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고……공이 열 개가…….
“안녕하세요.”
“원장님, 어서 오세요. 엄청 일찍 오셨네요?”
병원 정문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건네는 태경을 보며 장득칠이 화답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직 아침이라기에는 어두운데요? 새벽이 아닐까요?”
“그럼 좋은 새벽입니다. 오늘도 수고하세요.”
전날 맥주를 마시고 기분 좋게 꿀잠을 잔 태경은 병원에 상당히 일찍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네, 안녕하세요.”
“벌써 출근하시는 거예요?”
“일찍 눈이 떠져서 일찍 왔습니다.”
접수처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태경은 응급실을 들른 뒤 의국실로 향했다.
철컥-
“이 선생?”
태경은 의국실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이찬희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모나. 개모……. 같이 가.”
“뭐라는 거야? 개모가 뭔데 자꾸 개모래. 찬희야?”
잠꼬대인지 아니면 헛소리인지. 잠을 자며 혼잣말로 떠드느라 이찬희는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야! 이찬희!”
급기야 태경은 잠꼬대를 하고 있는 이찬희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아! 깜짝아! 어때 새끼야?”
“나 새끼다.”
“서, 선생님!”
졸린 눈을 비비며 태경을 확인한 이찬희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잠꼬대 그만하고 얼른 일어나서 집 가서 편히 자.”
“예?”
“뭘 예야. 퇴근하라고.”
“오늘 저랑 최 선생 당직이잖아요.”
예정대로라면 태경이 외래 진료 시간에 맞춰 오후에 출근하기로 해서 이찬희와 최모나는 당직이 맞았다.
“그렇긴 한데 내가 빨리 왔잖아.”
임정숙 간호사로부터 새벽에 환자가 많아 고생했다는 소리를 들은 태경은 후배들을 퇴근시키려고 했다.
“둘 다 고생했을 텐데 얼른 가서 푹 자고 이따 출근해.”
“아닙니다. 전 그냥 원래 당직이라 생각하고 오늘 당직할게요. 존경하는 선생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거 맞아? 아까 숨도 쉬지 않고 정확히 새끼라고 하던데……. 난 거 알고 한 거 아니야?”
“선생님도 참! 선생님 바라기인 제가 그럴 리가 있나요.”
“아주 발음도 정확하게 ‘새끼’라고 하던데. 평소에 속으로 내 욕 좀 했나 봐?”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절대 아니에요. 아무튼 전 그냥 당직 할게요.”
“뭐, 이 선생 뜻이 정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는데 참고로 최 선생은 퇴근했어.”
“네? 최 선생 퇴근했다고요? 언제요?”
최모나가 퇴근했다는 소리에 이찬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반응했다.
“아, 씨! 의리 없는 놈.”
“의리 없는 게 아니라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이따 출근하는 게 현명한 거지. 그럼 퇴근한 최 선생은 두고 이 선생은 오랜만에 나랑 수술방 들어가서 연습 한번 해 볼래?”
“예? 아, 아니요. 그건 좀…….”
“자! 그럼 수술방으로 가 볼까?”
“선생님, 다음에 할게요.”
잠깐 태경이 핸드폰을 확인하던 사이 가운을 벗은 이찬희는 퇴근 준비를 마쳤다.
“왜? 당직 안 해?”
“집에 가서 충분한 휴식과 함께 뇌를 리프레쉬하고 맑은 정신으로 출근하겠습니다. 그럼 이따 뵐게요.”
재빠르게 의국실을 벗어나는 이찬희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던 태경은 의국실을 나와 진료실로 향했다.
똑똑-
“선생님, 하마드 씨 오늘 일정 때문에 퇴원 조금 앞당기신다고…….”
하마드는 정부 측 인사들과 조찬 모임 때문에 퇴원 시간을 조정했다.
태경이 오늘 일찍 온 또 다른 이유는 퇴원 전 그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요.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철컥-
“안녕하세요. 선생님.”
하마드는 통역사와 수행원과 함께 진료실로 들어오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오늘 일이 있으시다고요.”
“네, 한국 정부와의 일이라 저한테도 중요하다 보니 퇴원을 서두르게 됐습니다.”
