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85화 (285/472)

285화. 말기 암 환자라고?

“다 왔습니다.”

“뭐해? 요금 내야지.”

택시가 우리병원 앞에 멈추자 노인이 옆자리에 앉은 서준우의 팔을 치며 말했다.

“아, 네. 기사님, 여기요.”

“잔돈은 됐수다.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탁-

“여기예요?”

“맞네, 우리병원 여기야.”

“병원이 생각보다 크네요.”

“뭐 다니다 보면 큰 병원도 있고 작은 병원도 있고 이 정도면 중간이지 뭐.”

“근데 할아버지는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된 거예요?”

“어이, 신참! 이런 거 물어보면 그 키 큰 친구가 안 좋아할 텐데……. 그냥 우리 할 일이나 하자고.”

“아, 네.”

“그리고 잠깐만!”

노인은 병원으로 들어가기 전 서준우에게 주의사항을 전했다.

“별로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말을 좀 자연스럽게 해.”

“네?”

“지금 우리 역할이 돈 없이 힘들게 사는 손자랑 할아버지인데 너 지금 너무 예의 있잖아. 말을 좀 편하게 하라고.”

“네. 그럴게요.”

“그리고 이 얼굴이 문제인데……. 후줄근한 옷을 입어도 얼굴이 귀태가 나네. 잠깐만.”

단정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노숙자는 서준우의 머리를 일부러 헝클였다.

“그래. 그나마 났다. 들어가자.”

두 사람은 병원으로 들어와 접수처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콜록! 저, 응급실 진료를 좀 보러 왔는데요?”

역시나 이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노인은 살짝 풀린 눈과 가끔 내뱉는 기침 소리와 말을 느리게 뱉으며 아픈 사람처럼 행동했다.

“저희 병원 처음이세요?”

“네, 처음입니다.”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는데요?”

“실은 제가 말기 암 환자인데 진통제를 좀 처방받으려고요.”

“그러세요? 접수 도와드릴게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구호……. 콜록! 콜록! 죄송합니다. 기침이 자꾸 나와서.”

“아니에요. 천천히 말씀하세요.”

“참 친절하시네요. 제 이름은 구호재입니다.”

“접수되셨고요 응급실 가셔서 앉아 계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가짜 신분증으로 접수를 마친 노인은 가짜 손주와 함께 응급실로 향했다.

“세상에! 저 할아버지 안됐다.”

“그러게요. 말기면 오래 살기는 힘드실 텐데……. 손자도 할아버지도 딱하네요.”

접수처 직원들은 응급실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 * *

중환자실-

다중추돌 응급 수술을 끝낸 태경은 와이어 오작동으로 사고를 당한 스턴트맨 구민우를 보러 왔다.

응급실에서 위험한 상황은 넘겼지만, 워낙 큰 부상이었기 때문에 사실 구민우의 상태가 언제 나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태경은 밤낮없이 틈만 나면 구민우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며 주치의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민우 씨, 힘내야 해요. 소리 씨랑 행운이가 기다려요. 우리 조금 더 힘내요.’

늘 중환자실을 올 때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구민우에게 한 말이었다.

의사이기에 의학을 믿는 사람이지만,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는 환자들에게 말을 할 때는 그들이 들을 거라고 생각하며 자주 말을 했다.

그건 구민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의식 없이 누워 있었지만, 면회 오는 아내의 목소리와 응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이제 엄마 배 속에 집을 지은 행운이를 생각해서라도 그가 힘을 내길 바랐고, 태경은 그래서 더 구민우를 살리고 싶었다.

모두의 노력 덕분인지 그동안 마약성 진통제를 맞으며 버티던 구민우는 일주일 동안 차츰 자발 호흡이 돌아왔고, 어제 드디어 척추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그는 수술을 잘 견뎠고 성공적이었다.

“좀 어때요?”

중환자실에서 좀 더 지켜봐야 했지만, 구민우의 얼굴은 전보다 좋아 보였다.

“괜찮아요.”

아직 말하는 데 조금 힘은 들었지만, 그는 웃는 얼굴로 답했다.

“많이 아프죠?”

“진통제를 맞아서 그런지 견딜 만합니다. 선생님 볼 때마다 제가 문제 학생이 된 거 같아요.”

“문제 학생이요?”

“네. 학교 다닐 때 말 안 듣는 애들 있으면 선생님들이 수시로 사고 치나 안 치나 쉬는 시간마다 교실로 오셨거든요. 너무 자주 찾아오시니까 뵐 때마다 민망합니다.”

