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84화 (284/472)

284화. 고작 진통제

“그런데 이건 어디서 사는 거야?”

“병원.”

“병원? 이걸 병원에서 산다고?”

“어. 뭐 그럼 설마 슈퍼에서 살 줄 알았어?”

당연히 슈퍼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병원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서준우는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해외직구로 사는 좀 특이한 사탕이나 스티커지 않을까 싶었다.

가끔 외국의 특이한 먹거리가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병원에서 구입한다니. 사탕과 스티커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구매는 우리가 돌아가면서 사고 있고, 준우 너도 조만간 사러 갈 거야.”

“내가?”

“일종의 우리 동아리 신고식이거든. 그냥 병원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되니까 벌써 걱정할 거 없어.”

“그래. 뭐……. 근데 승규야. 하나만 더 물어볼게.”

“궁금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도 돼.”

“이거 말이야.”

서준우는 부자연스럽게 잡고 있는 봉투를 눈높이만큼 들어 올렸다. 안에는 사탕과 스티커가 들어 있는 봉투로 고승규가 준 거였다.

“안 좋은 거나 그런 거 아니지?”

“당연히 그런 거 아니지.”

한쪽에서 친구들과 게임을 하던 이선이가 두 사람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안 좋은 거면 우리가 왜 하냐? 그리고 병원에서 산다고 했잖아. 아픈 사람 고쳐 주는 곳이 병원인데 거기서 왜 안 좋은 걸 갖고 오겠어.”

“그건 선이 말이 맞아.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지 죽이는 곳이 아니잖아. 그리고 그런 눈빛으로 볼 거 없어. 이거 진통제야.”

“진통제?”

고승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서준우의 시선이 봉투를 향했다.

“이게 진통제라고?”

“응. 진통제.”

“고작 진통제인데 왜 부모님께 걸리지 말라는 거야?”

“준우 너 시험공부 하다가 에너지 드링크 마신 적 있지?”

“어. 있어.”

가끔 학생들이 늦게까지 공부할 때 각성 효과를 위해 에너지 드링크나 커피를 많이 마실 때가 있었다.

“그런 거랑 비슷한 거야. 우리가 공부할 때 그런 거 먹으면 부모님이 몸 상한다고 걱정하시잖아. 그래서 그런 거지. 괜히 잔소리만 늘어나잖아. 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아니야. 이 정도면 충분해.”

고승규가 한 말을 전부 이해할 순 없었지만, 서준우는 이쯤에서 질문을 그만하기로 했다.

지금은 머리가 복잡해 더 이상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서준우는 아이들과 함께 아지트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우리 아들 모의고사 보느라 고생했어. 계속 이대로만 나오면 원하는 의대로 골라 갈 수 있겠다. 그렇지 아들?”

“거참! 당신은 애한테 너무 부담 주지 마.”

“이게 무슨 부담이야. 우리 아들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거지.”

“준우야. 힘들어도 내년까지 힘내라. 엄마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의사 되면 네 인생도 편해. 요즘은 전문직이 최고야.”

“……네, 아빠.”

“동아리 애들이랑 과외 하고 오는 길이지?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었네.”

“네. 저, 들어갈게요. 모의고사 다시 살펴봐야 할 거 같아요.”

“그래, 얼른 들어가서 공부해. 뭐, 간식 좀 갖다줄까?”

“아까 떡볶이 먹었어요.”

여느 때처럼 공부로 시작해 공부로 끝나는 부모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서준우는 방으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평소랑 똑같은 부모님의 의대 타령이 오늘따라 더 듣기 힘들게 느껴졌다.

남들보다 재력이 넉넉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게 감사했지만, 이런 삶을 원한 건 아니었다.

가끔은 내 삶이 아닌 부모님의 인형으로 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면 가슴 깊숙이 누르고 있던 스트레스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어 마음을 짓누른다.

탁-

집에 오면 씻는 것부터 하던 서준우는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의자에 지친 표정으로 앉았다.

멍하니 책상을 보던 시선이 못 보던 책으로 향했다.

-좋은 의사가 되는 법.

-내 자녀 의사 만들기.

