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06화 (305/472)

306화. 1/3 지점

“우리병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리 갈까요?”

“예, 아무 곳이나 가 주세요.”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은 기사는 남자와 함께 우리병원으로 출발했다.

아파트 단지를 나온 택시는 도로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이 병원이 응급실이 있는 병원입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기사 양반. 수고해요.”

“안녕히 가세요.”

“하아!”

요금을 지불한 남자는 긴 숨을 몰아쉰 뒤, 택시에서 내려 응급실 입구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진료 보시러 오셨어요?”

응급실이 그렇게 바쁘지 않았기에 남자는 얼마 기다리지 않고 진료 순서가 됐다.

“예, 진료 보러 왔어요.”

“환자분 우선 여기 앉으시고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아니에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그냥…….”

“여기로 한쪽 팔 집어넣으세요. 혈압 먼저 측정할게요.”

“이런 거 할 필요 없어요. 그냥 물이나 빼 줘요.”

간호사가 혈압 측정을 요구하자 남자는 손을 저으며 거부한 뒤 자신이 원하는 걸 바로 말했다.

“물을 빼 달라고요?”

“그래요. 그게 내가 다른 응급실에 가서 자주 물을 뺀다고. 내가 간경화가 있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근처 왔다가 너무 숨이 차서 그냥 가까운 곳 아무 곳이나 왔어요.”

“아, 네. 환자분 혹시 다른 지병은 없으시고요?”

“그런 거 할 필요 없다니까……. 그냥 물이나 얼른 빼 줘요. 하아! 나 숨차.”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다 환자분을 위한 거예요. 진료 때문에 그런 거니까 이해 부탁드릴게요.”

남자의 단호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간호사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렇게 나이가 좀 있고 고집이 있는 환자는 달래면서 응대하는 게 좋았다.

그런데 남자를 자세히 보니 팔다리는 말랐는데 배는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아까 들어올 때는 겉옷 때문에 잘 몰랐는데 가까이 보니 그게 확 느껴질 정도였다.

“환자분, 제가 몇 가지만 여쭤볼게요.”

“…….”

“환자분 간경화는 언제 진단받으셨어요?”

“…….”

“다른 지병은 없으시고요?”

“…….”

“환자분?”

“…….”

“저기 환자분, 협조를 해 주셔야 해요.”

“간호사 선생님 참 말이 많네. 그냥 물이나 빼 줘요.”

환자는 힘들어 짜증이 나서 그런지 간호사의 질문에 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 외의 것들은 어떤 말에도 들은 체하지 않았다.

담당 간호사도 이쯤 되니 기분이 살짝 불쾌했지만, 이런 환자들이 종종 있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대응하려 했다.

“환자분, 그러면 복수 천자만 원하시는 거세요?”

“그래요. 그거 해 줘요. 그거면 돼.”

남자는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고 계속 질문만 하는 간호사에게 삐진 듯 고개를 약간 돌린 채 답했다.

“저희가 환자분을 위해서 다른 피검사라든가 엑스레이 등을 진행해야만 하는데, 이런 것들 하나도 원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아!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요. 빨리 빼 주기나 해.”

“네, 그럼 제가 환자분 의견 의사 선생님께 전달할게요. 의사 선생님 오시면 말씀해 보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간호사는 더 이상 문진을 이어 가지 않고 의사에게 이 상황을 전달하기로 했다.

현명한 대처였다. 지금 아무런 검사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자의 몸 상태를 속단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복수만 빼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환자의 이후 진료에 자칫 방해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결정을 의사에게 넘긴 것이다.

“쌤, 일단 저 환자분 안쪽으로 안내해 주세요. 난 선생님께 연락할게요.”

“네.”

남자를 담당했던 간호사는 아래 연차 간호사에게 일을 시킨 후 이찬희에게 콜했다.

-네, 이찬희입니다.

“이 쌤, 응급실이요.”

-네, 무슨 환자예요?

“리버 시로시스(Liver Cirrhosis, 간경화)라서 복수만 빼 달라고 하는데 다른 문진은 대답도 안 하고 안하무인이에요.”

-검사는요?

“다른 검사도 전부 싫다고 하시네요. 그냥 다 됐고, 계속 복수만 빼 달라고 하세요.”

-피검사랑 엑스레이는 했나요?

