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13화 (312/472)

313화. 팽팽한 기 싸움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원장님, 저희 처음이 아닙니다. 저랑 구면일 텐데요…….”

“…….”

구면이라고? 그럴 리가.

태경은 본인뿐만 아니라 직원들까지 인정할 정도로 기억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게다가 한 번 진료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면이라고 소개한 중년 남자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진료를 본 환자가 아닐까 싶은 생각에 물어보려던 찰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표정을 보니 생각이 잘 안 나시나 봅니다.”

“혹시 예전에 제가 진료할 때 뵀었나요?”

“아니요. 저는 원장님께 진료를 본 적이 없습니다. 진료를 본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혹시 가족분이 저에게 진료를 보셨나요?”

“네. 원장님, 김소향 환자 기억하시나요?”

“……!”

남자가 말하자 태경은 단번에 누군지 기억이 났다.

“김소향 환자분 남편 되시죠?”

“맞습니다.”

김소향은 얼마 전에 치질 수술했던 환자이며 불과 몇 시간 전에도 수술 부위 소독을 위해 외래진료를 봤던 여자였다.

수술하는 날과 퇴원하는 날 환자가 남편과 함께 와서 그때 인사를 했기에 얼굴이 기억에 남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외래 진료 당시, 김소향과 나눴던 대화가 빠르게 떠오르며 아이러니하더니 순간 얕은 소름이 돋았다.

‘오늘은 직접 운전하고 오셨나 봐요.’

‘바깥양반이 워낙 낚시에 미쳐 있는 사람이라 마누라가 아픈데도 낚시를 갔다니까요.’

김소향은 분명 남편이 작은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지금 낚시를 갔다고 했었다. 그 말인즉, 아내인 김소향조차 남편이 하는 일은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태경은 이곳이 그만큼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곳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기억이 나셨군요? 이름을 말하니 바로 알아보시네요.”

“아. 네.”

“제가 생각해 보니 원장님께 이름을 말한 적이 없더군요. 이후락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인사를 하는 그를 본 태경은 순간 소름이 작게 돋았다.

아까 병원에서 김소향에게도 말했다시피 잠깐 마주친 이후락은 인상이 참 좋은 느낌의 사람이었다.

정확하게 말해 누가 봐도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익숙하게 회사로 출근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중년 회사원일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랬다. 그런데 그때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이후락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이목구비가 따로 놀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서운 느낌이 강했고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나치게 정중하고 살가운 언행이 오히려 철저하게 훈련된 말투와 행동으로 보였다.

태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사람을 죽여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을 사람이구나라고 말이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병원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이후락의 진짜 모습을 본 태경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장님. 이쪽으로 오시죠?”

“저, 감덕찬 의원님은 안 계시나요?”

“네, 의원님은 여기 안 계십니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아무 설명도 못 들으셨군요?”

“네, 병원에서 급하게 연락받고 바로 오는 길입니다.”

“그렇군요. 여기는 군부대입니다.”

“아……. 비밀 부대 뭐, 그런 건가요?”

태경 역시 얼핏 비밀 부대 같은 기관이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비밀이라는 말로도 부족하죠. 소위 비밀 부대라고 하면 부대에는 기록이 없지만, 주민번호는 있고 사회기록은 대부분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러한 기록도 모두 없죠. 군부대 기록도 물론 없습니다.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노출되면 안 되기도 하고요.”

“그럼 아내분께서도…….”

“우리 아내요? 네, 모릅니다. 저같이 이 기관에 오래 몸담은 몇몇 사람 중에 결혼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도 사정은 똑같습니다. 대부분 가짜 신분증으로 살아가고, 가족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죠. 아내에게 전, 만년 월급쟁이에 낚시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남편일 뿐입니다. 미안한 마음은 나중에 은퇴하면 그때 다 갚아야죠.”

“철저하게 이중생활을 하시는 거네요.”

“이중생활이요? 하하하!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이후락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대수롭지 않은 듯 호탕하게 웃었다.

“틀린 말이 아니네요. 아무튼, 이쪽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실 겁니다.”

이후락의 말을 듣고 있는 태경은 놀랐다.

그가 말하는 것이 거짓일 리는 없겠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 진짜 이런 존재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기관에 들어와 있다니 뭔가 기분이 묘하게 이상했다.

“저희끼리는 군부대라는 자각은 있지만 그렇게 부를 수 없어서 회사에서 쓰는 명칭들로 서로 부르고 있어요. 저는 과장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냥 편하게 이 과장이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태경은 이후락을 따라 긴 복도를 걷다가 앞서 걷던 그의 손에 눈길이 갔다.

병원에서 인사했을 때도 몰랐고 조금 아까 밖에서도 보이지 않던 상처들이 보였다.

그 상처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그가 한 말들이 점점 더 명확하게 다가왔다.

뭔가 섬뜩한 기분도 들었다.

비밀기관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건물도 어딘가 이상했다. 밖에서 볼 때는 정갈한 3층 구조에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는데, 내부는 어마어마하게 큰 지하층이 존재했다.

‘여기서 길 잃었다간 절대 못 나가겠네. 구조가 어떻게 된 거지? 복잡하네.’

복도와 복도 그리고 천장의 높이로 가늠하건대, 정말로 큰 구조물들이 지하층들에 있었다.

“원장님. 혹시 궁금한 건 없으신가요? 궁금한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 편하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왜 궁금한 게 없겠는가?

태경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궁금했지만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이 과장님. 여기 의료진은 없습니까?”

