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94화 (294/472)

294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약으로 안 돼? 나 심각한 거야? 그래?”

“그런 거 아니야. 네가 하도 돌팔이라고 놀려서 장난친 거야. 안에 농 있는 거야. 만지니까 꿀렁이네.”

“아, 난 또. 괜히 순간 놀랐네.”

“진짜 속았나 보네?”

“속긴 누가 속아. 너 얼굴에서 다 티 났거든. 내가 원래 눈치가 빠르잖아. 그런데 나 정말 약으로 안 돼?”

“물론 항생제 먹고 NSAID(염증 매개 물질인 COX2를 막아서 염증을 억제하는 약물군) 먹으면 좋아지지만, 결국 이거 짜야 해.”

“뭐!?”

태연하게 짜야 한다는 말에 바지를 내리고 누워 있던 김일상이 벌떡 일어나며 반응했다.

“그거 아프잖아? 나 아픈 거 딱 질색인데. 주사도 무섭다고.”

“야! 골 때리는 놈아, 바지나 올려. 다 큰 놈이 주사 무서워하고, 자랑이다.”

“찬희 너 이번에도 나 놀리려고 그러는 거 아냐?”

“아니야. 마취하고 하면 그냥 그래. 견딜 만할 거야.”

“그래? 확실해? 그럼 해 줘.”

“뭐냐, 진짜 너무 당당해서 할 말이 없다.”

“아, 해 줘!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의사 친구 덕 좀 보자. 나 내일 바쁘단 말이야. 오늘 해야 해.”

“내일 뭐 하는데? 중요한 일 있어?”

“중요하지. 올해 들어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몰라. 나의 새로운 연인을 만난다고 할까?”

“일상이 너, 소개팅하냐?”

“아니, 내일 클럽 가.”

쫙-

“에라이! 퍽이나 바쁜 일정이다.”

김일상의 황당한 답변에 이찬희는 다시 한번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 그래도 친구가 바람난 옛 연인을 잊지 못해 혼자 힘들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런 모습이 더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너 진짜 손 매운 거 알아?”

“살짝 스쳤다.”

“한심해 보이는 거 아는데 이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 미칠 거 같아서 그래.”

“그래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게 정답이지.”

“야, 찬희야. 어디 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려는 이찬희에게 김일상이 소리쳤다.

“약이랑 도구 가지러 간다. 지금 그냥 쨀까?”

“아니, 미쳤냐? 마취약도 꼭 가져오고.”

“알았다.”

“저기, 찬희야? 근데 좀 빨리 와라.”

“왜?”

“졸려서. 빨리 하고 여기서 좀 자게. 너희 당직실 소파 은근히 편하네.”

“넌 진짜 미친놈이다.”

“칭찬 고마워.”

“갔다 올게. 기다리고 있어.”

당직실을 나온 이찬희는 배농에 필요한 멸균 도구들과 국소 마취를 위한 리도카인 (lidocaine, 가장 널리 쓰이는 국소 마취제)을 찾아 양손에 바리바리 챙겨서 돌아왔다.

철컥-

“빨리 왔네.”

“어이, 환자님. 빨리 누우세요.”

“이거 괜히 긴장되네. 저기 찬희야……. 아니, 이찬희 선생님?”

“왜요?”

“안 아프게 해 주세요. 돌팔이 의사님.”

김일상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다시 바지를 내리며 소파 위로 누웠다.

“아쉽게도 저는 돌팔이라서 지금부터 열라 아프실 거예요.”

“야야! 잠깐만.”

이찬희가 막 처치를 시작하려는데 김일상이 고개를 뒤로 확 들며 깜짝 놀라 반응했다.

“왜? 또. 빨리 해 달라며.”

“그, 그게 아니라. 찬희야. 서, 설마 그걸로 찌르려는 건 아니지?”

“응. 맞아. 이걸로 찌를 건대.”

“에이……. 이건 아니지.”

마치 공포영화를 보는 사람처럼 사색이 된 김일상이 마취 주사를 가리켰다.

“이건 반칙이잖아. 무슨 주삿바늘이 이렇게 두꺼워? 보통 마취는 얇은 바늘로 하드만. 내 엉덩이 회 뜰 일 있냐?”

“됐어. 또 갔다 오기 귀찮아. 그냥 이걸로 맞아.”

김일상 말이 맞았다.

급하게 물품을 챙기던 이찬희는 보통 마취 주사로 사용하는 주사기보다 조금 큰 거로 가져온 것이다.

물론 이 주사로 마취하면 좀 더 아픈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다시 갔다 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야! 무슨 소리야. 나 환자라고. 의사가 이렇게 환자를 막 다루면 어떡해?”

