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가장 큰 복수
“채량이가 쓴 편지라고요?”
“네, 맞습니다.”
할머니는 남자가 건넨 편지가 채령이의 유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이걸 나중에야 발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모텔 사장은 할머니에게 편지를 건넨 뒤 장례식장을 나갔다.
그 뒤, 몇 명의 직원들이 더 문상을 오고 늦은 밤이 된 뒤에야 장례식장에 할머니 혼자 남았다.
조용히 바닥에 앉은 할머니는 재단 위에 있는 손녀의 영정 사진을 한 번 쳐다본 뒤 편지 봉투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는 미쳐 보이지 않던 편지 봉투를 자세히 살펴보니 한쪽 귀퉁이에 새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언제가 할머니가 TV를 보다 우연히 새처럼 살고 싶다고 한 적이 있는데 고채량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새 그림이 있는 편지지와 봉투를 준비하기 위해 모텔 근처 몇 군데 마트를 돌아다녔다.
편지 봉투를 열어보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순간 집에 가서 열어 볼까 생각하던 할머니는 그냥 여기서 편지를 읽기로 했다.
-할머니, 나 채량이에요.
당연히 할아버지 앞으로 남긴 편지일 거로 생각했던 할머니는 첫 줄부터 쓰인 ‘할머니’라는 호칭에 적잖이 당황했다.
“나한테 쓴 건가…….”
-이 편지를 보고 계신다면 제 소식을 들으셨다는 거겠죠? 먼저 죄송해요. 이런 소식 듣게 해서 정말 죄송해요.
할아버지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실 거 같고 아마도 제 생각에 할머니는 덤덤하실 거 같아요.
할머니는 늘 그러셨으니까 이번에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해요.
할머니? 언젠가 겨울에 급하게 연락받고 응급실 왔을 때 저한테 했던 말 기억하세요?
그때 할머니가 나한테 그랬어요.
‘오죽 삶이 힘들면 스스로 자꾸 상처를 내겠니. 나는 너 이해한다.’
그 말이 한동안 저한테 참 많이 위로됐어요. 제가 이렇게 편지를 남긴 이유는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절 예뻐했던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밥을 먹고 다니냐고 물었을 때 할머니가 차려 준다고 했더니 그랬어요.
할머니가 좋은 분이라고요. 밥을 차려 주는 건 마음이 담긴 행동이라는 말도 함께 해 주셨어요.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어쩌다 집에 가서 밥을 먹을 때마다 제가 좋아하는 반찬들이 참 많았던 거 같아요. 평소 두 분께서 드시지도 않던 반찬들이라 할머니가 일부러 차리셨구나 싶어서 감사했어요.
할머니는 절 볼 때마다 외할머니와 엄마가 생각나서 힘드셨겠지만, 전 할머니 보는 거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할머니는 나한테 왜 그렇게 무뚝뚝할까? 하던 의문점들이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볼 때마다 죄송했어요. 할아버지 때문에 외할머니 때문에 할머니가 평생 상처받고 사셨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참 아팠어요.
근데 할머니 그거 아세요?
저도 어디서 들은 말인데 가장 큰 복수는 용서래요.
할머니, 힘들고 괴로우시겠지만 할아버지 그만 용서해 주세요. 할아버지가 예뻐서 용서해 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할머니 마음이 편했으면 해서 하는 말이에요.
지금까지 계속 상처받고 힘들게 사셨는데 이제라도 조금 편한 마음으로 사셨으면 해서요.
할머니 마음에 담긴 모든 응어리 다 풀어 버리고 새처럼 자유로워지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저처럼 용서하지 못하고 혼자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해요.
딱 한 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할머니랑 내가 진짜 손녀와 할머니 사이로 정상적인 사이로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요.
날 낳은 엄마에게조차 관심받지 못한 저에게 따뜻한 밥을 주시고 관심을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가끔은 정말 할머니 때문에 버틴 적도 있었어요.
내가 응급실에 갈 때마다 날 찾아와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게 마음에 위안이 됐던 거 같아요.
할아버지 너무 많이 미워하지 마시고, 두 분 늘 건강하세요.
그리고 혹시 만약 나중에요.
