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81화 (281/472)

281화. 사레들렸나?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고 두 사람의 입술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가까워진 입술이 맞닿으려 하던 바로 그 순간,

철컥-

아무도 없는 집의 현관문이 느닷없이 벌컥 열렸다.

한참 서로의 사랑스러움에 취해있던 두 사람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현관문을 쳐다봤다.

“집 안에 먹을 게 하나도 없…….”

집에서 갑자기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태경의 어머니 이 여사였다.

“어, 엄마?!”

‘엄마’라는 소리에 태경과 밀착해 있던 의진은 재빨리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큰 눈이 순식간에 더 커졌고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태경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양평 집에 계시는 분이 왜 옥탑방에 와 계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태, 태경아?”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은…….”

두 사람 못지않게 이 여사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다 큰 아들이 여자를 만나는 게 뭐 그리 큰일일까 싶지만, 이 여사에게는 상당한 일이었다.

자유분방하고 남녀 할 것 없이 친구가 많았던 첫째 태훈과 달리, 태경은 오로지 공부만 하는 아이였다.

그렇기에 눈 앞에 펼쳐진 이 광경이 신기했다.

“엄마, 정말 무슨 일 있으세요?”

“일은 무슨 그런 거 없어. 순이 아주머니 첫째가 서울에서 결혼해서 거기 갔다가 반찬 주려고 들른 거야.”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어요.”

“당연히 연락했지. 너 수술 중일까 봐 톡 남겼는데 못 본 거야?”

이 여사는 아무리 자식 집이라고 해도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는 사람은 아니었다.

태경은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태경아, 엄마 서울로 결혼식 갔다가 반찬 주러 잠깐 들를게. 너 바쁘면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냉장고에 넣어 두고 갈게.

-수술할 때 항상 조심하고 환자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 줘. 밥 잘 챙겨 먹고 아들 힘내.

역시나 메시지가 있었다. 어제 종일 바빴던 차에 이 여사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아!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확인을 못 했어요.”

“죄송은 무슨 죄송이야. 어디 갔다 오는 거지?”

“오늘 오프여서 예전에 수술했던 환자분 딸 결혼식에 갔다 왔어요.”

“그래. 잘했다. 이럴 때라도 쉬어야지. 근데 태경아?”

차분하게 아들과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이 여사의 머릿속은 의문의 여자로 인해 궁금증이 가득한 상태였다. 결국 의진에게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저기 서 있는 아가씨는 누구니……?”

“아! 잠시만요. 의진아?”

입으로 의진의 이름을 부르던 태경은 직접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꼭 잡고 이 여사 앞으로 걸어왔다.

“의진아, 이쪽은 우리 엄마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정의진이라고 합니다.”

의진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 여사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래요. 반가워요.”

“의진이는 나랑 같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의사이자 내 여자 친구예요.”

“뭐! 여자 친구!?”

눈앞에서 손을 잡고 오는 모양새가 보통 사이는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태경의 입으로 여자 친구라고 소개를 받자 이 여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태경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실제로 만나는 여자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다.

‘태경아, 너 선볼래?’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네. 나중에 기회 되면 소개해 드릴게요.’

선을 보라는 소리에 그냥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말이 진짜였다.

“여, 여자 친구라고?”

“네.”

“어머, 세상에! 어쩜 이렇게 눈도 크고 예쁘게 생겼을까?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어머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말도 참 예쁘게 하네. 아니네요. 말은 차차 편하게 할게요. 근데 태경이 너 아직 저녁 안 먹었니?”

기분 좋게 의진을 보고 있던 이 여사 시선 안에 평상 위에 올려진 마트 봉지가 눈에 띄었다.

“네, 실은 의진이랑 고기 구워 먹으려고 장을 봐 왔어요.”

“그래? 그럼 엄마 갈 테니까 얼른 구워 먹어. 의진 씨 배고프겠다.”

“어머님도 저녁 안 드셨으면 같이 드세요.”

붙임성 좋은 의진은 먼저 이 여사에게 저녁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엄마 식사는? 저희랑 같이 드세요.”

“그럼 엄마가 얼른 저녁 차려 줄게. 태경이 너는 여기서 의진 씨랑 이야기하고 있어.”

“어머님 제가 도와드릴…….”

“어휴! 아서요. 아서!”