-명문대 수석이 말하는 나는 이렇게 공부해 의대 수석이 됐다.

분명 엄마가 또 갖다 놨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문밖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우야, 이번에 읽을 책 갖다 놨어. 공부하다 머리 식힐 때 읽어.”

“하!”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스트레스가 깊어진다.

공부하는 건 좋았지만, 의대에 가기 위해 하는 공부에는 갈수록 지쳐 가는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받고 가슴 답답할 때 해 봐. 바로 기분 좋아질걸.’

그러다 아까 동아리 아지트에서 고승규와 아이들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진짜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평소 스트레스가 쌓여도 해소할 방법이 없던 서준우는 애들이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냥 진통제야.’

뭔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마음이 답답해서인지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익-

서준우는 저돌적인 손길로 가방 안쪽에 있던 문제의 그 봉투를 꺼내 책상 위로 올렸다.

“저게 스트레스를 없애 준다고?”

혼잣말과 함께 봉투를 향해 손을 뻗은 서준우는 단숨에 그 안에 있던 사탕과 스티커를 꺼냈다.

사탕과 스티커 중에 고민하던 손길이 투명한 스티커 쪽으로 방향을 틀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그런데 손끝에 스티커가 닿자 그 순간 손길이 멈췄다. 서준우는 손을 뻗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재깍재깍-

벽에 걸린 초침이 수없이 흘러갈 동안 서준우는 사탕과 스티커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 상태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고민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다음 날-

“준우야?”

등교를 마치고 수업 준비를 하는 서준우에게 고승규가 찾아왔다.

“어. 승규야.”

“어떻게 해 봤어?”

“어, 그거? 조금?”

서준우는 아까 등교하자마자 똑같은 질문을 했던 이선이에게 답했던 그대로 말했다.

“어때? 괜찮았어?”

“알려 준 대로 안 하고 잠깐 해서 그런가? 난 아직 잘 모르겠던데.”

“원래 처음에는 다 그래. 그리고 오늘 저녁에 병원 갈 거야.”

“병원?”

“응. 너도 신고식 해야지.”

신고식이란 말은 사탕과 스티커를 사 오라는 말이었다.

“근데 오늘 영어 과외 있지 않아? 오늘도 빼려고?”

“아니, 한 시간만 일찍 끝내 달라고 했어.”

“알았어.”

“그래, 이따 보자.”

“선이야? 그 신고식 말이야. 너도 했어?”

고승규가 돌아가고 서준우는 가까이 앉아 있는 이선이에게 다가갔다.

“응. 했지. 그냥 처음 병원 간다고 그렇게 표현한 거야. 사탕이랑 스티커는 계속 돌아가면서 사고 있어.”

“그럼 그거 병원 갈 때 나 혼자 가?”

“아니, 길잡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서준우는 이선이가 말하는 길잡이가 뭔지 학교 수업이 끝나고 과외가 끝날 때까지 계속 궁금해했다.

몇 시 간 뒤, 과외 수업까지 마친 아이들은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택시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휘익.”

택시에서 내려 한산한 공터로 온 고승규는 갑자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허름한 차림의 노인이 아이들 앞에 나타났다.

“지금 병원 가실 수 있죠?”

“당연하지. 내가 그쪽 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한눈에 봐도 노숙자라는 걸 알 수 있는 노인은 고승규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오늘은 이 사람이 동행할 거예요.”

“처음 보는 사람이네.”

“처음이니까 실수 없이 잘해 주세요.”

“그럼. 나만 믿고 따라와요.”

“옷은 이걸로 갈아입으시고, 준우 너도 옷 갈아입고 와. 화장실은 저쪽에 있어.”

“저 할아버지는 누구며 옷을 왜 갈아입어야 하는데?”

서준우는 고승규가 준 옷이 담긴 쇼핑백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 사람은 말 그대로 길잡이야.”

그 뒤 고승규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사탕과 스티커가 필요할 때마다 아이들은 저 노인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노인의 역할은 환자였고 동행하는 사람의 역할은 손주였다.

노인은 병원 응급실에 가서 자신이 아프다는 말과 함께 처방전을 받고 근처 약국에서 진통제를 구입한다.