“바쁘시네요.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됐고, 제가 몇 번 말씀드렸지만 당분간 관리에 힘써 주세요.”
“그럼요. 제 생명을 연장해 주셨는데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관리 잘하겠습니다.”
“혹시 몰라서 진료 자료는 꼼꼼히 챙겨 드렸어요. 그리고 일이 바쁘시더라도 병원 진료는 꼭 보세요.”
하마드는 한국에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른 수술 환자처럼 정기적으로 외래 진료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태경은 다른 어떤 곳을 가더라도 외래 진료를 볼 수 있도록 진료 자료를 챙겨 줬다.
“매번 오기는 힘들겠지만, 비행기도 있으니까 가능하면 선생님께 진료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좋죠. 그동안 병원 생활 하느라 수고하셨어요.”
“수고는 선생님과 직원분들이 하셨죠. 전, 잘 쉬고 갑니다. 그리고 선생님 언제 시간 되실 때 직원들 다 같이 우리나라에 놀러 오세요. 제가 비행기부터 숙소까지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드린 선물은 보셨나요?”
“아! 그게 어제 급한 일이 있어서 아직 확인 못 했습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지금 확인해 볼까요?”
“부끄럽게 왜 그러십니까. 나중에 보세요.”
“농담입니다. 앞으로 하시는 일 더욱 잘되시길 응원할게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마지막 진료를 마친 하마드는 태경과 악수를 한 뒤 직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병원을 나갔다.
잠시 뒤-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고 온 태경은 진료실 책상에 앉아 서랍으로 시선을 옮겼다.
식당에서 가져온 원두커피를 마시며 전날 급하게 서랍 안에 넣고 간 하마드의 편지를 꺼냈다.
“편지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러고 보니 환자에게 편지를 받은 건 오랜만이었다. 남녀노소 나이를 불구하고 환자에게 받은 편지는 항상 기분이 좋다.
“그럼 편지를 한번 볼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입안 가득 퍼지는 원두 향과 함께 편지 봉투를 열어 보던 순간,
“……!”
태경은 경악하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그의 입에서 놀란 소리와 함께 둔탁한 소리가 진료실에 울려 퍼졌다.
“아! 뜨거!”
편지 안에 담긴 경악스러운 종이에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커피를 쏟고 의자에서 떨어진 것이다.
우당탕탕!
철컥-
“선생님! 괜찮으세요?”
“원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연이어 들려온 소리에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이 놀라서 뛰어 들어왔다.
아직 외래 환자들이 없었기에 대기실이 조용해서 그 소리는 더 크게 드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의자는 바닥에 넘어져 있고 가운과 근무복에는 흘린 커피 얼룩이 가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료실 바닥에 앉아 있는 태경의 표정은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넋이 나간 상태였다.
“원장님 왜 그러십니까? 혹시 어디 아프세요?”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은 처음 보는 태경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며 그를 일으켰다.
“고마워요.”
“커피 드시다 데신 거예요? 다치신 거 아니죠?”
“괜찮아요.”
“근데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그러게 말입니다. 조심성이라면 우리병원 일등이신 분이 커피를 뒤집어쓰고 넘어지다니 별일이 다 있네요.”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니까요.”
“아니, 멀쩡한 심장이 왜요?”
“저거 때문이에요.”
“저거요?”
“저거라니…….”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의 시선이 태경의 손끝이 가리키는 책상 위로 향했다.
“저거 뭔데요?”
“하마드 씨가 주고 간 거요.”
“아, 이게 그 선물이라고 준 편지군요. 근데 편지가 왜 엄마야!”
도대체 편지가 문제 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건지. 궁금한 표정으로 종이를 집어 올리던 임정숙 간호사 역시 집에 있는 엄마를 찾으며 보고 있던 종이를 던졌다.
“아오! 놀래라. 저, 저거 뭐예요? 심장 떨려.”
임정숙 역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채 태경과 같이 놀라 자빠질 거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임 선생까지 왜 그래요?”
