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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292화 (292/472)

292화. 뭐야! 이 자식

다음 날-

“안녕하십니까.”

출근한 최모나는 대기실에 모여서 TV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직원들 사이에 있는 임정숙 간호사에게 향했다.

“수 쌤?”

“어, 최 쌤 왔어요? TV 보고 있느라 최 쌤 온 줄도 몰랐네.”

“근데 다들 뭘 그렇게 보고 계신 겁니까?”

“요번 우리병원 최대 이슈였던 펜xx 사건이요.”

“그게 TV에 나오고 있습니까?”

“지금 뉴스에 나온다고 아까 시작할 때 그러더라고요. 어! 지금 나오네요.”

임정숙 간호사의 말에 최모나도 얼른 TV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ㅇㅇ구에 위치한 경찰서를 발칵 뒤집은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서울의 한 고등학생이 마약성 진통제를 상습 복용 및 판매한 사건인데요.

그 학생은 주변 친구들에게 스트레스를 없애 주는 단순 진통제로 속이며 돈을 받은 혐의로 경찰에 긴급 체포됐습니다.

이 학생은 명문 고등학교의 학생으로 평소 품행도 바르고 성적도 좋은 학생이라 더욱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번 사건은 어느 의사의 신고로 수사가 시작됐으며…….

“저걸 어떻게 알고 기사가 났을까요?”

조용히 뉴스를 보던 최모나가 물었다.

“아까 김 경사님이 오셨는데 경찰서에 출근 도장 찍는 기자들이 있대요.”

“하긴, 저도 예전에 기자들이 경찰서에 자주 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애들 조사하는 날도 거기 늘 오던 출입 기자가 보도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어머! 세상에. 최 쌤 저것 좀 봐요.”

말을 하던 임정숙 간호사가 깜짝 놀라며 화면에 집중했다. 그녀가 깜짝 놀란 건 사랑의 매로 동생을 훈계하는 고승규의 형의 모습이 뉴스에 나왔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저 학생 삐딱선 타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저런 형이 있으면 문제없겠네요.”

“그러게요. 정신 나간 동생한테 저런 형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리고 그때 선생님이 올린 글 추천 목록에 떠서 지금까지 상단에 있어요.”

“그래요?”

“네, 의진 쌤 말로는 운영자가 다 볼 수 있게 고정으로 해 둔 거 같대요.”

“잘됐네요.”

태경이 의사 커뮤니티의 올린 글은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같은 일을 하는 의사들은 다들 좋은 일을 했다며 칭찬하는 댓글이 줄을 이었고, 아예 출처를 밝히고 다른 커뮤니티로 글을 옮기는 의사들도 많았다.

“저기, 수 쌤? 혹시 이 선생 아직 안 왔습니까?”

“얼래! 웬일로 우리 최 쌤이 이 선생님 안부를 먼저 찾는데요.”

“선생님 논문 돌려 보기로 했는데 오늘 갖고 오기로 했습니다. 미리 받아 두려고요.”

“이 쌤이라면 아까 김 경사님이랑 원장님 진료실에 있어요.”

“그래요? 그러면 이따 받아야겠다. 저 의국실 갑니다.”

“네.”

전혀 아쉬운 기색 없이 깔끔하게 의국실로 향하는 최모나는 보고 임정숙 간호사를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했다.

“없네! 없어! 마음이 전혀 없어. 우리 이 쌤 더 분발해야겠다. 고달픈 짝사랑을 우리 이 쌤은 어찌하시려나.”

* * *

진료실-

“왜요!”

“그러게 왜입니까?”

“그냥 싫어요.”

“그러니까 그냥 왜 싫으신 건데요?”

“맞아요. 왜 싫은데요?”

책상에 앉아 모니터에 열중하고 있는 태경을 향해 김 경사와 이찬희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답했다.

“그런 거 불편해요. 그리고 상 받으려고 한 일도 아니고요.”

김 경사와 이찬희의 거듭된 질문에도 태경이 확고한 거절을 한 건 바로 표창장 때문이었다.

김 경사가 속한 경찰서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경찰서장이 태경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하지만 티를 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태경은 번거롭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하고 있었다.

그저 어린 학생들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길 바라고 한 일이지, 상을 받기 위해 한 일이 아니었기에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서장님께서 직접 말씀을 꺼내셨는데 받으세요.”

“그러니까요. 살면서 경찰서장에게 표창장을 받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저 같으면 바로 넙죽 받겠습니다.”

“그래?”

“그럼요.”

“그럼. 이 선생이 받으면 되겠네.”

