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69화 (269/472)

269화. 우리병원 최대 단골

수표를 노려보며 핸드폰을 확인하던 태경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Rrrrrrrrrr

“……!”

문자의 주인공이 하마드였기 때문이다.

마치 CCTV가 있는 건 아닐까 싶은 기막힌 타이밍에 도착한 문자를 보며 태경은 어깨를 움찔했다.

-선생님 접니다. 아마 지금쯤 이 돈을 받아도 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싶으시죠?

제가 한 가지 말씀을 안 드린 게 있는데요. 우리 집안에는 호의를 거절하면 평생 결혼도 못 하고 탈모에 안 좋은 일만 생긴다는 저주가 있습니다.

그 돈은 이미 제 손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의미 없는 고민 그만하시고 선생님 마음대로 좋은 곳에 사용해 주세요.

“하마드 씨는 진짜 못 당하겠다.”

살벌한 농담이 잔뜩 담긴 문자를 보던 태경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결심한 듯 하마드에게 문자를 보냈다.

-환자분 감사합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심각하게 고민하던 태경은 기부금을 받기로 했다.

사실 하마드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액수를 떠나서 기부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하는 기부라도 하는 사람이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마드는 부자였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돈이 많은 부자였기에 그가 준 기부금에 부담이 없었다.

그리고 진심이 느껴지는 따뜻한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환자들을 위해, 병원을 위해 사용하자.”

태경은 요양원에 있는 김철기에게도 이 소식을 알리기로 하며 일단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병원 업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하아.”

아직 새벽어둠이 가득한 시간, 멀리서 봐도 훤칠하게 잘생긴 남자가 개천을 따라 조깅 하고 있었다.

편안한 운동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군더더기 없이 멋진 근육질 몸의 소유자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후우!”

천천히 속도를 유지한 채 뛰던 그는 사람이 없는 조깅 코스를 전력 질주했다.

“하!”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쉰 다음에야 달리기를 끝낸 남자는 그 뒤에도 줄넘기와 턱걸이, 복싱 등 각종 운동을 한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주택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선 남자는 일찍 출근하는 이웃들에게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넸다.

“민우, 자네 인사하는 소리가 저~ 멀리 십 리 밖에서도 들리겠어.”

작은 물통을 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구민우를 보며 밝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약수 물 받아오세요? 오늘은 좀 일찍 갔다 오셨네요.”

“새벽에 일찍 눈이 떠지더라고. 나이가 들수록 잠이 점점 줄어. 그래서 그냥 천천히 다녀오는 길이야.”

“잘하셨어요. 그래도 무리하지는 마세요.”

“자네가 보기에는 늙은이 물이나 길으러 갔다 오는 거라 웃길지 몰라도 그래도 30년 넘게 빠짐없이 하는 운동이야.”

“하나도 안 웃기고 오히려 멋있으세요. 우리 동네 뒷산이 은근히 힘든 코스인데 그걸 매일같이 하고 계시니 얼마나 대단하세요.”

“그래? 나 대단한 거야?”

“그럼요. 할아버지 최고!”

밝고 성격 좋은 구민우의 말에 노인은 기분이 좋았다.

“그건 그렇고 나, 자네 텔레비전 나오는 거 봤어. 저번 주 드라마에서 자전거 타고 낭떠러지로 내리뛰는 게 자네였다며?”

“아, 맞아요. 그거 찾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그걸 어떻게 보셨어요?”

“어떻게 보긴! 잘생긴 뒤통수가 딱 자네드만. 우리 손자가 민우 삼촌 나왔다고 되게 좋아했어. 멋있더라!”

“감사합니다.”

“높이가 어마어마하던데 다치진 않았지? 그러고 보니까 손에 상처가 있네. 그때 다친 거야?”

구민우의 몸을 살피던 노인은 그의 손등에 난 작은 상처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항상 다치는 거 조심해야 해. 약은 발랐어?”

“네, 발랐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가 늘 말하잖아. 목숨이 위험하게만 안 다치면 돼. 응? 항상 조심하고.”

“네! 어르신,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기죽지 마. 사람이 꿈을 좇아가야지 돈을 좇아가면 안 돼. 자네 멋진 일 하고 있으니까 자부심 가져.”