민망하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구민우는 미안한 마음 때문에 그랬다.

그동안 면회 온 아내에게 태경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전부 다 들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많은 환자를 보는 그가 자신 때문에 못 쉬는 건 아닌지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 기준에 민우 씨는 문제 학생이 아니라 모범 학생인데요?”

“제가 모범생이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자주 찾아오죠.”

“선생님을 만난 게 제 인생 로또가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 과찬인데요? 아무래도 이번 주 로또를 하나 사야겠네요.”

“혹시 1등 당첨되시면 저도 뭐 주시는 건가요?”

“아니요. 그건 좀 힘들겠는데요?”

“서운합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구민우와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태경은 환자와 나누는 이런 사소한 대화가 참 기뻤다.

“통증 심하면 참지 마시고 말하세요.”

“네, 선생님. 항상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쉬세요.”

중환자실에서 나온 태경이 응급실로 가기 위해 접수처를 지나자 임정숙 간호사가 다가왔다.

“선생님, 외래 환자 있는데요?”

“외래요? 이 시간에 예약 환자 있었나요?”

“아니요. 예약 환자는 아니고 아까 TA(교통사고) 수술 들어갈 때부터 오셔서 꼭 선생님께 진료 봐야 한다고 기다린 환자분이세요.”

“그래요? 그러면 오래 기다리셨겠네요.”

철컥-

“환자분 오래 기다리셨죠? 어디가 아프…….”

철컥-

수술 전부터 기다렸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진 태경은 진료실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다시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외래 환자라면서요?”

“외래 환자 맞아요. 그게…….”

철컥-

“원장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임정숙 간호사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찰나 진료실 안에 있던 환자가 그새를 못 참고 밖으로 나왔다.

“원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서운합니다. 환자를 보고 도망가는 의사가 어디 있습니까?”

서운한 말투와 달리 반가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을 하는 환자의 정체는 바로 김 경사였다.

김 경사는 아동학대 피해자였던 세영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로, 그 뒤 아직도 세영이와 아빠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잘 지내고 있었다.

“김 경사님이 환자는 아니니까 그렇죠? 도대체 왜 또 오신 거예요?”

서운함과 반가움을 동시에 보인 김 경사와 달리 그를 보는 태경의 표정은 귀찮음이 느껴졌다.

“원장님! 아까는 사실 농담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진심으로 서운합니다. 저 진짜 환자로 온 거라고요.”

“맞아요. 김 경사님 진짜 환자로 오셨어요. 저기 보세요.”

환자라는 김 경사의 말에도 태경이 믿지 못하는 눈빛으로 임정숙 간호사를 쳐다보자 진짜라는 말이 돌아왔다.

“여기 보이시죠?”

맞은편에 있는 김 경사는 상처 난 손바닥을 보이며 상당히 억울해했다.

“치료받으러 왔다니까요.”

“들어오세요.”

진료실로 들어온 태경은 김 경사의 손바닥을 살펴봤다.

“이거 좌상인데, 칼에 찔리셨어요?”

“와! 역시 원장님 눈썰미가 남다르시네요. 범인 잡는 과정에서 살짝 스쳤습니다.”

자칫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을 텐데 김 경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경찰 밥 먹으면서 이 정도야 우습죠. 칼 무서우면 형사 못 합니다.”

“그래도 항상 조심하세요. 운이 좋았어요. 여기서 아주 조금 더 찔렸으면 중요한 신경을 다칠 뻔했어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근데 오늘 쉬는 날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쉬는 날인데 다른 팀 인력이 부족해서 지원 나갔다 왔습니다.”

“경찰분들이 고생이 많으시네요.”

“그렇죠? 저 오늘 칼에 찔리기까지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제 부탁 들어주시면…….”

“자! 경사님, 마취합니다. 따끔해요.”

“으악!”

마취 주사가 들어가자 김 경사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칼도 안 무서워하시는 분이 뭔 마취 주사를 무서워하고 그러세요.”

“칼은 안 무서워도 마취 주사는 무섭거든요?”

“한 번 더 남았습니다. 아프지 않게 놓을게요.”

“악! 겁나 아파요. 원장님 정말 부탁 안 들어주실 거예요?”

“아까 낮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간절한 김 경사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태경은 봉합에 집중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재능기부라고 생각하고 한 번만 해 주세요. 고등학교 가서 강의해 주시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네, 그 강의는 어려워요.”

김 경사는 가족 모임에서 조카와 대화하던 중 태경이 나온 너튜브를 시청하던 조카에게 한 말이 화근이 됐다.