“전혀요. 환자분이 고집 피워서 못 했어요.”

-오늘의 고집불통 환자인가 보네요.

하루에 한두 번씩은 고집을 부리는 환자가 내원했기에 이찬희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거부하면 별수 있나요. 제가 가서 빼 드려야죠. 곧 갈게요.

“네.”

최모나 일로 고민하고 있던 이찬희는 환자의 복수부터 빼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기, 복수 천자 준비 좀 해 주세요.”

“이 쌤, 환자 옆에 준비해놨습니다.”

이찬희가 응급실에 들어오며 말하자 주변에 있던 간호사가 바로 답했다.

“네, 고마워요.”

곧장 환자에게 향한 이찬희는 남자에게 다가가 자기를 소개하며 앉았다.

“안녕하세요, 고명환 환자분. 응급실 담당자 이찬희라고 합니다.”

“예, 안녕하세요.”

“복수가 불편해서 오신 거 맞으신가요?”

“맞아요. 난 다른 거 안 할 겁니다. 그냥 복수만 빨리 빼 주세요.”

“뭐, 바쁘신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간호사로부터 고집불통이라는 말을 들은 이찬희는 환자에게 굳이 강하게 나가지 않았다.

“그게……. 난 시간이 얼마 없어요. 병원에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 배를 보면……. 알지 않으세요?”

고명환이 눈짓으로 자신의 배를 가리키지 않아도 이찬희 역시 복수가 찬 그의 배를 봐서 알고 있었다.

“환자분, 어디서 진단받으신 건가요?”

“……네, 제 병은 제가 잘 압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이거 해 보자 저거 해 보자 그러는데 결국 다 소용없는 것도 잘 알아요.”

“그래도. 조금 더 치료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치료요? 자식 새끼들에게 해 준 것도 없는데 이 나이에 돈까지 축낼 수 있나요. 전 그렇게는 못 합니다.”

얼굴 가득 고집이 느껴지던 고명환은 자식이란 말에 단호하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냥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것이 마지막 아비의 도리라고, 그게 맞는다고…….”

조용히 답하던 그는 끝까지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중간에 고개를 돌렸다. 분명 말하지 못한 속내가 있어 보였지만, 이찬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선생님 저, 물이나 빼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복수 빼 드릴게요. 많이 해 보셔서 아시죠? 움직이지 마시고 저희가 고정해놓은 것은 절대 만지지 마세요.”

“그럼요.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아니고 잘 알고 있습니다.”

“자, 그럼 우리 환자분 준비해 주세요.”

이찬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명환은 익숙하다는 듯이 바지 버클을 풀고 바지를 골반에 걸칠 정도로 내렸다. 상의도 적당히 올려 의사가 배를 만져 보기 편할 만큼 노출했다.

“환자분 준비하시는 걸 보니까 여러 번 해 보셨나 보네요.”

“네, 많이 해 봤어요.”

고명환에게 긴장을 풀어 줄 겸 간단한 대화를 건넨 이찬희는 그의 볼록한 배를 전체적으로 쓱 한 번 쳐다봤다.

시진(의사가 눈으로 환자의 상태를 관찰하여 조사함)으로 이상한 점이 없는지 확인해 보지만, 아직 간경화로 인한 혈관 증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수술한 흔적이 크지 않게 있었다. 이찬희는 환자의 배를 타진해 보고 어느 정도의 복수가 있는지 확인했다.

텅텅텅

‘아주 가득 찼네.’

누가 들어도 복수로 배가 가득 찬 것이 느껴졌다. 이런 수준이 되면 의사는 안심하곤 한다.

이런 경우 복수가 가득 차서 어디를 찔러도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안전한 포인트가 있고 그 주변을 찔러야 한다.

이찬희는 고명환의 왼쪽 골반을 만지더니 가장 튀어나온 부분을 만졌다.

그 주변을 주로 찔러야 한다. 이찬희는 왼쪽 골반을 만지더니 가장 튀어나온 부분을 만진다.

이 부분은 ASIS(안테리얼 슈페리얼 일리악 스파인, anterior superior iliac spine)으로 복수 천자를 하는 위치선정의 기준이 된다.

이곳에서부터 배꼽까지 가상의 선을 그은 다음 3등분을 한다. 그리고 아래쪽 1/3 지점에 손톱으로 꾹 눌러서 살짝 자국을 남긴다.