“우와! 그 말씀 정말 감동인데요.”

만날 때마다 따뜻한 말을 잊지 않고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노인이 구민우는 항상 고마웠다.

“자네처럼 성실한 사람은 시간이 걸려도 분명히 해 뜰 날이 있을 거야.”

“아이고! 영감님도 참! 고작 스턴트맨 하면서 해가 뜨긴 어느 세월에 그 해가 떠요.”

한참 기분 좋게 대화하는 두 사람 사이로 입이 새털같이 가벼운 동네 반장 여자가 끼어들었다.

“해가 뜨긴 왜 안 떠. 오늘도 뜨고 내일도 뜨고 매일 뜨잖아.”

“할아버님 정말 재미있으시다니까. 여기서 말하는 해는 그 해가 아니잖아요.”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어디 다녀오시나 봐요.”

“나야 교회 다녀오는 길이지. 어머! 우리가 동네 이웃으로 몇 년인데 자기 나 교회 다녀오는 거 몰랐나 봐.”

“아, 네…….”

“난 이만 가 볼게. 우리 집사람 기다리겠네. 자네도 얼른 들어가 봐.”

“네, 어르신. 들어가세요.”

“할아버지,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럼 저도 이만…….”

“민우 씨?”

온 동네 참견하기 좋아하고 말이 많은 반장을 피해 집으로 가려던 구민우는 여자의 부름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빨리 가? 나랑 말하는 거 불편해?”

“아니요. 운동하고 오는 길이라 땀이 좀 나서 가서 씻으려고요.”

“잠깐 시간 되잖아. 땀 하나도 안 흘린 거 같은데. 다른 게 아니라 자기 그 스턴트맨 그거 언제까지 할 거야? 그거 그만두라고.”

“……네?”

잘하고 있는 일을 다짜고짜 그만두라는 말에 구민우는 황당했다.

“아니, 자기가 우리 막내아들이랑 나이가 비슷하잖아. 아들 같아서 그래. 그거 위험하잖아.”

“아, 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예인들 대역이나 하고 그것도 죄다 위험한 장면에만 출연하고 대학도 좋은 데 나온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하고 있어.”

정말 지구 내핵 급으로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혹시 취직이 안 돼서 그런 거야? 예전에는 직장도 좋은 데 다녔다고 하던데 아니야?”

반장은 겉으로는 구민우를 걱정하면서 속으로는 돌려 깎기를 하듯이 은근히 사람을 무시했다.

“젊어서 그렇게 몸 혹사하다가 늙어서 골병들어 한 방에 가는 수가 있어. 그냥 회사나 다녀.”

“말씀 감사하지만,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괜찮습니다.”

여자의 지나친 참견에도 사람 좋은 구민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이런 사람에게 일일이 반응해 주면 피곤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네 아직 결혼도 안 했다며? 듣기로는 동거하다 혼인신고만 했다는데……. 스턴트맨 해서 언제 저거 탈출하려고 그래.”

여자는 구민우가 살고 있는 주택가 오피스텔을 가리키며 답답해했다.

“그러지 말고 내 친구가 공장을 크게 하는데 거기 소개해 줄까? 현장직인데 제법 괜찮아. 자기 몸 쓰는 거 잘하잖아.”

“아니요. 아주머니! 됐어요.”

여자가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이직을 권하던 그때, 구민우의 아내 이소리가 등장했다.

“소리 씨 나왔구나? 요즘 바쁜 가 봐. 오랜만에 보네.”

“네, 일이 좀 바빠서요. 근데 방금 취직이요? 그걸 왜 우리 남편을 소개해 주신다는 거예요?”

“아니, 난 스턴트맨 그거 미래도 없고 무엇보다 위험해서…….”

“미래가 있는지 없는지 아주머니가 어떻게 안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어머! 자기 기분 나빴구나? 다 자식 같아서 하는 소리야. 내가 자기들 기도를 얼마나 해 주는데.”

“기분은 전혀 안 나빴어요. 그리고 아주머니? 저랑 남편은 아주머니 자식 아니에요. 그러니까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어?”

똑 부러지는 이소리의 태도에 여자는 당황했다.

“제가 계속 참았는데 아주머니 은근히 걱정하는 듯하면서 사람 기분 나쁘게 말씀하시잖아요. 교회 다니시는 분이 그러시면 안 되죠. 듣는 사람들 불편해요.”

