간 봉합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도 달리는 열차 안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