‘이쯤 남기면 되겠다.’

이찬희는 그동안 응급실에 온 환자나 내원 환자들에게 수백 번도 더 한 술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단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고 크게 긴장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경험이 많았고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리 테이프를 길게 뜯어 놓은 이찬희는 일회용 멸균 장갑이 오염되지 않도록 양손에 착용한 후 포비돈을 적신 솜으로 손톱 표시를 한 곳을 중심으로 원을 그려 소독했다.

그 뒤 그 위에 구멍 포(멸균된 포로, 가운데 시술할 곳만 구멍이 있음)를 덮는다.

5cm 정도 되는 바늘과 그걸 감싸고 있는 비슷한 굵기의 카테터(바늘을 감싼 구부러지는 플라스틱으로, 바늘을 따라서 혈관이나 복강 내로 들어가게 됨. 끝이 뭉툭하여 다른 장기들에 손상을 주지 않음)를 집어 든다. 그리고 배 표면과 직각이거나 술자의 판단에 적합한 각도로 배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윽!”

곧이어 고명환의 통증 섞인 짧은소리와 함께 카테터를 통해서 누리끼리한 색의 복수가 나왔다.

‘좋아.’

복수가 나오는 걸 확인한 이찬희는 능숙하게 선을 연결해서 바닥에 있는 복수 받는 통 입구에 걸어 놓았다.

“자! 이제 복수 잘 나오고요. 저희가 통 차면 바로 바꿔 드릴게요. 너무 많이 빼면 안 돼서 양 보고 혈압 측정해 가면서 진행할게요.”

“네…….”

느낌인지 기분 탓인지 고명환의 대답이 무언가 시원치 않았지만, 이찬희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그 이후 다른 환자들을 보고 병동에서 울린 콜을 받고 환자를 보러 갔다.

응급 콜을 해결한 이찬희는 올라온 김에 다른 환자들을 한 번씩 살펴봤다.

“할아버님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자꾸 붕대 손대시면 그땐 원장님 호출합니다.”

“이 선생, 이번에는 내가 진짜 실수로 그랬어. 미안혀. 다시는 안 그럴게.”

“원장님이 그렇게 무서우세요?”

“당연하지. 나보고 선생님들 말 안 들으면 다른 병원 보낸다고 하셨는데 나 다른 병원 가기 싫단 말이야.”

“그러니까 간호사 선생님들 힘들게 하지 마시라고요.”

“알았어. 명심할게.”

“그럼 쉬세요.”

“그려. 이 선생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죽상인 얼굴 좀 펴고 일해. 그런 얼굴로 일하면 될 일도 안 돼.”

“예.”

“이 쌤, 회진 왔나 봐?”

환자의 말에 활짝 웃는 얼굴로 화답하며 병실을 나오던 이찬희는 다른 병실에서 나오던 의진과 마주쳤다.

“콜 받은 김에 한 바퀴 돌았어요.”

“병동 오신 거예요?”

“응. 자판기 커피 한 잔 콜?”

“좋죠.”

두 사람은 병동 휴게실에 있는 자판기 커피를 뽑았다.

“그래, 우리 이 쌤 무슨 고민이야?”

“네?”

“아까 304호 환자분이 죽상인 얼굴 펴라고 했잖아.”

“그 말을 들으셨어요?”

“아주 쩌렁쩌렁 말씀하시던데? 안 그래도 출근 때부터 이 쌤 표정이 안 좋길래 나도 물어보려고 했거든.”

“제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아요?”

커피를 들고 있던 이찬희는 휴게실 창문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보며 물었다.

“응. 아까 환자분 말대로 완전 죽상이야. 무슨 일 있어?”

“심각한 일은 아니고요.”

“심각한 일은 아니지만, 뭔가 일이 있긴 있다는 거네.”

이찬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병원 내 직원들은 다들 사이가 좋았지만, 특히 의진과 임정숙 간호사 최모나는 유독 사이가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최모나가 오늘 잔뜩 꾸미고 온 이유를 의진은 알 거라 생각했다.

“선생님, 그게 사실…….”

Rrrrrrrrrrrr

그렇게 이유를 물어보려던 찰나 가운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이 빠르게 울렸다.

“잠시만요. 네, 이찬희입니다.”

-이 쌤. 아까 그 복수 환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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