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약으로 안 돼? 나 심각한 거야?
“안녕하세요.”
그런데 뒤따라오던 김일상이 뜬금없이 최모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정신 나간 놈처럼 아주 해맑게 말이다.
‘뭐야! 이 자식.’
이찬희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속으로 짜증을 냈다.
“누구……십니까?”
“최 선생님. 내 친구예요.”
당황한 최모나가 살짝 말을 더듬자 정신을 차린 이찬희가 얼른 누군지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이찬희 친구 김일상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최 선생님, 저 잠깐 당직실에 있을게요. 환자 오면 콜 해 주세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이찬희는 최모나와 어색한 대화를 마치고 친구의 목덜미를 잡고 빠르게 당직실로 향했다.
“야, 이 미친놈아? 너 왜 갑자기 인사는 하고 난리야?”
“누구? 아까 그 여자 선생?”
“그래. 난 또 네가 아는 사람인 줄 알았잖아.”
“내가 알긴 어떻게 알아. 그냥 찬희 너랑 같이 일하는 동료니까 인사드렸지. 그리고 매력 있게 생기셨던데.”
“지랄 쌈 싸 먹고 있네.”
친구가 갑자기 최모나의 매력을 운운하자 이찬희의 입에서 리얼로 육두문자가 터져 나왔다.
“아까 개모나! 아니, 최 선생이 매력 있게 생겼다고?”
“어, 매력 있던데?”
“매력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이 새끼 몇 달 영국물 먹더니 눈이 삐었어.”
“뭐야, 이 반응은? 너 아까 그 동료 좋아하냐?”
“뭐래! 미친놈아. 내 스타일 전혀 아니거든.”
“하긴, 네 스타일이 아니긴 하지. 야! 근데 근무 환경 죽인다. 개인 방도 있고 의사가 좋긴 좋아. 역시 의느님인가?”
씩씩거리는 이찬희와 달리 김일상은 소파에 기대 편하게 몸을 누웠다.
“개인 방은 무슨, 당직실이다. 너 설마 여기서 자고 가려고 온 건 아니지?”
“새끼, 매정하네. 그럼 이 밤에 나 보내게?”
“그래, 있어라. 근데 진짜 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어쩐 일이냐?”
“그냥……. 집에 있는데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거 같더라고. 그래서 왔어.”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쥐어짜는 거 같아?”
“문진하지 마. 그놈의 직업병도 참. 그냥 나이 먹고 영국까지 가서 망하고 오니까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한 겁니다.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정신이 아픈 거라고요. 아시겠습니까. 의사 선생님.”
“그러게 좀 잘하지 그랬냐? 그때도 나랑 애들이 너 성급하게 간다고 말렸잖아.”
“나도 안다. 뼈 때리지 마라. 안 그래도 이 형 멘탈이 가루다.”
“어휴! 그래 뭐. 어떻게든 되겠지. 뭐든 너무 마음 끓이지 마.”
“위로해 줘서 고맙다.”
“별소리를 다 하네.”
“찬희야?”
“왜?”
“카드 줘.”
친구는 본격적으로 소파에 벌렁 누워 이찬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슨 카드?”
“치킨이나 뭐, 야식 시키게. 네 카드 달라고.”
“진짜 미치겠네. 당당한 거 매력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유난히 넉살이 좋은 친구였다.
붙임성도 좋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거리낌 없이 할 말 하고 친구 집에서도 가서 밥도 쉽게 얻어먹던 그런 친구였다.
공부도 곧잘 하고 대학교 잘 갔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장 크게 성공할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했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갑자기 유학을 가서 망해서 돌아왔다.
“이 선생님, 빨리 카드나 주세요.”
“너 여전하구나?”
“사람 쉽게 변하면 죽는다. 야! 찬희야, 이거 무슨 카드냐? 간지 작살이네.”
이찬희가 건넨 카드는 검은색 바탕에 의사를 상징하는 지팡이와 지팡이를 감싸고 있는 뱀이 금색으로 보이는 카드였다.
“딱히 혜택은 없는데, 의사들이 하는 카드라서 멋있길래 갖고 다녀.”
“멋있다. 나도 의사나 할 걸. 좋네.”