나중이라는 또 다른 삶이 있다면 그땐……. 할 수만 있다면 그땐 엄마와 딸로 다시 만나요.
그땐 내가 할머니의 엄마로 만나서 넘치도록 많이 사랑해 드릴게요. 그러니 진짜 모녀로 우리 행복하게 살아요.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 어떤 누구도 할머니처럼 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도 말고 나를 위해 울지도 마세요.
가끔 아주 가끔 한 번씩 생각날 때마다 절 떠올려 주세요.
전, 그거 하나면 충분해요.
-고채량 올림-
“……!”
편지를 잡고 있는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사정없이 떨려 왔다.
이런 내용이 적혀 있을 거라고 전혀 예상 못 한 할머니는 꽤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곧이어 작은 어깨가 들썩이더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흐윽!”
고채량이 죽는 순간에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김길자 할머니의 눈에서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다. 내가…… 미안해.”
짊어진 삶의 무게가 무거워 누구도 마음에 들일 수 없던 할머니는 채량이에게 미안했다.
손녀가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도 몰랐기에 그 마음이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저 각자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편지를 읽는 순간 지난날들이 파도처럼 후회로 밀려와 전신을 덮쳤다.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다가가지 못한 자신이 너무 죄스러웠다.
“채량아…… 미안하다. 흐윽!”
절절한 울음소리가 텅 빈 장례식장에 하염없이 울렸다.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구슬프고 크게 울렸는지 1층 대기실을 지나던 의료진 사이에 살짝 들릴 정도였다.
할머니는 한동안 어린 손녀를 진심으로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을 등진 손녀가, 가장 외롭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손녀가 자신을 이해하고 있던 것이다.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마치 마음속에 응어리를 전부 토해 내듯이 처절하고 구슬프게 울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할머니는 눈물을 멈추고 마음을 추슬렀다.
“아가, 내가 널 기억할게. 매일 매일 기억할게.”
비틀거리듯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손녀의 영정 사진을 품에 안고 속삭이며 말했다.
“절대 널 잊지 않을게. 나중에 우리 다시 만나자. 그곳에서는 부디 편히 쉬렴.”
할머니는 한동안 아기를 끌어안듯 고채량의 영정 사진을 안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 * *
며칠 뒤-
“업무 시작하기 전이니까 짧게 말할게요.”
태경은 근래 계속 고민하던 사항을 말하기 위해 잠시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뭐야? 무슨 일 있나?”
“그러게요. 팀장님은 뭐 아세요?”
“나도 몰라.”
갑작스러운 호출에 직원들은 의아했지만,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제가 여러분을 부른 건 심신이 힘든 사람들이 병원을 찾았을 때 한 번씩 더 살펴봐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들 며칠 전 우리병원에 실려 왔던 고인이 된 고채량 학생을 기억하죠?”
태경이 고채량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직원들은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미 사망한 환자나 위급한 환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심신이 힘들고 도움이 필요한 환자가 보이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달라는 뜻이었다.
“여러분이 지금도 환자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걸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늘 바쁘게 돌아가는 응급실에서 한 번 더 눈길을 준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요. 그렇지만 그 잠깐의 도움으로 누군가는 힘을 얻고 삶의 끈을 놓지 않을 수도 있어요.”
백 퍼센트 장담은 못 하지만 태경은 고채량도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녀의 삶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상대방이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는 것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일하는 병원에 그런 사람이 왔을 때 외면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여기 모인 나도 여러분도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 다들 알고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 우리 꺼져 가는 생명이 보일 때 외면하지는 말자고요.”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인 나라다.
전혀 반갑지 않은 1위인 것이다. 게다가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0대 20대 30대의 젊은 층의 자살률이 증가했다고 전했다.
물론 태경과 직원들이 노력한다고 해도 자살률 1위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렸다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직원 중에도 그런 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제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게요. 여러분이 일하는 게 즐거워야 환자들도 잘 케어할 수 있다는 거 잊지 마세요. 이상입니다.”
태경의 말이 끝나자 직원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공감했다.
“역시, 우리 원장님은 다르네.”
“참! 멋지고 따뜻한 분이셔.”
“저래야 의사 아니것나? 가운만 걸친다고 다 의사가 아니다. 마음가짐이 다르다.”
