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86화 (286/472)

286화. 노인의 폭탄 발언

“그나마 전 살 만큼 살았으니 덜 억울한데 우리 손주만 보면 딱해요.”

“그런데 환자분, 수술이나 항암은 받으셨어요?”

평소 같으면 반응을 해 줬을 태경이 노인의 말을 무시한 채 질문했다.

“아니요. 때를 너무 놓쳐서 수술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항암만 조금 진행하다 말았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돈이 넉넉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파 병원에 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더라고요. 돈이 넉넉한 사람들이야 걱정 없겠지만, 저같이 천 원 한 장이 아쉽고 가망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도 사치입니다.”

“네, 무슨 말씀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환자분? 환자분도 아시겠지만, 금전적으로 어려운 분들은 병원 복지팀에서 지자체 쪽으로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어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안 하셨어요?”

“아! 그거요? 안 그래도 제가 돈 없는 사람 도와주는 거 없느냐고 물어봤죠. 그런데 조건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따지는 게 많더라고요.”

“그러셨어요?”

“그럼요. 그리고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가망이 없는데 그렇게 힘들게 치료받아 뭐하겠습니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환자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말기 암 환자의 고통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 의사로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보통 이런 환자의 경우 지금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드물다.

이 환자는 조금 전, 어린 손주와 둘이 산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손주만 보면 딱하다고 했다.

보통 아무리 말기 암 환자라고 해도 어린 손주나 어린 자식이 있는 경우 그 상대가 혼자 남겨질 게 안쓰러워 대게는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하다못해 손주와 조금이라도 더 살려고 힘든 치료를 계속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노인은 입으로는 걱정하는데 눈빛은 아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나이가 있는 말기 암 환자가 약을 처방하러 왔으면 이런 반응이 나오기 쉽지 않다.

대게는 환자 본인이나 보호자가 벌써 한마디를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니, 사람이 아파 죽겠다는데 뭐 이렇게 물어보고 그래요? 빨리 진통제나 줘요.’

그 어마어마한 통증으로 인해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노인은 그런 게 전혀 없다.

꼬치꼬치 캐묻는 대화에 노인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하다. 마치 준비된 듯한 대답이 술술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태경의 머릿속에는 점점 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표가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환자분, 다니시던 병원이 있었을 텐데 왜 우리병원으로 오셨어요?”

“그게 근처에 볼일을 보러 왔다가 통증이 너무 심해서 가까운 병원으로 왔습니다.”

“그러셨군요. 환자분 제가 이 부분 좀 만져도 될까요?”

“예? 아……. 예. 그럼요.”

“잠시만 살짝 만져 볼게요.”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간 태경은 오른손으로 그의 쇄골 아랫부분을 손으로 만졌다.

‘……!’

짧게 노인의 신체를 터치한 태경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그에게 물었다.

“환자분, 실례지만 무슨 암이세요?”

“아, 그게……. 으!”

병명이 뭔지 묻는 대답에 노인은 갑자기 통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힘든 표정을 지었다.

평소 태경이 자주 하는 질문 중 하나인 ‘환자분 많이 아프세요?’라는 당연한 말 대신 옆에 서 있는 서준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친구는 이름이 뭐야?”

“네!? 제 이름이요?”

“……!”

생각지 못한 질문에 방금까지 통증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질문을 회피하던 노인이 깜짝 놀랐다.

노인은 서준우에게 가짜 이름을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우리 손자 이름은…….”

놀란 노인이 재빠르게 이름을 말하려던 찰나,

“제 이름은 구현우예요.”

서준우가 이름을 말했다. 조금 전 접수처에서 구호재라고 말했던 노인의 가짜 이름을 기억하고 아무 이름이나 말한 것이다.

“선생님, 전 위암 환자입니다.”

“그러세요? 위암 환자세요?”

“네.”

“많이 힘드시겠네요.”

태경의 표정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이따금씩 다른 환자들을 보러 지나가는 의료진들 또한 곧 죽을 말기 암 환자를 딱딱하게 대하는 태경을 보며 저마다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

평소 그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까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의문점이 이제는 거의 확신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 말기 암 환자가 절대 아니야.’

그렇다. 태경은 노숙자 노인이 말기 암 환자가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말기 암 환자라는 말과 달리 겉으로만 보이는 행색만 허름할 뿐 노인은 아픈 사람치고 혈기가 좋았다.

그리고 케모포트가 없었다. 아까 태경이 노인의 쇄골 쪽을 만졌던 이유는 바로 케모포트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케모포트(Chemoport)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지속해서 항암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는 환자의 혈관을 보호하고 약제를 편하게 투입하기 위해 피부 속에 삽입하는 중심정맥관이다.

많은 암 환자들이 케모포트 시술을 받고 있었기에 태경은 노인의 말이 사실인지 그의 몸은 만져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직 의사 김태경만 가지고 있는 능력인 다섯 번째 바이탈이 노인에게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병원에 있는 모든 환자에게서 냄새를 느낄 수 있었지만, 노인에게는 가벼운 암모니아 냄새만 날 뿐이었다.

2단계 냄새가 난다는 건 노인치고도 건강하다는 뜻이었다.

사실상 말기 암 환자라면 아까 태경이 응급실로 들어오는 복도에서부터 코를 때리고도 남았을 정도의 지독한 냄새가 나야 정상이다.

그러므로 이 노인은 지금 말기 암 환자인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암환자도 아닌 노인이 손주랑 우리병원까지 와서 이러는 건……. 역시 fxxxx때문인가?’

이때까지만 해도 노인이 진통제 중독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독자인가?’

태경은 이 노인을 어떻게 할지 잠시 생각했다.