이 여사는 일을 돕겠다는 의진을 극구 말리며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안 그래도 갑자기 나랑 마주쳐서 놀랐을 텐데 오늘은 편하게 놀다 가요. 태경이 너 의진 씨 집에 들어오게 하면 엄마한테 혼난다.”

“들었지? 의진이 넌 평상 위에 꼼짝 말고 있어.”

“어떻게 그래요. 선배, 그래도 내가 들어가서 도와 드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니야. 엄마도 그게 편하실 거야. 그건 그렇고 엄마랑 같이 밥 먹는 거 괜찮아?”

“그럼요. 당연히 괜찮죠. 어머님 인상이 참 좋으세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의진아, 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 나 엄마 좀 도와드리고 올게.”

“저도 도와드릴게요.”

“아니, 오늘은 가만히 있어. 알았지? 움직이면 안 돼.”

쪽-

“또 일어나면 계속 뽀뽀한다.”

“알았어요.”

태경은 일어나려는 의진을 평상에 앉히고 재빨리 입술에 입을 맞춘 뒤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평상 위에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한 상 가득 음식이 차려졌다.

이 여사가 미리 만들어 온 밑반찬과 함께 된장찌개와 겉절이 김치, 도토리묵 무침 등 식당 부럽지 않은 만찬에 군침이 절로 돌았다.

치이익-

거기에 뜨겁게 달궈진 솥뚜껑 위로 맛있는 소리를 내는 삼겹살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배고프겠다. 의진 씨, 얼른 먹어요. 차린 게 없어서 어떡하나?”

“차린 게 없다니요. 진수성찬인데요.”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우와! 도토리묵이 진짜 맛있어요.”

“그래요? 내가 직접 쒀 온 건데. 잘됐다. 고기도 좀 먹어요.”

“어머님도 좀 드세요.”

“내가 고기 구울 테니까 엄마도 얼른 드세요.”

“됐어! 난 결혼식장에서 많이 먹었어. 그리고 아까 간을 하도 봐서 배불러. 얼른 두 사람이나 먹어. 엄마는 내 새끼 입에 맛있는 거 들어가는 순간 배불러.”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았지만, 아들이 예쁜 여자 친구를 집에 데려와 함께 밥을 먹으니 이 여사는 그 모습만 봐도 흐뭇함에 배가 불렀다.

그 뒤 맛있게 저녁을 먹은 세 사람은 이 여사가 사 온 과일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오늘 저녁 대접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진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먹는 것도 잘 먹고 내가 더 고마워요. 다음에 내가 또 맛있는 거 해 줄게 또 봐요. 우리.”

“네, 어머님. 또 뵐게요.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조심히 잘 가요.”

그렇게 즐거운 대화를 나눈 뒤, 의진은 이 여사와 인사를 나누고 태경은 의진과 밖으로 나가 콜택시를 기다렸다.

“갑자기 엄마랑 저녁 먹어서 불편하진 않았어?”

“불편하긴요. 음식도 전부 다 맛있고 어머님이 잘 챙겨 주셔서 기분 좋았어요.”

“다행이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어머님께 연락은 자주 하세요.”

“알았습니다. 앞으로 자주 하겠습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나도. 즐거웠어. 다음에는 더 좋은 데 가자.”

“네. 어! 저기 택시 오네요. 선배 그만 들어가 봐요.”

“가는 거 보고. 집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하고. 무슨 일 생겨도 바로. 알았지?”

“선배, 저 애 아니거든요?”

“내 눈엔 애 같아.”

“뭐예요. 알았어요. 저 이만 가 볼게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

태경은 의진이 탄 택시가 골목을 벗어날 때까지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옥탑으로 올라갔다.

“잘 갔어?”

“네. 늦었는데 오늘은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가세요.”

“그래야지.”

“근데 우리 이 여사 입이 아주 귀에 걸리셨어. 그렇게 좋아요?”

“좋지 그럼. 낮이나 밤이나 병원에만 있는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려왔는데 세상 어느 부모가 싫겠어? 아주 참하고 밝고 엄마는 마음에 쏙 든다.”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 얼굴에 좋은 사람이라고 쓰여 있더라. 결혼……. 생각 있는 거지?”

“그럼요.”