몇몇 직원들과 오계순 주방장은 의국실을 나가며 본인들이 더 뿌듯해했다.
“팀장님?”
태경은 나가려는 최 팀장을 불렀다.
“캬! 원장님 정말이지 가슴을 울리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너무 감동적이어서 울컥했다니까요.”
“별말씀을요. 다름이 아니라 이것 좀 몇 장 프린트해서 응급실과 대기실에 붙여 주시겠어요?”
“이게 뭔가요?”
작은 메모지를 건네받으며 물어보던 최 팀장은 그 안에 쓰인 멘트를 보는 순간 대번에 이해됐다.
메모지 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말하기 힘든 고민이나 고통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아래 번호를 통해 상담받을 수 있습니다.
※정신건강 상담 전화 1577-0119, ※24시간 자살 예방 상담전화 1399, ※생명의 전화 1588-09191 ※청소년 상담 전화 1388.
만약 전화가 어렵고 당장 도움이 필요하다면 병원 의료진에게 알려 주세요.
당신은 이 세상을 살아갈 가치 있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살아 줘서 고마워요.
“이거 정말 좋은 방법인데요? 왜 이제까지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그러니까요. 저도 이번 일이 있고 나서야 생각이 떠올랐네요.”
“제가 멋지게 출력해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딱 붙이겠습니다.”
“부탁해요.”
“원장님, 어서 진료실 가 보세요.”
최 팀장과 함께 의국실을 나오는데 임정숙 간호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태경에게 다가왔다.
“환자 왔어요?”
“아니요. 김길자 할머니께서 오셨어요.”
“알겠어요.”
철컥-
“안녕하세요. 선생님.”
태경이 진료실로 들어가자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전했다.
“잘 지내셨어요?”
손녀인 고채량의 장례를 끝낸 할머니는 다시 우리병원을 찾았다.
“네, 잘 지냈습니다. 할머니도 잘 지내셨어요?”
“채량이 납골당에 안치하고 잘 보내 줬어요.”
“고생하셨네요.”
“고생은요.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씀드리려고 찾아왔어요.”
할머니는 장례식 비용을 지불해 준 것뿐만 아니라 병원 직원들이 텅 빈 장례식장을 채워 준 것 말고도 여러 가지 감사한 게 많았다.
“선생님 덕분에 채량이를 쓸쓸하지 않게 잘 보낼 수 있었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가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이거, 제가 준비한 건데요.”
“아닙니다. 이런 거 안 주셔도 돼요.”
쇼핑백을 탁자 위로 올리려고 하자 태경이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제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 주세요. 선생님이 이거 안 받으시면 저 마음 불편해서 집에 못 가요.”
할머니는 쇼핑백 안에 든 것을 꺼내 보였다. 안에 들어 있던 건 할머니가 직접 뜨개질로 만든 아크릴 수세미였다.
알록달록 여러 과일 모양으로 생긴 수세미는 하나하나 투명 봉투 속에 예쁘게 포장된 상태였다.
“정말 별거 아니죠? 병원 선생님들이랑 나누어 가지세요.”
민망한 듯 할머니는 살짝 웃음을 보였다.
“아니요. 안 그래도 집에 필요했던 건데 잘됐네요. 감사합니다.”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집에서 밥을 거의 해 먹지 않았기에 태경은 수세미를 사용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할머니의 정성이 민망하지 않도록 선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직원들도 좋아하겠어요.”
“그럴까요? 다행이네요. 선생님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얼른 일 보세요.”
작은 선물을 전달한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지 말고 차 한잔하고 가시죠.”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거동이 안 좋아서 집을 오래 비우면 안 돼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디 아프신 곳 있으시면 참지 마시고 언제든지 병원 오시고요.”
“네, 그럴게요. 선생님도 늘 건강하세요.”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할머니의 표정이 며칠 전보다 조금은 편해진 것만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편해졌다는 표현보다는 부드러워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태경은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된 고채량이 그곳에서는 편안하기를 빌며 진료실을 나서는 할머니의 남은 삶도 편안하길 온 마음으로 빌었다.
‘건강하세요. 할머니. 그리고 남은 인생은 손녀를 생각하며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