“그러게 넌 수학도 잘한 놈이 왜 문과에 갔어?”
“내 말이……. 야! 미안한데 치킨 말고 딴 거 시켰다.”
“뭐 시켰는데?”
띠링-
물어보자마자 바로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치킨을 시키겠다던 친구가 결제한 금액은 96,000원이었다.
요즘 투자한 주식이 하한가를 달리는 이찬희에게 야식치고는 조금 과한 금액이긴 했다.
“야! 무슨 야식으로 이 가격이 나오냐? 뭐 시켰어?”
“육회. 요즘 고기를 통 못 먹어서 몸이 부실하고 뭐가 자꾸 나서 어쩔 수 없었다.”
“아, 네. 그러시다면 드셔야죠. 맛있게 드세요.”
마음대로 하라는 투로 답한 이찬희도 소파 옆에 있는 간이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친구가 시킨 야식 금액이 나가긴 했지만, 속상한 일을 겪은 친구에게 돈을 아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앞길이 막막한 친구보다 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자신이 밥 한 끼 사 줄 수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찬희야, 근데 너 진짜 개 편하게 일한다. 이렇게 일하면서 월급 받냐? 부럽다 야.”
“아, 이 자식 또 그러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오늘만 이런 거라고. 너 금요일에 다시 와. 그때 미친 듯이 바쁜 거 보여 줄게.”
“자식, 발끈하기는. 알았다. 그래도 다행이네.”
“뭐가?”
“나 오는 날 바쁘지 않아서…….”
“일상아?”
“응?”
“영국에서 고생했다. 잘 왔어.”
“……!”
사실 이찬희는 아까 모른 척을 했지만, 유학이 망했다는 친구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저렇게 밝게 말한 뒤에 숨겨진 감정들이 크다는 것을 말이다.
30대 중반 늦은 나이에 지구 반대편으로 가기까지 결심과 실행도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 일에 번아웃이 온 친구는 고민 끝에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를 위해 영국 유학을 결심했다.
가족과 친구들은 처음에 말렸지만, 그 당시 친구가 얼마나 간절한지 알았기에 결국 응원해 줬다.
특히 오랫동안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힘을 줘서 친구도 마음 편히 준비하고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친구가 유학을 떠난 뒤 일주일도 안 돼 여자 친구가 달랑 카톡 몇 줄로 이별을 통보했다.
-일상아, 미안해. 실은 나, 만나는 사람 있어. 나 이 사람 놓치고 싶지 않아. 우리 오래 사귀었고 예전처럼 뜨겁지도 않잖아. 넌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 영국에서 나 잊고 새 인생 살아. 지난 7년 동안 정말 고마웠어. 잘 지내.
알고 보니 그동안 친구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것도 친구의 후배와 바람을 피운 것이다.
유학이 끝나면 결혼까지 약속했던 여자 친구의 배신은 친구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공부했던 여자 친구의 뒷바라지까지 자처하면서 열렬히 사랑했던 여자였다.
다른 친구들에게 들은 소식으론 일상이가 한동안 한국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이 악물고 성공해서 돌아온다는 말은 남겼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친구가 뜬금없이 병원 앞에 찾아왔기 때문에 이찬희는 아까 그렇게 놀랐던 것이다.
솔직히 말이 쉽지 결혼까지 약속했던 여자 친구가 바람이 났는데, 저 상황에서 공부가 될 리가 없었다.
친구가 힘들게 준비했던 과정을 다 아는데 돌아오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을까?
그리고 타지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상아. 다 잊어버려. 이런 말 뻔하지만,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야.”
“당연하지. 안 그러면 나 분해 죽는다. 근데 찬희야? 그 나쁜 년이랑 나쁜 놈 결혼한댄다.”
“…….”
“둘 다 나한테 너무 잔인하지 않냐?”
“뭐? 이런 xxx에 xxx 같은 것들이 다 있어? 어! 사람이 상도덕이 없네. xxxx 것들.”
“큭큭!”
생각지도 못한 이찬희의 진심이 담긴 욕설에 친구는 빵 터지고 말았다.
“와! 진짜 착한 네가 그런 욕을 할 정도면 진짜 나쁜 것들이긴 해. 그렇지?”