그냥 단순히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진통제가 떨어졌다며 보낼까 했지만, 양심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지금 응급환자도 없었고, 응급실 상황도 괜찮았기에 이 노인에게 작은 오지랖을 부리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노인이 찾고 있는 진통제 때문이었다. 아마 노인은 그 진통제가 어떤 진통제인지,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정확히 모르고 그 약을 찾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경은 노인에게 자세히 알려 주기로 했다.

물론 노인이 말을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옆에 있는 어린 손주를 생각해서라도 진통제의 오남용을 알려 주고 싶었다.

“저기 선생님? 아직 멀었나요? 제가 좀 힘들어서요.”

무슨 진통제 하나 처방하면서 이렇게 질문을 많이 하는지 노인은 슬슬 짜증이 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진통제를 처방받았지만, 오늘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짜증나게 캐묻는 의사는 처음이었다.

“그럼 잠시 진료실로 같이 가실까요?”

“예? 왜요?”

숱하게 질문한 것도 모자라 응급실에 처방전을 받으러 온 사람한테 진료실로 옮기라니. 노인은 슬슬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할아버님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아니, 아픈 사람 앉혀 놓고 이만큼 떠들었으면 됐지 뭘 또 말을 한다고 그럽니까?”

안 되겠다 싶은 노인은 일부러 짜증 섞인 말을 하며 기분 나쁜 티를 냈다.

“의사 선생님도 바쁘겠지만, 저도 바쁜 사람입니다. 그냥 얼른 처방전만 주세요. 참나! 처방전 하나 주는데 뭐 이렇게 까다롭게 구는 지 원…….”

“죄송합니다. 진료실 가서 제가 처방전 드릴게요.”

“됐어요!”

태경이 그토록 원하던 처방전을 준다고 하자 노인은 그라데이션으로 언성을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나! 여기만 병원인가? 현우야. 그만 일어나라. 가자.”

그러더니 서준우를 향해 턱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액션을 취하며 자연스럽게 베드 밖으로 나갔다.

방금 이상한 느낌을 받은 노인은 직감적으로 태경이 자신이 환자가 아니라 걸 알고 의심하는 걸 눈치챈 것이다.

다년간의 노숙 생활을 하면서 늘어난 눈치로 그동안 많은 병원을 전전하며 만났던 의사들과 눈앞에 의사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끔 의사 중에도 까다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괜히 일 커지면 곤란해지니까 뭔가 느낌이 아니다 싶으면 그땐 그냥 바로 나오세요.’

무엇보다 고승규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기에 지금이 병원을 나가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의 이런 생각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서준우는 이것 또한 처방전을 타기 위한 노인의 연기라고 생각했다.

“빨리 걸어!”

“네?”

“잠시만요!”

서준우 옆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노인이 말했지만, 뒤따라오며 노인을 부르는 태경의 큰 목소리와 겹쳐 서준우는 듣지 못했다.

“할아버지?”

노인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응급실 입구를 벗어났지만, 빠르게 걸어오는 태경에게 바로 따라잡혔다.

“뭐가 그렇게 급하세요.”

“이거 왜 이래요? 댁한테 진료 안 받는다니까!”

“할아버지, 암 환자 아니시죠?”

불안해진 노인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자 태경이 진지한 얼굴로 사이다를 날렸다.

“아니시잖아요. 할아버지 암 환자 아니에요. 암 환자인 수가 없어요. 제 말 맞죠?”

“……!”

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서준우 역시 크게 놀랐지만, 가만히 서 있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이에 비해 건강한 분이 fxxxx 진통제는 왜 처방받으시려고 했어요?”

“…….”

“아무 말씀 안 하실 거예요? 따지려는 게 아니라 도움을 드리려고 하는 건데 자꾸 이러시면 제가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어요.”

“난! 몰라!”

진지한 표정으로 으름장을 놓는 태경에게 겁을 먹는 노인은 순간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얘가 다 시킨 거라고! 난 심부름꾼이야!”

그 말을 들은 놀란 눈빛이 서준우를 향한 찰나, 응급실 입구에 있던 노인이 병원 뒷문으로 빠르게 도망치고 말았다.

“장 요원님!”

순간 태경이 큰 소리로 외치자 맞은편 병원 입구에 있던 장득칠이 노인을 쫓아갔다.

“……!”

그리고 일이 잘못됐음을 느낀 서준우 역시 도망가려 했지만 이미 태경에게 팔이 붙들린 후였다.

“어딜 가? 너도 도망가려고?”

철컥-

서준우의 손을 잡고 진료실로 자리를 옮긴 태경이 마주 보고 앉았다.

“현우야, 너 할아버지 손자 아니지?”

마지막 노인이 했던 말이 충격이었던 태경은 마음과 달리 일단은 차분하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아이의 말부터 듣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우가 네 이름은 맞아?”

“…….”

서준우는 입을 다문 채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진통제를 대신 처방받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

‘침착하자. 별문제 아닐 거야.’

무엇보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사과하고 병원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죄송해요. 진통제가 필요한데 제가 받을 수 없어서 대신 받으려다 그랬어요.”

“선생님이 뭐 하나만 물어볼게. 진통제를 네가 사용하려고 했다고?”

“……네.”

“선생님이 보기에는 네가 아픈 거 같지 않은데 어디에 쓰려고?”

“방금 말했는데……. 그냥 제가 쓰려고 할아버지한테 부탁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너! 그 약이 정확히 무슨 약인지 알아?”

“알아요! 진통제잖아요.”

진지한 답변에 답답할 정도로 순진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표정을 본 태경은 서준우가 약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 실체를 알려 주기로 했다.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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