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72화 (272/472)

272화. 못 지킨 약속

“아! 저 미친 새끼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 같은데…….”

지금까지 옆에서 지켜보던 액션 팀 대표가 표정이 굳은 채 김선호를 욕했다.

“그러게요. 저거 일부러 맞는데요?”

그 말을 들은 주인공 강혁도 대표의 말에 공감했다.

“혁이 씨가 봐도 그렇지?”

“네.”

겉으로는 화려하게만 보이는 연예계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더러울 수가 없었다.

가끔 영화를 찍다 보면 서로 싫어하는 사이거나 또는 질투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부러 NG를 내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 김선호가 그랬다.

구민우는 신경도 안 쓰는데 혼자 조바심이 나서 계속 NG를 내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일부러 NG를 내 골탕을 먹이려 했다.

“민우야, 너 괜찮아?”

구민우가 걱정된 대표가 스탠바이 장소로 올라왔다.

“그럼요. 괜찮아요.”

“김선호 저 자식 일부러 그러는 거 같은데, 가서 한마디 할까?”

“에이! 설마. 그냥 두세요.”

정작 당사자인 구민우는 오롯이 자신의 촬영에 집중하느라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 지금은 집중하자. 이번에도 또 저 지랄하면 그땐 내가 가서 한마디 할 거야.”

“일단 참으시고, 그땐 저도 안 말릴게요.”

“조금만 더 고생해.”

“고생은 무슨. 재미있어요.”

그렇게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촬영이 이어졌다.

“자! 이번에 끝냅시다. 레디, 액션!”

감독의 큐사인에 맞춰 구민우가 쫓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달리기를 시작하고 정해진 지점에서 정확히 점프했다.

다행히 김선호의 연기도 NG 없이 넘어가고 모든 것이 리허설 때처럼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던 그때였다.

구민우가 반대편 건물에 첫 번째 발을 착지하던 그 순간,

“……!”

그의 몸이 심하게 휘청거리더니 순식간에 뒤로 넘어가며 허공에 떨어졌다. 와이어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어! 민우 씨, 왜 저래?”

“위로 빨리 당겨!”

사람들의 우왕좌왕하는 소리와 함께 와이어를 당겼지만, 이미 문제가 생긴 와이어는 말을 듣지 않았다.

끼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한쪽 와이어가 느슨해지고, 구민우는 침착하게 상황을 돌파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민우야? 조금만 버텨!”

와이어를 연결하는 기계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구민우가 최대한 움직임을 조심하려 애썼다. 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이런 젠장!’

반동이 실린 와이어는 의지와 상관없이 힘이 실렸고, 마치 그네를 타는 것처럼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야! 와이어 빨리 멈춰 봐!”

“이, 이게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니, 시발! 와이어가 왜 말을 안 들어!”

다급함을 토로하는 감독과 스태프들의 무전이 오가던 찰나 순식간에 사고가 일어났다.

구민우의 등과 건물 벽이 강하게 충돌한 것이다.

쿵-

곧이어 큰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의 고성이 현장을 뒤덮었다.

건물 벽과 충돌한 뒤 와이어의 움직임이 급격히 줄어들고 나서야 구민우는 와이어의 매달린 채 축 처진 몸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야! 조심히 천천히 내려.”

“세상에!”

“어떡해! 민우 씨?”

“빨리! 119 불러!”

“민우야?”

“민우 씨 괜찮아요?”

액션 팀 대표와 감독, 강혁 등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구민우 곁으로 모여들었다.

“머리! 머리 괜찮아?”

“함부로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봐!”

대표는 미친놈처럼 소리치며 그의 머리부터 확인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몸이 벽과 충돌하던 그때 구민우가 본능적으로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스턴트맨으로 생활하면서 여러 액션 동작만큼 강조해서 배운 게 위급상황 시 대처 능력이었다.

구민우는 빠른 판단력으로 머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이 아작이 났다.

떨어지는 충격으로 그의 장기가 어떤 상태가 됐는지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눈으로 보이는 겉모습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민우야? 내 말 들려?”

“정신 좀 차려 봐!”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점점 아득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 구민우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계약을 위해 자신을 보러온 유명 소속사 대표도, 걱정하며 소리치고 있는 액션 팀 대표도, 처음 일부러 NG를 냈다고 질타받던 김선호도 아니었다.

‘무조건 안전이 최고야! 알지? 다치지 말고 조심해서 촬영해. 여보 사랑해!’

집에서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길 바라는 아내, 이소리의 생각뿐이었다.

‘소리야, 미안해…….’

죽을 거 같았다.

아니, 본능적으로 자신이 죽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무섭고 두려운 생각과 함께 아내가 보고 싶었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소리야…….’

