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모두가 처음
태경은 재빨리 정문으로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이쪽저쪽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준우야?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어?”
“어? 선생님이 여긴 어떻게…….”
“이 녀석아,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우리 병원에 와 놓고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당한 질문을 하는 준우에게 태경은 어이없는 웃음과 함께 답했다.
“근데 선생님 바쁘신 거 아니세요? 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우연히 지나가다가 보고 나왔지. 그나저나 너 이 시간에 진짜 왜 여기 있는 거야?”
시간이 꽤 늦은 시간이었다.
학교를 마친 학생들이 집에서 잘 준비하고도 남을 시간에, 그것도 교복을 입은 채로 서준우가 병원에 있으니 태경은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자야 할 시간 아니야? 보니까 집에도 안 갔나 보네.”
“요즘 고등학생이 누가 이 시간에 자요. 중학생 애들도 학원 끝나고 집에 갈 시간이에요.”
“이렇게 늦게까지 공부하니?”
“그럼요. 어느 날은 새벽 1시에 끝나는 날도 있어요. 학원 끝나고 밖에 나가면 데리러 온 부모님들 차가 도로에 쭉 서 있기도 해요.”
“그건 그렇고 준우 너 여긴 왜 온 거야? 집에 안 가?”
“저 오늘 경찰서 조사받고 왔어요.”
의사 커뮤니티와 감덕찬 의원에게 보낼 글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던 태경은 아이들이 오늘 조사를 받았다는 김 경사의 톡 메시지가 이제야 떠올랐다.
“그러지 않아도 아까 김 경사님한테 연락받았어. 조사는 잘 받았니?”
“네. 저는 참고인 조사만 받고 나왔어요.”
“조사 끝나고 집에 안 갔어?”
“선생님. 저 조사 끝나고 바로 학원 간 거 아세요?”
“학원?”
“네.”
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친 서준우는 놀란 마음을 진정할 새도 없이 바로 학원으로 향했다.
고승규의 일로 자연스레 동아리 과외가 무산되자 엄마가 다시 예전에 다니던 학원에서 수업을 받으라며 데려다준 것이다.
전날, 남편이 아들의 의견을 물어보자고 했지만, 엄마는 끝내 준우에게 묻지 않았다.
지금까지 잘 따라 준 아들을 괜히 흔드는 것만 같았다.
당장 내년이면 입시가 시작인데 지금 여기서 아들에게 의견을 물었다가 그만두겠다는 말이라도 나올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남편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입시가 더 우선이었다.
“고승규랑 같은 동아리였고 거기서 과외를 했는데 못 하게 됐으니까 다시 학원이랑 개인과외를 해야 한대요. 엄마한테 오늘만 쉬면 안 되냐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 땡땡이 쳤어요.”
“땡땡이?”
“네, 학원 가기도 싫고 과외도 하기 싫어서 땡땡이쳤어요.”
땡땡이 이야기를 꺼낸 서준우는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말을 이었다.
“선생님 그런데요, 잠깐 시간 되세요? 선생님이랑 대화하고 싶어서요. 그때 고민 있으면 찾아오라고 하셔서…….”
“그래, 잘 왔어.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태경은 준우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와 이야기를 계속했다.
“배고프지 않아? 뭐 먹을래?”
“아니요. 저 땡땡이치고 한강 갔다 왔어요.”
“한강? 거길 왜?”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던 태경은 별안간 뭐가 생각났던지 깜짝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서준우! 너 설마…….”
“무슨 생각 하시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아니지? 너 공부 힘들어서 강물에 뛰어들려거나 그런 거 아니지?”
“당연하죠. 저 물 무서워해요. 그런 게 아니라 한강에 라면 먹으러 갔어요.”
“라면 먹으러 무슨 한강까지 가고 그래.”
“원래 한강에서 먹는 라면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뭔가 머리도 식히고 싶었어요.”
“아무리 그대로 늦은 시간에 너 혼자 한강은 위험해.”
“아니에요. 선생님 거기 생각보다 사람들도 엄청 많고 가로등도 많아서 어둡지 않아요. 그리고 사람 많은 밝은 곳에만 있었어요.”
“그래서 머리는 좀 식혔어?”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저, 사실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뭔데? 뭐든 물어봐.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다 대답해 줄게. 대신 그 전에 부모님께 여기 있다고 먼저 알려.”
“부모님께요?”
“준우 너 학원 끝날 시간 맞춰서 부모님이 기다리시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해요.”
“그럼 걱정하실 거 아니야. 여기 있다고 알려드려야지 걱정 덜하시지. 안 그래?”
“네. 연락 남길게요.”
“그래, 착하다. 이제 궁금한 거 물어봐.”
“사실 우리 부모님은요. 아니, 엄마는 절 의사로 키우시려고 하거든요.”
고민하던 서준우는 태경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의사?”
“네, 어릴 때부터 훌륭한 의사가 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제 모든 공부 일정이 의대에 가기 위해 맞춰져 있다고 보면 돼요.”
“준우가 고생이 많네.”