“……!”

“말한 김에 한마디만 더할게요. 제법 괜찮은 현장직이면 아직도 취직 안 된 아주머니 아드님 소개해 주세요.”

“소리 씨!”

“죄송하지만 제 말 아직 안 끝났어요. 앞으로 우리 남편 보고 자기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아주머니 자기님은 집에 계시잖아요.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고 평안하세요. 여보야 가자.”

“어! 그래. 먼저 가 보겠습니다.”

“참나! 기가 막혀서. 지들 생각해서 말했더니……. 젊은 애가 싸가지 하고는. 그러니까 아직 결혼식도 못 하고 저리 살지. 어휴!”

이소리에 당당한 태도에 놀란 여자는 혼잣말로 씩씩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나한테 뭐라고 할 생각하지 마. 내가 이 동네 살면서 계속 참고 오늘 딱 한 번 말한 거야. 가뜩이나 오늘 중요한 촬영 나가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떠는 거 기분 나쁘잖아.”

“뭐라고 하긴 누가 뭐라고 해. 잘했어. 내 여자 멋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잘했다고. 아주 보는 내가 다 속이 시원하더라.”

“웬일이야?”

“나도 아주머니가 좀 지나치구나 싶었어. 근데 나 때문에 일부러 나온 거야?”

“그것도 맞는데 사실 자기랑 갈 데가 있어서.”

“갈 데라니 이 새벽에? 어딘데?”

그러고 보니 아침잠이 많은 아내가 새벽부터 일어난 것이 의아했다.

“도대체 어디를 가는데 그래?”

“원장님한테 가려고.”

“원장님이라면……. 너! 설마? 병원 가려고?”

“그렇지.”

“소리야, 나 병원 안……. 아! 아파.”

“조용히 하고 따라와라.”

“알았어. 자기야. 갈게 옷만 갈아입고 가자.”

“조용해.”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말하던 구민우는 갑자기 고통을 호소했다. 이소리가 귀를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결국 구민우는 별수 없이 아내에게 귀를 잡혀 꼼짝없이 병원으로 끌려갔다.

* * *

우리병원.

똑똑-

“네. 들어오세요.”

“선생님, 환자분이 오셨는데 진료할 수 있으세요?”

“그럼요. 응급실이죠?”

“아니요. 외래 환자인데요.”

“외래? 이 시간에요?”

가끔 출근 전에 외래를 보러 오는 환자들이 있긴 했다. 그런데 아직 출근 시간 전이기도 했고 이 시간에 외래는 정말 드문 일이었다.

“응급은 아닐 테고 누구지?”

“우리병원 최대 단골분들이요.”

식당도 아니고 병원에 단골처럼 온다는 표현이 웃긴 거 같지만, 진짜 말 그대로였다.

우리병원을 동네 산책 다니는 수준으로 오는 사람들이었다.

“아! 그래요.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오늘은 일찍들 오셨네.”

“근데 그 차림으로 진료 보시려고요?”

얼굴에 미소를 띤 임정숙 간호사는 태경의 근무복을 가리켰다.

“뭐! 향긋한 커피 향이 진동해서 좋기는 한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난 또 뭐라고. 새벽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기부금 때문에 커피 쏟은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저기, 선생님. 근데 그 기부금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결정……하셨어요?”

“병원을 위해 써야죠.”

“세상에! 그럼 받기로 결정하신 거예요?”

“네.”

“밖에서 다들 선생님이 거절하면 어쩌나 했거든요. 잘하셨어요.”

임정숙 간호사는 태경의 결정을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잘한 거 맞겠죠?”

“당연하죠. 5분 뒤에 환자분 들어오시라고 할게요.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그래요.”

임정숙 간호사가 진료실을 나가자 최 팀장의 환호 소리가 잠깐 들렸다. 아마 기부금을 받기로 한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잠시 뒤, 근무복을 새로 갈아입은 태경은 진료실로 들어오는 환자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원장님, 또 뵙습니다.”

당당하게 앞장선 여자 뒤로 민망하게 웃는 남자가 함께 들어 왔다.

두 사람은 스턴트맨 구민우와 그의 아내 이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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