“제가 받을 수 있는 표창장이 아니잖아요.”

“이 선생?”

“네, 선생님.”

“뒤돌아 봐.”

“갑자기 뒤는 왜…….”

“얼른!”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태경을 보며 이찬희는 조용히 뒤를 돌아봤다.

“뒤돌았는데요?”

“이제 쭉 직진해서 문 열고 밖으로 나가.”

“아, 선생님 왜 그러세요?”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일주일 내내 당직이다.”

철컥-

태경이 한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는 이찬희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줄행랑을 치듯이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그만큼 일주일 동안 당직은 정말 싫었다.

“당직이 무섭긴 무섭나 보네요. 이 선생님이 바로 도망가시네.”

“김 경사님, 일주일 동안 잠복근무하신 적 있으세요?”

“어흐! 말도 꺼내지 마세요. 사람 할 짓이 못 됩니다. 얼마나 힘든데요. 나중에는 좀비처럼 눈만 뜨고 다닌다니까요.”

“저희도 그래요. 아무튼 전 상 받을 생각이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안 바쁘세요?”

“오늘 비번입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진짜 안 받으실 겁니까?”

“…….”

“원장님, 나중에 후회 안 하시죠?”

“안 합니다.”

“알았습니다. 저, 갑니다. 가요. 진짜 갑니다.”

“김 경사님?”

삐진 김 경사가 나가려고 하자 태경이 급히 불러 세웠다.

“삐지셨어요?”

“예, 단단히 삐졌습니다.”

“일부러 여기까지 오셨는데 미안해요. 대신 제가 다른 소식 하나 알려 드릴게요.”

“뭔데요? 여기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 기분 안 풀어집니다.”

“그 조카 강의요.”

“제 조카요? 그때 제가 말씀드렸던 그 강의요?”

“그거 할게요.”

“네!? 그, 그게 정말이세요?”

“그럼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김 경사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원장님. 저야 완전 감사 땡큐죠.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강의 주제를 좀 바꿀 수 있을까요?”

“성교육 말고 다른 걸로요?”

“이번에는 그것보다 다른 주제가 더 필요할 거 같아서요.”

“다른 거라면 혹시…….”

“네, 이번 고승규 사건을 보면서 펜xx에 대한 위험과 경각심을 알려 주면 어떨까 해서요. 잘 모르는 아이들도 있고 이런 일이 또 생길 수도 있으니까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아이들에게 알려 주면 어떨까 해서요.”

“저도 적극 찬성이요. 제가 조카한테 잘 말할게요. 그리고 일정도 원장님 가능한 날 가능한 시간에 할 수 있도록 잘 조율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표창장 건은 죄송해요.”

“아이고, 죄송은 무슨 죄송입니까. 그깟 종이 쪼가리가 뭐 대수라고요. 우리 서장님이 원래 생색내는 거 좋아하는 양반이라 그래요. 전혀 신경 쓰지 마세요. 대신 강의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

“꼭 지킬게요.”

“감사합니다. 원장님.”

“그런데 김 경사님? 그 고승규 학생은 어떻게 됐어요?”

태경은 아까부터 물어보려고 했던 궁금증을 꺼냈다.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일단 다니던 학교 측에서는 퇴학 조치가 내려진 상태고, 조사 끝나고 검찰로 넘어갔습니다. 죄질이 무거워서 가볍게 끝나진 않을 거 같아요. 무엇보다 고승규 친형이 죗값을 반드시 치르게 해 달라고 담당 검사님께 말씀드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어느 면으로는 형이라는 분이 대단하네요.”

“솔직히 저희도 놀라긴 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이런 경우 다들 제 식구 감싸기 바쁘거든요. 지금이야 고승규는 형이 원망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런 형이 있다는 거 자체가 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김 경사님이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요. 솔직히 원장님 아니었으면 그 녀석 잡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원장님은 어떻게 거짓말인 줄 아셨습니까?”

고승규와 아이들이 다른 병원을 전전하며 처방전을 계속 받았다고 진술했었다.

그렇게 많은 병원에서 지금까지 걸리지 않고 처방전을 받던 아이들을 태경은 어떻게 알고 잡아 냈는지 김 경사는 그게 궁금했다.

“그거요? 뭐 의사의 촉이죠. 경사님도 범인 잡을 때 촉이 느껴질 때도 있잖아요.”

아픈 사람의 냄새를 맡는다고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이번에도 적당히 둘러댔다.