그 뒤, 동행한 아이에게 건네주고 수고비를 받는 것이었다.

고승규는 뒤탈이 없고 자기 말을 무조건 따를 사람으로 노숙자를 생각했다.

노숙자는 당장 한 끼를 해결할 일이 가장 큰 걱정이고 술 한 잔이 간절하게 그리우며 돈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노숙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직접 섭외한 뒤 가짜 신분증까지 만들어 준 것이다.

“그거 진통제라며?”

“그래, 맞아.”

“진통제인데 왜? 우리가 직접 하지 않고 저 할아버지가 처방받아.”

“준우, 너 혹시 하기 싫어?”

순간 고승규의 친절한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어째 너 표정이 내키지 않아 하는 거 같아서.”

“그런 건 아닌데 뭔가 단순히 진통제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그래.”

“당연하지. 우리는 큰일 할 사람들이잖아.”

“뭐?!”

“사회 지도층이 될 사람인데 이런 기록 함부로 남기면 안 되잖아.”

“…….”

“야, 준우야. 농담이다. 농담!”

순간 서준우가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짓자 고승규가 멋쩍게 웃으며 말을 바꿨다.

“그게 아니라 아무리 진통제라고 해도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면서 진료받았다가 피곤할 일 생길까 봐 그런 거야.”

“그건 승규 말이 맞아. 굳이 진료기록 남길 필요 없잖아.”

“맞아. 예전에 집중 잘된다고 각성제 유행했을 때도 부모님들이 대신 처방 받아 주고 그랬잖아. 뭐 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그냥 저 할아버지랑 병원 들어갔다 의사 잠깐 보고 나오면 돼. 너무 긴장하지 마.”

“아! 됐어. 야! 그냥 내가 할게.”

뒤쪽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선이가 답답한 듯 불쑥 끼어들었다.

“우리 모범생 서준우 님께는 아직 무리인가 보다. 이러다 날 새겠다. 오늘은 그냥 내가 갔다 올게. 다음에 준우 네가 가.”

톡톡 쏘는 말투로 내뱉었지만, 사실 이선이는 서준우를 위해서 한 말이었다.

준우가 뭔가 망설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도와주고 싶었다.

“오늘은 그냥 내가 갔다 올 테니까 다음에 나 대신 네가 가.”

“아니!”

이선이가 옷이 든 봉투를 잡으려 하자 서준우가 단호하게 말하며 봉투를 들고 있는 손을 뒤로 뺐다.

“갈게.”

“네가 간다고?”

“어. 내가 갔다 올게.”

잠시 고민하던 서준우는 결국 본인이 가기로 했다.

고승규는 억지로 갈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만약 여기서 가지 않으면 자신을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동아리에서 나온 걸 알면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친구들은 없을 것이다.

크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친구 없이 학교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그냥 진통제일 뿐이잖아. 괜히 심각할 필요 없어. 얼른 갔다 오자.’

그 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 서준우는 고승규에게 오늘 갈 병원에 대해 들었다.

“우리병원이라고 여울동에 있는 곳이야?”

“여울동?”

“응. 여기서 택시 타고 30분만 가면 돼. 근처 약국에서 처방받은 거 아지트에 두고 집으로 가면 끝이야. 너희는 같이 안 가?”

“당연하지. 우르르 몰려가면 이상하잖아. 이건 차비고 이건 물건 담을 가방이야.”

“무슨 일 있는 거야? 오늘은 왜 이렇게 말들이 길어. 나 빨리 갔다 대포 한잔하고 싶은데.”

한쪽에서 쭉 기다리고 있던 노숙자 노인이 배가 고픈 듯 재촉했다.

“곧 가요. 저 할아버지 배고픈가 보네. 준우야. 더 궁금한 거 없지?”

“없어.”

“그래, 수고하고. 이따 톡 할게.”

“저기 준우야. 내가 같이 가 줄까?”

“이선이 네가 왜 같이 가. 너 준우 좋아하냐?”

“아니거든!”

“아니야. 괜찮아. 내일 보자.”

서준우는 같이 가려는 이선이를 뒤로하고 노인과 함께 우리 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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