“거참. 말 더럽게 많네. 시끄럽고 얼른 제대로 누워. 마취한다.”

마취에 겁을 먹은 김일상의 고개를 지그시 누른 이찬희는 마취를 시작했다.

“아! 아! 아파! 아프다고!”

그리고 곧이어 출산하는 산모를 능가하는 소리가 당직실을 가득 메웠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고 야! 좀 빼 봐. 야! 나 죽어!”

“죽긴 누가 죽어. 너 의사 앞에서 그것도 목숨 살리는 외과 의사 앞에서 죽는다는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원래 농이 있으면 마취는 존x 아픈 거야. 사내자식이 그냥 좀 참아라.”

“아! 잠깐만. 미친놈아! 아니, 형님. 선생님 잠시만요. 진짜 아파서 그래. 아까 안 아프다며…….”

“내가 마취하면 안 아프다고 했지, 마취가 안 아프다고 한 적은 없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아프잖아.”

거짓말이 아니라 김일상은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아팠다.

“마취 다 했냐?”

“다 했어.”

“진짜 아프다. 와! 찬희야 너 진짜 악마다. 나 조상님 본 거 같아. 순간이지만 요단강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 봤다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오버 그만하시고 집중하게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

“아파서 입이 안 다물어진다. 진짜 내 평생 살면서 가장 아팠다.”

“자식, 오버는…….”

이찬희는 꿀렁이는 농 주변으로 리도카인을 골고루 주사했다. 농 주머니 주변에 충분히 국소 마취하고 어쩔 수 없이 여러 번 찔렀다.

그 뒤 약이 골고루 퍼지도록 농 주머니 근처를 거즈로 마사지했다.

“조용해진 거 보니까 이제 안 아픈가 보네.”

“어. 이제 괜찮다.”

“그럼 이제 짼다.”

“아프면 너 가만 안 둔다.”

“환자분 저 지금 손에 칼 들었습니다. 입 다무세요.”

이찬희가 멸균 장갑을 착용한 후 꼼꼼하게 소독했다. 그리고 메스로 농 주머니 위에다가 2cm 정도 되는 절개선을 넣었다.

“야! 찬희야?”

“왜? 말 진짜 많네.”

“그게 아니라. 이거 뭐야? 지금 피 나는 거야?”

“당연히 살을 째는데 피가 나지. 그건 초등학생들도 다 알겠다.”

“아니, 근데 뭐 이렇게 많이 나. 농담 아니라 나 엉덩이가 축축해.”

진짜 농담이 아니었다. 김일상은 자기 엉덩이로 흐르는 피가 느껴질 정도였다.

“괜찮아. 누르면 멎어. 환자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잘하고 있습니다.”

“찬희야, 너 진짜 돌팔이 아니지?”

“아니. 나 돌팔이 맞아.”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대로 해 줘. 부탁한다.”

“입이나 다물어.”

“그러지 말고 너희 원장님 보고 잠깐만 봐 달라고 하면 안 돼?”

“원장님이 널 왜 보시냐? 시끄러우니까 입이나 닫아.”

김일상의 환부에서 피와 함께 농이 섞여 나왔다.

평소 병동 환자의 경우 이 농을 다 짜기 전에 농의 균을 배양하기 위해서 검사를 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이유는 귀찮아서였다. 환자가 아니라 친한 친구이다 보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 것이다.

“안 아프지?”

이찬희가 농이 잘 나오도록 주변을 꾹 누르며 물었다.

“어! 진짜 안 아프네.”

“그렇다니까.”

농을 짜낸 다음 이찬희는 주사기에 식염수를 넣고서 농 주머니 안에다가 뿌렸다.

그리고 주변에 거즈를 데고서 나오는 농 찌꺼기와 식염수가 흡수되도록 했다.

이후 벽에 붙어 있는 죽은 조직들을 모스키토(mosquito, 끝이 휘고 뭉툭하여 무언가를 집을 때 쓰는 기구)로 잡아서 뜯어낸 뒤, 포비돈에 적신 거즈를 그 안에 집어넣었다.

“오케이! 다 됐다.”

“봉합은? 봉합 안 해?”

“어. 지금 하면 안 돼. 안에 있는 게 나오고 내가 준 항생제랑 NSAID 잘 먹고 소독 잘해야 해.”

“아니, 이러고 내일 클럽을 어찌 가라고?”

“백수가 무슨 클럽이냐? 취직준비나 해.”

“그래도 절개했으면 봉합해 줘야지, 이래도 돼?”

“아니, 이래야만 한다고. 일상아. 나 의사라고. 내 말 좀 믿어라.”

“진짜지?”

“그렇다니까?”

“왜? 왜 그런데?”