“무조건 잘해. 여자는 딴 거 필요 없어. 내 말에 귀 기울여 주고 말 잘 들어 주고 처음과 끝이 똑같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그리고 무조건 져 주고. 항상 예쁘다고 해 주고. 무슨 말인지 알지?”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그럼. 네 아빠가 은근히 로맨티시스트였어. 나중에 엄마보다 술을 더 사랑해서 그게 좀 문제긴 했지. 아무튼 엄마 말 명심해.”

“예, 우리 이 여사님 말씀 잘 명심하겠습니다.”

태경은 이 여사와 함께 동네 야경을 보며 행복한 이야기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 * *

다음 날, 우리병원-

“정신없으시죠?”

“이 정도로 정신없으면 안 되죠. 괜찮아요.”

아침 일찍 출근 후 한동안 외래진료를 보던 태경은 이제야 진료실을 나와 커피 마실 여유가 생겼다.

“결혼식은 잘 다녀오셨어요?”

“네, 잘 다녀왔습니다. 최선해 씨 가족분들이 전부 감사하다고 꼭 전해 달라고 했어요.”

“안 그래도 아까 병원으로 전화 왔었어요.”

“최선해 씨 전화요?”

“네, 외래 때문에 이제야 말씀드리네요. 다들 축의금 보내 주셔서 감사하다면서 병원으로 떡을 보내셨대요.”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러지 않아도 제가 마음만 받겠다고 하니까 이미 주문 들어갔다고 하시더라고요.”

“따로 전화 한 통 드려야겠네요.”

“그게 좋을 거 같아요.”

“지금 외래는 없죠?”

“네, 일단은 없어요.”

“그럼 저 병동에 좀 갔다 올게요.”

“네, 선생님.”

병동에 가기 전 커피를 마시려고 식당에 들어가던 태경은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뭔데?”

그리고 바로 뒤에서 식당으로 들어오고 있는 이찬희에게 말했다.

“……네!?”

태경은 출근할 때부터 느껴지는 이찬희의 따가운 시선이 신경 쓰였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뭐야?”

“제가요? 아닌데요. 저도 커피 마시러 왔어요.”

딱 잡아뗐지만, 이찬희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도대체 의진과 어떻게 사귀게 됐는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남의 연애사에 대해 자세히 묻는다는 거 자체가 상당히 실례라는 걸 알지만, 비법과 조언이 듣고 싶었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래? 확실한 거지?”

“아니요. 저 실은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설마, 환자한테 뭐 실수한 거라도 있어?”

“에이, 선생님도 참! 그런 거 아니에요.”

“도대체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사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그럼 내가 먼저 사적인 질문 하나 해도 돼?”

“예, 전 상관없으니까 마음껏 하세요.”

“찬희야?”

“네, 선생님.”

“너, 모나 좋아하냐?”

“푸핫!”

갑자기 명치를 훅 때리는 것만 같은 태경의 팩폭 질문에 당황한 이찬희는 마시던 커피를 식당 허공에 뿜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태경의 얼굴 위로 커피 미스트가 뿌려졌다.

“커컥!”

“이, 선생 이거 와 이라노?”

한쪽 테이블에서 나물을 다듬던 주방 책임자 오계순이 이찬희의 등을 쓸어내리며 휴지를 건넸다.

“비싼 커피 먹고 마시고 사레들렸나? 갑자기 멀쩡한 커피를 와 허공에 뿌리고 난리고? 이 선생, 니 괘안나?”

“크학! 괜찮습니다. 서, 선생님 죄송합니다.”

“됐다. 안 그래도 얼굴 건조했는데 좋네. 먼저 간다.”

“아직 질문 못 했는데……. 선생님? 가지 마세요?”

“커피 질질 흘리면서 뭐라카노? 얼른 닦기나 해라.”

그 모습을 보고 재미있어 하던 태경은 이찬희의 어깨를 토닥이며 식당을 나갔다.

* * *

OO 고등학교.

딩동댕- 딩동댕-

수업 시작종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삼삼오오 모여 있던 아이들이 저마다 자기 자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드르륵-

“자! 자! 얼른 자리에 앉아.”

“아, 쌤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빨리 오긴. 종쳤으니까 왔지.”

종이 끝나자마자 교실로 들어온 교사는 아이들에게 수업 준비를 하라며 잔소리했다.

“다들 책 펴. 저번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교사가 칠판에 수업 내용을 쓰며 말을 하던 그때였다.

털썩-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