‘저 원장님 멋있지? 삼촌이랑 잘 안다.’

‘대박! 정말이야?’

‘그럼. 친한 사이야.’

‘삼촌 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돼?’

조카의 부탁은 강의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하나뿐인 조카의 부탁이라 어떻게든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 낮에 부탁하러 온 김 경사는 태경에게 거절당한 상태였다.

“원장님!”

“아니, 김 경사님, 어떻게 제가 성교육을 합니까? 예?”

그렇다. 태경이 끝내 거절한 이유는 여고에 가서 여자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성교육을 하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남고라면 모를까,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여고생들 앞에서 성교육하기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왜 못 하십니까? 할 수 있으시잖아요?”

“그럼 왜 하필 성교육인데요?”

“조카 말로는 학교에서 하는 건 다 쓸데없는 말이라서 원장님 같은 분이 해 주시면 뭔가 직접적인 도움이 될 거라고 하던데요.”

“그리고 전 산부인과 전공이 아닙니다. 자! 봉합 끝났으니까 이만 가 보세요.”

“저 또 올 거예요.”

“어차피 소독하러 와야 해요. 물 닿지 않게 조심하시고 안녕히 가세요.”

“원장님, 저 포기 안 합니다.”

김 경사는 진료실을 나온 태경의 따라 나와 그의 등 뒤에서 외쳤다.

“와! 김 경사님 대단하시네요.”

“누가 아니래요. 저 집념을 보면 형사가 천직은 맞네요. 처방전 챙겨 주세요.”

“네. 선생님.”

간호사와 대화한 태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응급실로 향했다.

“가만 보자……. 12번 뭐지?”

응급실 스테이션 모니터에서 환자들의 리스트를 보던 태경이 임정숙 간호사에게 물었다.

“12번, 이 환자 진료는 안 본대요?”

“네. 약만 처방받으러 오셨대요.”

‘잠깐……!’

“이 환자 누가 봤어요?”

모니터를 보며 속으로 생각하던 태경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최 선생이 봤나?”

“아니요. 최 쌤은 내시경 하러 가셨고 이 쌤이…….”

“제가 지금 보고 오는 길인데요.”

임정숙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찬희가 스테이션으로 걸어오며 답했다.

“이 선생?”

“네, 선생님.”

“이 환자 진통제만 타 간대?”

“네, 할아버지가 말기 암 환자인데 딱하시더라고요. 옷도 허름하고 손주랑 둘이 사는 거 같던데 마음이 좀 안 좋았어요.”

“말기 암 환자라고?”

“네.”

“무슨 진통제 달래?”

“fxxx으로 부탁한다고…….”

“찬희야? 이 환자 내가 볼게.”

“예!?”

이미 보고 온 환자를 다시 보겠다는 태경의 말에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던 이찬희가 긴장하며 물었다.

“제가 뭐 실수라도…….”

“아니, 실수는 무슨.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뭐 좀 확인하려고. 지금 별로 급한 것도 없으니까 이 선생 앉아 있어. 12번 내가 볼게.”

이찬희는 그 어떤 것도 실수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 그대로 뭔가 확인이 하고 싶었을 뿐이다.

“선생님! 진통제 안 가져가세요?”

빈손으로 가는 태경을 보며 이찬희가 물었다.

“어. 아직은 괜찮아. 확인해 보고.”

“…….”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한 이찬희와 간호사들을 뒤로한 채 태경은 직접 12번 베드로 향했다.

챠륵-

“환자분 안녕하세요.”

태경이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베드 커튼을 열며 인사했다.

“아까 오셨던 선생님이 급한 환자 때문에 제가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

“아, 그러세요. 전 왜 갑자기 다른 선생님이 오시나 했네요.”

“응급실에서 있다 보면 급한 환자가 생기기도 해서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얼마 안 기다렸어요.”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노숙자 노인과 달리 옆에 서 있는 서준우의 눈빛은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

“환자분, 진료는 안 보시고 약만 처방받으신다고요?”

“네, 선생님 제가 말기 암 환자입니다. 지금은 진통제로 간신히 버티고 있어요.”

“아이고! 저런, 많이 힘드시겠어요.”

“힘들죠. 그런데 죽고 사는 게 어디 제 마음대로 되나요.”

노인은 옆에 서 있는 서준우를 애틋하며 쳐다보면 말을 이었다.

“그나마 전 살 만큼 살았으니 덜 억울한데 우리 손주만 보면 딱해요.”

“그런데 환자분, 수술이나 항암은 해 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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