“아니에요. 뭔가를 배우는 거 자체는 재미있어요. 다만, 저 같은 사람도 의사가 될 수 있을까 싶어서요.”
“너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전 사실 옷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거든요. 뭔가 의사는 엄청 거창하고 비장한 뜻을 가진 그런 사람만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근데 준우야? 의대를 오는 사람들이 다 그런 마음을 먹고 오는 건 아니야.”
“정말요?”
“그럼. 물론 그런 마음을 먹고 오는 사람도 있지만, 안 그런 사람도 있어. 부모님이나 가족이 의사여서 오는 사람도 있고 성적이 잘 나와서 성적 맞춰서 오는 경우도 있어. 그리고 전문직이 좋아서 온 경우도 있지. 이유는 되게 다양해.”
서준우는 꽤 진지한 얼굴로 태경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리고 그런 비장한 뜻을 가진 사람 중에 의대 공부를 하면서 자신과 맞지 않아서 다른 길을 택하는 사람도 간혹 있어. 반대로 아무 생각 없이 왔다가 공부하고 수련하면서 그런 마음이 생긴 사람들도 있고. 선생님은 정답은 없다고 생각해.”
태경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준우는 생각했다.
늘 엄마의 강요 때문에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금까지 의사는 대단한 사람이지만, 뭔가 권위적이고 약간 시니컬하며 환자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준우 역시 몸이 안 좋을 때 동네 병원도 가 봤고 친할아버지가 큰 수술을 하셨을 때 대학병원도 가 봤었다.
‘준우야. 아까 할아버지 봐 주시던 교수님 봤지? 우리 아들 저런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돼야 해.’
할아버지를 면회하고 온 날, 엄마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대학병원 교수를 말하며 그런 의사가 되라고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거기에서 봤던 의사들도 다들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런 의사의 모습이 잘못됐다거나 이상하다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저게 진짜 의사들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드라마에 나왔던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든 열정을 쏟아부으며 그들과 함께 울고 웃는 의사의 모습은 만들어진 캐릭터인가 싶어 아쉬웠다.
그다음에도 준우는 엄마 손에 이끌려 여러 번 큰 병원을 견학 가듯 가 봤었다.
의대에 가기 위한 동기부여이자 공부의 자극을 위해서였다.
그럴수록 준우의 생각은 점점 확고해졌다.
이대로 의대에 진학해서 의사가 된다면 결국 자신도 비슷한 의사가 될 텐데 과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그런데 김태경 선생님은 뭔가 달랐다.
이번 펜xx 사건을 겪으면서 의사로서 태경이 보여 준 모습들이 어린 준우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온 것이다.
고승규를 비롯한 동아리 아이들이 그랬다. 처방전 하나 달라고 한다고 크게 관심 두는 의사들 없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쫄지 말고 다녀오라고. 하지만 태경은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알려 주고 왜 하면 안 되는지를 말해 주고 바로잡아 줬다.
아마 그날 우리병원에서 아무렇지 않게 처방전을 받았더라면 준우도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펜xx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승규처럼 그런 뻔뻔한 생각들이 커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물론 다른 친구들까지 태경 때문에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된 것이다.
참 감사했다. 그러면서 의사 김태경이란 사람이 신기했다. 도대체 어떤 마음을 먹으면 저런 의사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럼 선생님은요? 선생님은 어떤 마음으로 의사가 되겠다고 생각하셨어요?”
“나도…….”
사실 서준우가 가장 알고 싶은 게 이 질문이었다. 그런데 태경이 질문의 답을 하려던 그때였다.
철컥-
“선생님, 응급실에 좀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임정숙 간호사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그래요. 알았어요. 준우야, 잠깐 기다리고 있어.”
“네, 선생님.”
호출은 받은 태경이 응급실로 향하고 잠시 안에서 기다리던 서준우는 문득 궁금한 마음에 응급실로 향했다.
“새끼야, 내 몸에 손대지 마라.”
태경이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했던 서준우는 처참한 응급실 풍경에 놀라고 말았다.
입에 담을 수도 없이 욕을 하는 환자와 얼굴에 피를 뚝뚝 흘리는 환자, 소리치고 우는 환자 등 응급실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인근 술집에서 술을 먹다 시비가 붙은 사람들이 주먹다짐하다 병원에 온 것이다. 한 사람은 머리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의료진 입장에서는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피를 뚝뚝 흘리는 장면을 본 서준우 눈에는 깜짝 놀라고도 남은 모습이었다.
“야! 너 뭐야? 어! 죽을래? 어!”
“환자분 여기 병원이고요. 머리에 피부가 찢어져서 봉합하셔야 해요.”
“개소리하지 말고 우리 마누라 불러와. 내 몸에 손대면 죽어.”
“보호자분께 연락했고, 이 상태로 그냥 계시면 안 돼요.”
“시끄러워. 너! 죽고 싶어?”
“그럴 리가요. 마취하고 봉합해 드릴게요.”
더군다나 그 와중에 침착하고 웃는 얼굴로 막무가내 환자를 대하는 태경의 모습이 신기했다.