이번 펜xx 사건은 태경에게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다섯 번째 바이탈이 생긴 뒤 가장 뿌듯한 순간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 상대가 어린 학생들이기에 더 그랬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네요. 아무튼 원장님 촉이 한 건 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강의 건은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수고하세요.”

“네, 들어가세요.”

표창장 때문에 태경을 설득하러 왔던 김 경사의 머릿속에 이미 표창장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는 조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진료실을 나갔다.

“선생님. 환자분 오셨어요.”

“네, 들어오라고 하세요.”

김 경사가 나간 뒤, 태경은 예약한 외래 진료를 시작했고 여느 때처럼 우리병원의 일상은 빠르게 흘렀다.

몇 시간 뒤-

“이상하게 오늘 한가하네요.”

“뭐, 평소보다 환자들이 덜하긴 한 거 같아요.”

이찬희는 응급실 스테이션에서 밤 11시를 넘어가는 시계를 보며 간호사와 대화하고 있었다.

“환자가 뜸한 게 편하긴 한데 이거 너무 무료해서 좀 왔으며 싶네요.”

“그래도 좋지 않아요? 요즘 너무 바빴잖아요.”

“환자가 없으면 아픈 사람이 없으니까 잘된 거죠.”

환자를 보고 온 임정숙 간호사가 이찬희를 보며 말했다.

“우리 이 쌤 심심하신가 보네.”

“뭐, 살짝요? 선생님은 뭐 하세요?”

“아까 수술 끝내시고 논문 살펴보실 게 있다고 진료실에 계세요. 참고로 최 쌤은 병동 들렀다 오신다고 했고요. 쌤도 가서 논문 보시든가요. 환자 오면 콜 해 드릴게요.”

“수 쌤도 참. 논문은 무슨 논문이에요. 전 우리 선생님처럼 공부가 체질이 아니라 그렇게까지는 못해요. 처음 선생님 오실 때 숙제하느라 그때 진땀을 뺐다니까요. 어휴! 싫어.”

띠링-

논문 소리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질색하던 이찬희는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알림 소리에 화면을 터치했다.

“뭐야, 스팸인가……. 어!”

당연히 스팸 문자라고 생각했던 이찬희는 문자를 보며 급히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야, 일상아? 이게 얼마 만이야. 잘 지냈어?”

-오랜만이다. 나야 잘 지냈지.

한밤중에 연락이 온 사람은 이찬희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친한 친구였다.

“너 유한 간 게 석 달 전이니까 이제 적응 좀 됐고?”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의 소식에 이찬희는 한껏 들뜬 상태였다.

“영국은 지금 낮 아닌가? 여긴 지금 11시 넘었어.”

-찬희야, 여기도 지금 11시 넘었어. 너랑 같은 시간이야.

“엥? 그럴 리가? 시차가 다르잖아.”

-너, 지금 병원이지?

“당연하지.”

-그럼 잠깐 응급실 밖으로 나와 봐.

“갑자기 응급실 밖으로 나오라니 그게 무슨 소리……!”

친구의 말을 듣고 응급실 밖으로 나온 이찬희는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렸다.

응급실 문밖에 환하게 웃는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야, 인마! 네가 지금 여기 왜 있어?”

“너 보려고 왔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드는 남자는 이찬희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오랜 친구 김일상이었다.

“일상아, 이 자식아 x나 반갑다.”

“그러게. 나도 x나게 반갑다. 친구야.”

“근데 뭐냐? 너 어떻게 된 거야?”

3개월 전에 영국으로 유학을 간 친구가 한밤중에 갑자기 병원을 찾아온 것이다.

“공부하러 갔는데 공부도 잘 안 되고 한마디로 그냥 망해서 들어왔어.”

“망하다니?”

“그렇게 됐다.”

걱정하는 이찬희의 물음에 친구는 허탈한 듯 답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게? 뭐 계획은 있고?”

“이제 뭐 할지는 생각해 봐야지.”

“미친놈 대책 없는 거 보소.”

“인생이 계획대로 되냐? 그런 거 소용없다.”

두 사람은 어찌나 반가운지 둘 다 악수한 손을 놓지 않고 친근하게 욕을 하며 투덕거렸다.

“근데 너, 의사라고 존x 바쁜 척하더니 거짓말이었구나? 환자 별로 없는데?”

“오늘만 그렇거든. 그리고 아까까지 겁나 바빴어. 헛소리 그만하고 따라와.”

그렇게 친구와 함께 병원 안으로 들어가던 이찬희는 병동에서 내려오는 최모나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뒤따라오던 김일상이 뜬금없이 최모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정신 나간 놈처럼 아주 해맑게 말이다.

‘뭐야! 이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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