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대단한 정신력
“…….”
“이곳의 원칙과 규칙, 전 일반인이라 그런 거 모릅니다. 다만, 저는 의사이기 때문에 환자가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환자만 생각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하!”
짧은 침묵을 깨트린 이후락이 무거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부장님께 잠시 의논 좀 드릴게요. 그런 눈으로 보셔도 소용없습니다. 이 사항은 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전, 과장님이 부하를 생각하는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부장님이라는 분께 말씀 좀 잘해 주세요.”
“참나!”
태경의 진심 어린 말에 이후락은 살짝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박 대리가 누구 사람인지 모르겠군요. 감덕찬 의원님께 얼핏 듣긴 했지만, 원장님 정말 환자에 대한 고집이 보통이 아닌 분이시네요.”
“제가 원래 환자에 관한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습니다.”
“정말 그런 분 같네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긴 설전을 끝낸 이후락이 핸드폰을 들고 방을 나갔다. 그런데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방으로 들어오자 태경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들어온 거 보면 분명 여기 방침을 운운하며 거절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경은 티끌만큼도 물러설 생각 없이 다시 설득할 생각이었다.
“과장님. 어떻게 됐나요? 안 됩니까?”
“원장님이 이기셨습니다.”
다시 한번 전투 태세로 나가려던 그때, 이후락이 기분 좋은 결과를 들려줬다.
“예!?”
“부장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럼요. 다친 부하를 두고 거짓말을 할 만큼 제가 그렇게까지 못된 놈은 아닙니다. 대신 저희 측에서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고 했다. 태경이 원하는 대답에 기뻐하려는 찰나, 이후락이 조건을 운운하고 나섰다.
“조건이요? 그게 뭔가요?”
“아무 기록도 안 남기게 부탁드릴게요. 그 이유는 원장님도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술만 바로 끝나고 퇴원하면 좋겠습니다. 원장님도 아시겠지만, 저희도 많이 양보한 거니 이건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이후락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사실상 명령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태경도 그들이 한 발 물러섰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
“원장님. 그럼 일단 이송 부탁드릴게요.”
“박 대리님을 이송하려면 들것이 필요한데 여기 들것 있습니까?”
“잠시만요.”
태경의 말에 이후락이 어딘가로 무전을 남기자 곧이어 다른 사람들이 들것을 들고 들어와 박 대리를 조심히 눕혔다. 그러다가 방에 들어온 한 사람이 이후락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과장님. 괜찮습니까?”
“괜찮아. 부장님께 여쭤봤더니 사장님이 김태경 원장님이 하라는 대로 하라고 하셨대.”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사장님께서 벌써 이 일을 알고 계신 겁니까?”
“그러신가 봐. 감덕찬 의원님에게 들었는지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알고 있어. 우리는 하라는 대로 하면 되니까 어서 밖에 차부터 대기시키라고 전해.”
“네, 과장님. 배달 차량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누가 들으면 평범한 회사 직원들의 대화로 들릴 정도였다.
태경이 다른 사람들과 방에서 나와 건물 밖으로 나가자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밴이 있었다.
차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누가 봐도 고가의 차량으로 보였다.
철컥-
뒷문을 열자 안은 구급 차량과 그 구조가 비슷했다.
벤 차량의 안이 일반 구급차와 다른 점은 훨씬 공간이 넓다는 것뿐이었다. 산소통부터 제세동기 그리고 수많은 재료까지 거의 같았다. 오히려 공간이 넓어서 더 좋았다.
그리고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면, 역시나 태경이 처음 타고 온 차와 같이 밖을 볼 수가 없었고 밖에서도 안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럼, 전 환자분 옆에서 함께 가겠습니다.”
“네, 저도 원장님 옆에서 가겠습니다. 특별히 신경 써서 운전해.”
“예, 알겠습니다.”
이후락이 운전하는 사원에게 묵직하게 한마디를 하고 곧이어 차가 출발했다.
솔직히 그가 굳이 옆자리에 타지 않아도 됐지만, 우선은 환자를 이송하는 것이 먼저라 판단한 태경은 박 대리에 집중하며 진료를 시작했다.
“환자분, 우선 몇 가지 확인부터 할게요. 감각이 느껴지나요?”
“……네.”
“이 진통제를 먹어요. 통증의 강도를 조금은 도와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발가락을 한 번 움직여 보세요.”
박 대리는 미세하게 모든 발가락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잘했어요.”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은 아직 정상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혈액순환을 확인하기 위해 발가락 등을 꾹 눌러서 하얗게 만든 다음에 다시 붉어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모세혈관이 원활해야 가능한 것들인데 정상적으로 붉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태경은 다소 마음이 놓였다.
이쯤 되니까 정말 대단한 환자였다.
박 대리는 골절된 다리로 차량에 이송될 때와 진찰받을 때 통증을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통증이 없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골절의 통증은 마약성 진통제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 대리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중간중간 표정의 변화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통증을 참는 것같이 보였다. 대단한 정신력이다.
‘엄청 아플 텐데…….’
통상 이 정도의 통증이라면 보통은 자연스레 아픔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스러운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앓는 소리는 물론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통증보다 더 힘든 훈련이 당연시됐기 때문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곳에서 어떤 훈련을 받았던 것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더불어 환자의 통증을 빨리 해결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환자분?”