“의료진이라……. 원래 한 분 계셨는데 개인 사정이 있어서 나갔습니다. 저희가 채용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다 보니 새로 모집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요.”

말할 때마다 미소를 품는 것이 태경을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계속 구하는 중인데 그런 와중에 사원 하나가 다쳤습니다. 그래서 감덕찬 의원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생각도 하지 않고 원장님을 말씀하시더라고요.”

태경은 이후락의 말을 들으니 감덕찬 의원이 왜 그렇게 급하게 연락을 했는지 이해됐다.

“처음에 이름을 듣고 설마 아내가 수술받은 우리병원 원장님은 아니겠지 했는데, 역시 설마가 사람을 잡는군요. 원장님인 걸 알고는 괜히 더 반가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 그리고 의원님께서 원장님 관련해서 저한테 부탁한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탁이요?”

“네, 다친 사람을 살리고 싶으냐고 해서 당연하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러면 무조건 원장님이 하는 말을 잘 들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알았다고 했습니다.”

“아, 네. 그런데 현재 환자는 어떤 상태입니까?”

“안 그래도 궁금하실 거 같았습니다. 여깁니다.”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걸음을 멈춘 이후락이 복도에 있는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다섯 번째 바이탈이 태경을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하며 후각에 들어찼다.

냄새는 심한 3단계인 분뇨 냄새와 아주 약하게 4단계 냄새가 느껴지고 있었다.

“들어가시죠.”

“네.”

안으로 들어가니 딱딱한 복도와 달리 내부는 평범한 아파트와 같은 구조였다. 창문만 없을 뿐이지 일반 가정집과 똑같았다.

기분 탓인지 창문이 없는 밀폐된 공간 탓인지 출구를 찾지 못한 다섯 번째 바이탈이 더 날뛰는 것만 같았다.

“박 대리? 우리 왔어.”

이후락이 누군가를 부르며 앞장서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네. 과장님.”

태경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환자에게 향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건장한 사내가 보였고 오른쪽 정강이가 심하게 부어 있다.

피멍이 가득했고 누가 보아도 골절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겁니까? 근처 병원에 갈 수는 없었나요?”

“네, 저희가 의료보험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진료 기록도 전혀 남으면 안 되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박 대리, 보이지? 의사 선생님 오셨어. 자네, 어쩌다 다쳤어?”

“예, 21시경 보행 중 넘어져 다쳤습니다.”

순간 태경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살짝 일그러졌다.

개소리였다. 정말이지 지나가던 개가 듣고 웃을 소리였다.

넘어져서 이렇게 다치려면 땅이 벌떡 일어나 이 사람의 정강이를 세게, 그것도 아주 세게 차야 가능할 일이었다.

어차피 물어봤자 소용없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태경은 그냥 환자 병소에 집중해서 보기로 했다.

“원장님? 어떻습니까?”

“수술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옮겨서 수술하죠. 여기 수술방은 없습니까? 다른 의료진은 전혀 없어요?”

“그게 저희가 수술방은 있긴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하시면 좋겠네요. 우선 저희가 구비한 물품과 장비를 보고 판단을 한번 해 보실까요?”

“안 됩니다.”

“네?!”

태경은 그가 주도하는 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때문인지 계속 어색한 미소를 보이던 입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이후락은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원장님. 그래도 한번 보시고 판단을 하시는 게 어떨까요?”

“아까 그러셨죠? 감덕찬 의원님이 환자 살리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살리고 싶다고요.”

“맞습니다. 다친 부하를 살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말인즉 이 과장님도 지금 박 대리님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면 의원님께 대답했던 대로 제 말을 따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원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장님! 여기는 원장님이 사는 일반적인 곳이 아닙니다. 이곳에 오셨으면 제 말에 따라 주셔야 합니다. 여기는 이곳만의 원칙과 규칙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태경과 이후락은 누구 하나 양보할 수 없다는 듯이 팽팽한 기 싸움이 이어졌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고무줄같이 긴장감이 가득했다.

“저 역시 이 과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 다른 의료진이 없는 것 같고, 수술 중 내부의 상태를 모르면 끊임없이 새로운 재료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멸균 상태를 유지하면서 기구를 전달해 주셔야 하는데 그러한 교육을 받으신 분이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우리 쪽에는 생각보다 인재도 많고 잘 배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원장님께서 조금만 교육해 주시면 저희가 잘 따라…….”

“이 과장님!”

태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다친 사람을 소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방치할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까?”

“저희가 의사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지 않을까요?”

“그 점입니다.”

“네?!”

“의료인이 아닌데 교육을 짧게 받고 수술을 도우시겠다니요?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단호하게만 말씀하시지 마시죠. 저희도 저희 사정이 있습니다.”

“과장님! 그럼 이렇게 질문하겠습니다. 과장님이 하시는 일에 제가 교육 좀 받고 바로 함께한다면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원장님, 저희는 총과 칼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총알이 오가는 전장에 그것은 불가능하겠죠.”

“수술방도 전쟁터입니다.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

태경의 눈빛은 단호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이후락이 어떤 말을 해도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과장님! 박 대리님 안 살릴 겁니까? 살려야죠. 과장님 부하이지 않습니까?”

태경은 침묵하는 이후락에게 쐐기를 박듯이 계속 말을 덧붙였다.

“…….”

“이곳의 원칙과 규칙, 전 일반인이라 그런 거 모릅니다. 다만, 저는 의사이기 때문에 환자가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환자만 생각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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