“하! 됐다. 설명하기 귀찮아. 그냥 그렇게 있고 나한테 이틀에 한 번씩 와. 소독해 줄게.”

“와! x나 친절하네. 너 환자한테도 이러냐?”

“아니, 환자분들한테는 잘하지. 너라서 이래. 시끄럽고 와서 육회나 마저 먹어.”

“근데 너 근무 시간에 나랑 이러고 있는 거 보며 이 병원은 그렇게 빡세지 않은가 보다. 원장님한테 안 혼나?”

“뭐래. 계속 콜 올 때마다 갔다 왔잖아. 그리고 우리 원장님 그런 분 아니야. 직원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시는 얼마나 좋은 분인데.”

“네가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 한번 뵙고 싶다.”

“네가 왜 봐. 어찌 됐든 의사는 안 보는 게 좋은 거야.”

“왜?”

“대부분 의사는 아파야 보잖아.”

“하긴 그러네. 오키. 그럼 마지막으로 나 여자 좀 소개시켜 줘라.”

“…….”

대화를 잘하고 있던 친구가 갑자기 여자 이야기를 꺼내자 이찬희는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내일 여자 만나러 간다며?”

“내일 잘될지 안 될지도 모르잖아. 네 주변에 여자 있잖아.”

“미친놈아, 쉬는 날 빼고 일만 하는 내가 무슨 여자가 있어.”

“아까 그분? 뭐라더라 이름이 최……. 맞다! 최모나 선생님. 그 여자 소개해 주라.”

김일상이 다시 한번 최모나를 언급하자 이찬희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이 새끼, 진짜 돌아이네. 미쳤냐? 직장 동료 잘못 소개해 줬다가 괜히 욕먹고 일하는 데 불편해져. 안 돼.”

“그거야 그런데……. 잘되면 되잖아.”

“됐어! 아무튼 최 선생은 안 돼.”

“뭐냐? 그러고 보니까 너 아까도 그 여자 이야기에 발끈하고 왜 그래? 너 혹시 최 선생이란 사람이랑 사귀냐?”

“그런 거 아니야.”

“어어! 또 과민 반응하는 거 보소.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러면 나 소개시켜 줘.”

“안 돼! 절대 안 된다고!”

적당히 거절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던 친구가 끈질기게 소개팅을 운운하자 이찬희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안 되는 정확한 이유가 뭔데 그래.”

“……해.”

“뭐? 안 들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한다고.”

친구가 못 알아듣자 결국 폭발한 이찬희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 보였다.

“내가 최 선생을 좋아한다고!! 최모나를 좋아해! 그래서 안 된다. 절대 안 돼. 됐냐? 됐어?”

“정말? 어쩐지. 아까부터 그런 거 같더라. 크크크!”

김일상은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이찬희가 최모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자 박장대소하며 좋아했다.

“웃지 마라.”

“너 방금 진심으로 초딩 같았다. 새끼 귀엽네. 유치원생도 아니고 다 큰 놈이 쪽팔리게 뭔 짝사랑이냐? 얼른 고백해.”

“됐어!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데 뭔 고백이야. 괜히 사이만 껄끄럽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원래 짝사랑은 고백하다 까이든가 사귀든가 둘 중 하나야. 그렇게 계속 가만있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랑 엮인다. 그리고 고백 안 하면 마음만 더 커져서 병 생겨요. 너도 알지? 상사병에는 약도 없다.”

“상사병 아니거든! 내가 알아서 해. 너나 잘하세요. 너나!”

“난 못 했으니까 너라도 잘하라고 조언하는 거 아니겠냐. 갑자기 긴장 풀리니까 소변 마려운데 찬희야, 나 화장실 갔다 와도 되냐?”

“어. 갔다 와.”

“다 먹지 말고 기다려. 갔다 와서 연애 상담 또 해 줄게.”

“필요 없거든.”

철컥-

“워, 원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김일상이 당직실 문을 열자 이찬희가 때마침 그 앞을 지나고 있던 태경을 불렀다.

“아, 안녕하세요.”

원장님이란 말에 김일상을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이 선생 친구 왔다고 하더니 이분이시구나?”

“네, 맞아요. 제 친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일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그럼 이 선생이랑 대화 잘 나눠요.”

“저기, 원장님?”

태경이 간단한 인사와 함께 가던 길을 가려 하자 김일상이 진지한 얼굴로 별안간 태경을 급하게 불러 세웠다.

“야! 너 왜 그래? 원장님을 왜 불러?”

당황한 이찬희가 친구를 팔을 붙잡고 귀에 중얼거렸지만, 김일중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경에게 다가갔다.

“저기 원장님. 제가 뭐 하나만 여쭤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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