죽을 거 같은 통증이 밀려오는 이 순간에도 구민우는 임신한 아내의 걱정뿐이었다.

‘소리야, 사랑해. 행운아, 엄마 지켜 줘. 미안해 여보.’

온 힘을 다해 버티려고 했지만, 강한 의지와 상관없이 눈이 감겼다. 결국 구민우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우리병원-

“이상하단 말이지. 거참! 이상해.”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요?”

이찬희가 고개를 갸웃하자 모니터를 보고 있던 임정숙 간호사가 반응해 줬다.

“수 쌤? 이거 진짜 이상하지 않아요? 요새 계속 외상 환자가 늘어난 느낌이잖아요.”

“그건 저도 이 쌤 말에 인정입니다.”

스테이션을 지나가던 간호사 한 명이 이찬희 말에 공감했다.

“수 쌤은 안 그래요?”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까 정말 이 쌤 말대로 그런 거 같네.”

“근데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모니터를 보고 있던 임정숙 간호사가 고개를 들어 이찬희를 빤히 쳐다봤다.

“우리 외상이 이렇게 온 적이 별로 없었잖아요. 물론 환자들이 ‘나 오늘 아픕니다. 병원 가요.’라고 예고하고 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한동안 심한 외상 환자가 많이 없었다. 있어 봤자 골절이거나 칼에 베인 환자, 그 정도였다.

“맞아요. 한 두세 달 전만 해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보세요. 얼마 전부터 머리 터지고 장터지고 바이탈 넘어가고 그런 환자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오잖아요. 이 정도면 문제 있는 거 맞죠?”

“계절 타서 그런가?”

“아니, 수 쌤도 참. 외상이 무슨 농사도 아니고 계절을 타요.”

“계절 타.”

환자를 보고 온 태경이 종이컵에 든 커피를 홀짝이며 받아쳤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근데 계절을 탄다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 계절 탄다고.”

“예?”

“외상이 농사는 아니지만, 계절은 타.”

“어……. 왜 그런데요?”

“이 외상 환자의 증가와 절대적으로 비례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교통량이고 또 하나는 음주 빈도야.”

“여행 성수기 비수기 말씀하시는 거죠?”

병원 생활 만렙인 임정숙 간호사가 태경의 뜻을 바로 이해하며 말했다.

“맞아요. 우리나라는 외국과 달리 외상의 대부분이 차 사고나 공장 사고가 많아요. 그러니 당연히 그 빈도가 올라가면 덩달아 환자도 많아지겠죠.”

“아! 그래서 여행 성수기에 환자 수가 늘어나는 거군요?”

“맞아. 근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해.”

“환자 수 말씀하시는 거죠?”

“어. 아무리 여행 성수기라도 요즘 환자가 너무 늘어났어. 더군다나 아까 이 선생이 말한 대로 환자의 중증도도 갑자기 심해졌고.”

“제 말대로 이상하다니까요.”

“그리고 가만 보면 오는 사람들 대부분 음주 상태잖아.”

“5일 전에 왔던 그 환자도 음주였어요.”

“이상해. 요즘 주변에 좋은 술집이라도 생겼나? 계속 드렁큰(drunken, 음주 상태) 환자가 늘어나는 느낌이야. 이러면 사실상 계절도 안 타게 되는데…….”

“그거 나이트 때문입니다.”

베드에서 환자를 보고 온 최모나가 다가오며 말했다.

“나이트?”

“예, 큰 사거리 쪽 번화가에 대형 나이트클럽이 생겼다고 환자분이 말했습니다.”

“근데 환자들 보면 나이 드신 분들도 있던데?”

“그게 나이트 근처에 나이 드신 분들 상대로 카바레도 같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최 쌤 말 맞아요. 아까 호프집 사장님 진료 보러 오셨는데 거기가 나이 드신 분들 상대로 핫한 곳이래요.”

제법 연차가 찬 간호사가 수액을 챙기며 이어 말했다.

“그래서 요즘 단골손님도 뜸하다고 아쉬워하셨어요.”

“그런가요? 이유야 어찌 됐든 요즘 추세가 한동안 그럴 거 같으니까 다들 각별히 주의합시다.”

“네, 원장님.”

“알겠습니다.”

“그리고 물품 구비도 구성을 조금 다르게 할게요.”

“물품 구성이요?”

“일단 응급실 초음파를 따로 구비해 놓을게요. 우리 외래에서 쓰는 걸 우선 응급실에 두고, 외래에서 급하지 않은 검사는 가능한 영상의학과에서 진행하는 걸로 하죠. 초음파 구매하기 전까지만요.”

“네, 전달할게요.”

임정숙 간호사가 태경이 하는 말을 타이핑으로 옮겨적으며 집중했다.