행운의 편지도 아닌 것이 뭐라고 쓰여 있길래 편지를 보는 족족 저런 반응인지. 이번에는 의아한 최 팀장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었다.
“……!”
그런데 종이를 마주한 최 팀장은 잠시 말을 잃었다.
좀처럼 입을 쉬지 않은 그가 침묵한다는 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의미했다.
“안구 건조증 때문에 글씨가 잘 안 보이나? 이게 뭐야?”
종이를 확인한 최 팀장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침침한 눈에 인공눈물을 넣고 다시 확인했다.
“가만있자. 일, 십, 백, 천, 만, 십만……. 잠깐! 고, 고……공이 열 개가……. 배, 백……. 하!”
종이의 실체를 확인한 최 팀장 역시 놀라서 말을 더듬으며 손까지 파르르 떨었다.
“원, 원장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하마드 씨가 주고 간 건데 아무래도 기부금을 주신 거 같아요.”
세 사람이 보고 놀란 건 편지 사이에 들어 있던 수표였다.
“기부금이요?”
“기부금!”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은 동시에 답했다.
“역시 오일 머니의 클래스가 다르긴 다르네요. 전 머리털 나고 이렇게 큰 금액은 처음 봅니다.”
“저도요. 드라마에서나 봤지 처음 보네요.”
“솔직히 전 하마드 씨가 선물로 편지를 주고 갔다길래 믿지 않았습니다. 역시 배포가 남다른 사람이에요. 안 그렇습니까, 임 선생? 하하하! 중동 재벌이 다르긴 다릅니다.”
“네, 팀장님 말씀이 다 맞아요. 우린 이만 나가죠.”
“나가다니……. 왜요?”
“왜긴! 뭐가 왜예요. 원장님 생각 좀 하시게 나가자는 거지. 얼른 나가요.”
“그럼 사진 한 장만 찍고 나가면 안 될까요?”
“됐어요. 얼른 나가세요.”
임정숙 간호사는 눈치 없는 최 팀장을 끌고 진료실을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뒤에도 태경은 가만히 책상 위에 놓인 수표를 응시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책상에 앉아 편지를 읽었다.
-선생님, 놀라셨죠?
마음의 선물이라고 편지를 준비했다고 했는데 수표가 같이 들어 있으니 놀라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겠지만, 우리 집안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몇 가지 수칙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목숨 빚을 졌으면 온 마음을 다해 갚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돈은 절 살려 주신 것에 대한 제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이 돈은 선생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그동안은 선생님 개인적인 선물을 드리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전 선생님께 기부금을 드린 겁니다. 앞으로 우리병원에 치료하러 오는 환자들을 위해 이 선물을 준비한 겁니다. 그리고 병원 의료진과 직원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실례지만 이 돈은 저한테 그리 큰돈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생님께 드리면 훨씬 더 가치 있게 사용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부디 제 뜻을 이해해 주시길 바라며 앞으로 한국에서 선생님의 이름이 더욱 알려지길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마드 드림-
“하!”
통역사가 써 준 편지를 읽은 태경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하마드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하마드는 계속된 선물 거절에 태경에게 진짜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게 뭔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그러다 기부금을 생각했고, 그러던 찰나, 감덕찬 의원에게 태경이 외상 센터에 관심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굳혔다.
큰 병원들도 증축이나 새로운 건물을 신축할 때 기부금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병원마다 기부금 사업은 꽤 중요한 부분이었다.
큰 대형 병원들은 1년 안에 상당히 많은 액수의 기부금이 들어온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형 병원 이야기였다.
그런데 우리병원에 이렇게 큰돈이 기부금으로 들어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편지가 선물이라고 하더니. 이걸 어떡해야 하나…….”
기부금을 받은 건 솔직히 좋았다. 세상에 돈을 싫어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정도의 엄청난 금액이면 우리병원을 키우는 데 있어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울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하지만 선뜻 받아도 되는 건지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아!”
그렇게 팔짱을 끼고 계속 고민하던 중 편지 옆에 있던 핸드폰이 격하게 진동하며 문자가 왔음을 알렸다.
Rrrrrrrrrr
“……!”
수표를 노려보며 핸드폰을 확인하던 태경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