“당연하지. 그 두 사람. 절대 행복하지 못해. 바람으로 흥한 자 바람으로 망한다고 했어.”
“옳소! 잘한다. 내 친구. 고맙다. 찬희야, 그런 의미에서 우리 소주 사 와서 육회랑 같이 한잔하면 안 될까?”
“나 근무 중이라고 병x아! 여기 병원이에요. 잘나가다 헛소리하고 앉아 있네.”
“하! 씨. 알았어. 그나저나 넌 이 병원에 계속 있을 거야? 개원 안 해? 아니면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려나?”
“아버지 병원은 절대 안 들어가지. 난 여기 계속 있으려고.”
“왜? 여기 돈 많이 주나 봐?”
“아니, 돈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원장님한테 더 배우고 싶어서.”
“그때 네가 말한 그 원장님? 그러고 보니까 여기 유명한 사람 있다며? 이름이 김 뭐였던 거 같은데…….”
“응. 우리 원장님이셔. 난 그분 닮고 싶어서 있으려고. 평생 가도 그런 의사를 스승님으로 만나기 쉽지 않거든.”
이찬희에게 태경은 의사 그 이상의 스승이었다.
물론 돈을 좇아 개원을 하거나 잘난 아버지 인맥을 이용해 유명한 병원에 페이닥터로 가면 지금보다도 돈은 더 벌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태경과 같은 선배이자 스승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찬희는 태경에게 쫓겨나지 않는 이상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우리병원에서 지금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게 즐거웠다.
“난, 여기가 좋아. 스승님도 좋고 동료들도 좋고 여기서 진료하는 것도 재미있어.”
“그래. 좋겠네. 진짜 부럽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찬희는 중간중간 콜을 받으면 응급실에 갔다 다시 당직실로 돌아봐 친구와 밀린 수다 삼매경을 이어 갔다.
“아이고 허리야. 아야! 이거 진짜 아프네…….”
그렇게 어느덧 두 시간이 흐르고 자연스럽게 자세를 고쳐 앉던 친구 김일상이 순간 움찔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왜? 어디 다쳤어?”
“아니, 그게 아니라 엉덩이에 뭐가 생겼는데 안 아프다가 얼마 전부터 아프기 시작하네.”
“뭐! 어디 봐 봐.”
친구가 아프다는 말에 이찬희는 깜짝 놀라며 반응했다.
“넌 의사 친구 만나러 와서 그걸 왜 이제 말해. 얼른 봐.”
“나도 정조가 있지, 그렇게 엉덩이를 불쑥 까냐?”
“까불지 말고 까 보세요.”
“아, 됐어. 별거 아니야.”
“암 걸린 사람들도 다들 처음에는 별거 아닌 줄 알거든?”
“괜찮아.”
쫙-
그러자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이찬희가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
“아파! 이 자식, 손이 왜 이리 매워.”
“당연히 아프라고 때리지. 잔말 말고 얼른 까라.”
결국 김일상은 이찬희의 등쌀에 못 이겨 소파에 엎드린 채 바지를 내렸다.
“진작 이럴 것이지. 말은 안 들어요.”
“야, 찬희야? 근데 이거 뭐냐? 겁내 아프다.”
“모르지. 모낭염일 수도 있고 낭종일 수도 있어.”
이찬희는 김일상 엉덩이에 솟아 있는 혹을 보며 말했다.
“뭐야. 새끼 돌팔이네.”
“어! 이거 봐라.”
돌팔이라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던 이찬희는 친구의 엉덩이에 난 환부를 만지며 반응했다.
“왜 그래? 돌팔이라서 봐도 모르겠어?”
“내가 돌팔이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만지니까 꿀렁이네.”
“아아아아아!”
이찬희가 다시 한번 만지자 친구가 당직실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야, 미친놈아 그만 만져. 생각보다 존x 아프다고. 이거 약 먹으면 좋아지냐?”
“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림도 없어. 그런데 일상아, 이거 아무래도 쉽지 않겠는데…….”
“뭔데? 뭐가 쉽지 않은데?”
별안간 웃음기를 싹 걷어내며 진지하게 말하는 이찬희를 보며 김일상 역시 덩달아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약으로 안 돼? 나 심각한 거야?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