박 대리가 미간과 눈을 살짝 찡그리자 그걸 놓치지 않은 태경이 그를 불렀다.
“혹시 아프면 약을 더 드릴 테니 참지 말고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환자분, 제 말 잘 들으세요. 지금은 훈련받는 게 아니에요. 미련하게 참지 말고 아프면 꼭 아프다고 알려 줘야 합니다. 아셨죠?”
“그래, 박 대리. 여기 원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해.”
“알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말해요.”
“예……. 감사합니다.”
태경은 힘든 훈련으로 고통을 참는 게 익숙한 박 대리에게 거듭 참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밖은 여전히 볼 수 없었지만, 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중간중간 이후락이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환자에 집중하고 있는 태경이 크게 반응하지 않자 그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차 안에는 고요한 정적만 흘렀다. 그리고 시계를 못 봐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밖은 아마 새벽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요한 정적 때문인지 새벽이라고 느껴서인지 처음 왔을 때보다 긴장이 풀어진 태경도 살짝 졸음이 오고 있었다.
눈꺼풀을 크게 감았다 뜨고 고개를 흔들며 졸음을 쫓고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또 몇십 분을 이동했다고 느끼던 그때였다.
“……!”
순간, 박 대리의 다섯 번째 바이탈이 바뀌었다. 서서히 쏟아지던 졸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찬물로 세수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태경은 매서운 눈빛으로 환자의 다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환자분?”
“…….”
“박 대리님?”
“아, 네. 부르셨습니까?”
“혹시 통증에 변화가 있나요?”
“네.”
“어떠신데요?”
“통증이 가라앉았습니다.”
통증이 가라앉았다고 말하는 박 대리는 아까보다 표정이 좋아졌지만, 반대로 태경의 표정은 점차 심각해지고 있었다.
“박 대리, 통증이 나아졌다니 다행이네.”
옆에 앉은 이후락이 모처럼 입을 열었지만, 귀에 전혀 들리지 않은 태경은 박 대리의 발가락을 꾹 잡았다.
“제가 발가락 잡은 게 느껴져요?”
“어! 아니요. 안 느껴집니다.”
태경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엄지발가락을 꾹 눌러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붉은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모세혈관이 원활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콤파트먼트 신드롬(compartment syndrome, 구획증후군)이다. 여기 포비돈, 아니 소독약 있습니까?”
“네? 소독약이요?”
“빨간약이요! 빨간약. 급합니다.”
휴대폰을 보며 대충 대답하던 이후락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태경으로 인해 당황했다.
하지만 태경은 그의 반응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개조되어 밝은 조명이 있는 차 안에서 여기저기 사물함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이후락도 자세히는 모르는 것 같은 눈치였기에 직접 찾는 게 빠를 거 같았다.
‘저기 있다.’
태경은 구석에 있는 포비돈 용액 1L짜리를 들더니 뚜껑을 순식간에 따 버렸다. 그리고 부을 대로 부어올라 보기 흉한 환자의 오른쪽 다리에 포비돈을 들이부었다.
차 안 바닥은 물감을 쏟은 것처럼 붉은색으로 난자됐다.
태경의 급작스러운 행동에 이후락은 꽤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재하거나 반감을 드러내지 않은 채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원장님. 상황설명을 해 주시면 제가 옆에서 돕겠습니다.”
지금까지 웃음을 띠며 말하던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역시 훈련받은 군인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에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락은 감덕찬이 그토록 칭찬하던 태경 정도의 의사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자신이 무엇을 할지 의견을 구한 것이다.
“과장님. 여기 메스가 있나요?”
“메스라면 의료용 칼이요?”
“네, 맞습니다.”
“잠시만요.”
태경의 말에 이후락이 앞 좌석을 두 번 두들겼다.
“네, 과장님”
“김 대리. 여기 메스 있나?”
“과장님 앉아 계시는 의자 밑에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이후락이 신속하게 의자 밑의 물품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물품들을 꺼내자 태경은 빠르게 멸균 장갑을 착용하고 메스의 칼날을 조립했다. 그리고 소독약으로 범벅이 된 박 대리의 오른쪽 다리에 메스를 갖다 대려고 하고 있었다.
“자, 잠시만요! 원장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후락이 별안간 목청을 높였다.
“네. 과장님.”
“저는 의학에 관해서는 일자무식이라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박 대리의 상관으로서 지금의 상황을 알아야 할 의무는 있습니다. 갑자기 왜 칼을 갖다 대시는 건가요?”
점잖은 권리 주장이었다.
급한 상황이었지만, 박 대리의 상관으로 이 상황의 책임자이니만큼 알고 싶은 심정이 이해됐다.
“지금 박 대리님은 외상으로 내부압력이 높아지고 그 압력이 혈관과 신경을 누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 근막을 절개해서 감압하지 않으면 다리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다리요? 지금 그러니까 박 대리의 다리가 없어진다는 건가요?”
“뭐, 뭐라고요……. 제 다리를 말씀하신 겁니까?”
이후락뿐만 아니라 이때까지도 정신을 붙잡고 있던 박 대리가 상당히 놀란 얼굴로 말했다.
“다, 다리가……. 내 다리가 없어진다니……. 말도 안 돼. 내 다리…… 다리…….”
얼마나 놀랐던지 그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계속 혼잣말을 이어 갔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