“그리고 기관 삽관에 필요한 물품들도 모두 구비를 2배로 하자고요. 그 혹시 neck catheter라고 아세요?”

“들어 본 거 같아요.”

“출혈량이 극심할 때 혈액을 말 그대로 쏟아붓도록 해 주는 카테터(catheter)인데 12gage, 9gage 이렇게 두꺼워서 급속 주입이 가능해요. 이게 가격이 꽤 비쌀 거예요.”

“근데 선생님. 혈액이 점도가 높아서 그렇게 넓은 관으로 주입해도 일정 속도 이상은 못 하지 않나요?”

“어이구야. 그래도 우리 이 선생이 공부를 하는구나?”

“아이, 참! 당연할 소리를 하십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러세요.”

태경의 칭찬에 이찬희가 부끄러워하며 손사래를 쳤다.

“물 타야지.”

“네? 물이요?”

“이 선생 말이 맞아. 혈액은 점도가 높아서 어느 속도 이상은 안 들어가니까 N/S(식염수)랑 1:1로 섞어서 때려 박아야 해.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계도 필요하고.”

“그것도 몇백은 하지 않나요?”

“무슨 몇백이야. 몇천, 몇억 그렇지.”

“와……. 엄청나네요.”

“우리 사용하는 저 초음파만 해도 오천만 원짜리야.”

“오, 오천이요? 우리 외래 있는 거 그거 말씀하시는 거죠?”

“응. 이사장님이 흔쾌히 사 주셔서 그렇지 대학병원에서 저런 거 하나 구입하려면 몇 단계 심사를 받아야 해.”

“이사장님이라면……. 아! 김철기 원장님이요?”

“그분 말고 누가 있겠어. 내가 말하기도 전에 외상과 관련된 물품과 기계에 대한 구매 계약을 하셨더라고.”

비록 몸은 요양원에 있을지언정 김철기는 우리병원에 관해서는 항상 귀를 기울이며 진심이었다.

“저희도 이제야 외상 환자가 늘어난 걸 알았는데, 병원에 계시지도 않으면서 이런 거 보면 귀신같으시네요.”

“예전부터 생각하셨던 거 같아.”

“참 대단하신 분이세요. 그럼 이번에도 이사장님이 사 주시는 건가요?”

“아니! 기부금 들어온 거로 구입해야지.”

“오! 기부금. 역시 하마드 선생님의 오일 머니가 최고네요.”

태경은 그동안 필요했던 고가의 장비를 하마드의 기부금으로 구매할 생각이었다.

“임 선생님은 아까 물품목록 갱신해 주시고 요번에 들어오는 것들 재산목록도 해 주세요.”

“네, 선생님.”

“그리고 바로바로 사용할 수 있게 세팅해 주시고, 내일이나 모레같이 시뮬레이션도 할게요.”

“네, 근무자들에게 전달할게요.”

“신환입니다. 9번 베드예요.”

“제가 갈게요.”

“최 쌤, 환자 결과 나왔어요.”

“갑니다.”

그사이 최모나는 담당하던 환자에게 가고 이찬희는 신규 환자 소식을 듣고 뛰어갔다.

“나, 병동에 좀 다녀올게요. 응급 오면 콜하세요.”

“저기 선생님!”

태경이 응급실을 막 벗어나려던 찰나, 스테이션 안에 있던 간호사가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외상 환자 와도 되냐고 전화 왔는데요?”

“외상 환자? 내가 받아 볼게요.”

급하게 돌아온 태경이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네, 우리병원 김태경입니다.”

-선생님 여기 OO소방서입니다.

“예, 말씀하세요.”

-지금 외상 환자 진료할 수 있을까요?

“어떤 환자인가요?”

-네, 그게 인근 영화……입니다.

순간, 수화기 너머로 경적이 크게 울리는 바람에 구급대원의 말소리가 묻혔다.

“전화가 잘 안 들리네요.”

-현재 환자 이송 중입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방금 무슨 환자라고 하신 지 잘 못 들었습니다.”

-지금 환자 수축기 혈압이 70대입니다. 맥박 수는 120회 보이고 있습니다.

“어디이신가요? 오시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습니까?”

-5분 안에 도착합니다.

“처음 발견 시부터 혈압이 낮았나요? 환자 의식은요?”

-현재 세미 코마(semicoma, 반 혼수상태)이고 발견 시부터 그랬습니다.

“저 대원님, 사고 경위가 뭐라고요?”

-선생님, 지금 병원 갈림길이라서요. 후송해도 되는지 빨리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우선 오세요. 빨리 오세요.”

-네, 이제 곧 도착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태경은 세미 코마에 빠진 환자가 구민우일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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