마치 위험한 맹수를 조련하는 조련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환자들의 치료가 끝나고 태경은 다시 진료실로 향했다.
철컥-
“오래 기다렸니?”
“아니요.”
“아까 어디까지 말했더라…….맞다. 어떤 마음으로 의사 됐냐고 했지? 근데 나도 준우가 말한 그런 거창한 이유는 전혀 없었어.”
“정말이요?”
“그냥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 사실 치열하게 공부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거든.”
“근데 선생님은 어떤 생각으로 환자를 돌보세요?”
“어?”
“사실 아까 응급실 가셨을 때 궁금해서 가서 봤거든요. 근데 사람들이 막 욕하고 화내고 그러는데 어떻게 다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치료하실 수 있어요? 저 같으면 그렇게는 못 할 거 같아서요.”
“아까 그 환자 같은 경우에는 술 취한 환자잖아. 술기운에 한 말이니까 진심이 아닌 걸 알지. 물론 멀쩡할 때도 무례한 환자들이 있긴 하지만 아파서 짜증 나고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거야. 그리고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환자를 볼 때 간절하게 봐.”
“간절하게요?”
“아무래도 선생님은 수술 환자들을 많이 보다 보니까 이 환자가 지금 얼마나 간절할까 싶거든. 그래서 나도 이 환자가 나를 통해 좀 더 좋아지거나 병이 낫도록 간절하게 진료하는 거야. 준우 너도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간절하게 공부해 본 적 있지 않아? 그런 마음인 거지.”
“아…….”
“준우야?”
“네?”
“너무 깊게 생각하고 먼저 겁먹을 필요 없어. 선생님도 준우도 세상을 사는 게 모두 처음이잖아. 그러니까 미리 이것저것 생각하고 겪어 보지도 않은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다는 거야. 평생 내 길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했던 사람도 막상 어떤 일을 해 보고 아, 이게 내 길은 아니구나 하고 돌아서는 사람도 적지 않아. 열심히 했는데 아니다 싶으면 그때 다른 선택을 해도 돼. 그렇다고 실패하는 것도 아니야. 오히려 경험으로 좋은 밑거름이 쌓였다고 생각하면 돼. 네가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기 전까지는 사람도 일도 정답은 없는 거야.”
서준우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선생님 말이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다.”
“아니요. 도움 많이 됐어요. 선생님 되게 멋진 분이세요.”
“그래? 준우한테 칭찬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은데? 고마워.”
태경은 어린 준우의 고민에 최대한 진지하게 답변해 주고 여러 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 함께 병원을 돌아다니며 의사가 하는 일에 대해 알려 주고 서준우는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부모님에게 돌아갔다.
철컥-
“서준우!”
아들이 차에 타자마자 엄마는 걱정 때문에 목소리를 높였다.
“너 학원에 안 왔다는 연락받고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한참 이따 연락해 주면 어떡해?”
“여보! 그게 아니잖아. 집에 가서 준우 이야기부터 들어 보자. 응?”
“알았어요.”
병원에 오는 동안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했던 엄마는 순간 욱한 마음을 누르며 말을 아꼈다.
준우가 학원까지 빼먹자 자신이 아들에게 너무 강요만 한 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빠, 엄마. 죄송해요. 이런 날까지 학원 가고 과외를 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좀 답답했어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리고 엄마, 나 의대 한번 가 보려고요.”
“뭐!?”
침착하자고 다짐하던 엄마는 아들의 발언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집에 가서 진로 문제를 진지하게 의논하고 준우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들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오자 엄마는 상당히 놀랐다.
“아니야. 엄마도 미안해. 엄마 딴에는 준우를 위한다면서 욕심을 부렸던 거 같아. 괜히 엄마 때문에 의대 가려는 거면 안 그래도 돼.”
“그래, 준우야. 아빠도 엄마 의견이랑 같아.”
“엄마 때문이 아니에요. 제가 진짜 의사 선생님을 만났거든요. 그 선생님이 너무 멋있었어요. 만약 내가 의사가 되면 저런 모습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는 분이세요. 그래서 한번 가 보려고.”
“준우야……. 아들!”
“아니, 엄마. 막 거창한 뜻을 갖고 가는 거 아니야. 말 그대로 일단 의대에 진학하는. 만약 공부했는데 나랑 적성에 안 맞으면 그땐 다른 길로 갈 거야.”
“아니, 왜 어렵게 들어간 의대를…….”
“여보! 준우 말 들어 준다고 했잖아. 아빠는 찬성이야. 좋아.”
“그래, 들어갔는데도 아니다 싶으면 그땐 엄마도 더 이상 강요 안 할게.”
“정말이지?”
“약속해. 정말이야.”
“고마워. 엄마.”
“대신, 앞으로 말없이 학원 빠지지 마. 힘들면 차라리 말을 해. 알았지?”
“네, 그럴게요.”
이번에 생각지도 못한 큰일을 겪었지만, 준우에게는 이 일이 꼭 나쁜 일로만 기억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은 경험이었다.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고, 진짜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태경을 만나 진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도 그랬다.
준우는 앞으로 태경처럼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밝은 표정으로 부모님과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